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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09화 (109/164)

00109 9. 아이는 어른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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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브리온은 생각에 잠겼다. 오래된 일들을 돌이키는 중이었다.

친부모의 얼굴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다섯 살 무렵이었다.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동생이 죽었다. 돌림병이었다. 그 일로 부모는 자포자기해 버렸다. 온 가족이 쫄쫄 굶던 어느 날이었다. 잠에서 깨니 집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셈브리온은 버림받았음을 깨달았다. 내란이 터지기 전에도 벨체터에는 화적이 들끓었다. 교외의 오두막에서는 살해당할 미래가 훤했다. 경비대나마 도는 번화가를 헤매는 편이 나았다.

삼 년을 부랑아로 살았다. 거지꼴로 길을 걷던 참이었다.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돌팔매질을 해 왔다. 셈브리온은 울며 도망쳤다. 그때, 누군가가 셈브리온의 덜미를 잡았다. 번쩍 들어 올렸다. 훤칠하고 다부져 보이는 여인이었다. 셈브리온은 저와 같은 새빨간 머리카락을 처음 보았다. 용병 힐가 데힐은 셈브리온을 데려가서 씻기고, 자신의 성을 주었다.

힐가의 집에는 매일같이 비렁뱅이가 찾아왔다. 힐가는 모두에게 묽은 곡물 수프를 나누어주었다. 셈브리온이 왜 나처럼 집에 들이지는 않느냐고 묻자, 깔깔거리며 답했다. 이브론은 나랑 같은 빨강 머리잖아. 꼭 친아들 같아서. 힐가는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셈브리온은 힐가를 어머니로 여겼다. 겉으로 나타낸 적은 없었지만.

열 살 때였다. 힐가가 셈브리온 또래의 말라깽이를 주워 왔다. 길바닥에서 옷자락을 쥐고 놓으려 하지 않았노라고 했다. 이번에도 씻기고 셈브리온의 옷을 입혀 주었다. 뻔뻔스러운 녀석이었다.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며 버티기에, 킬타로스는 힐가의 두 번째 아이가 되었다.

셈브리온과 킬타로스는 용병 길드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힐가는 의뢰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여자 용병을 눈엣가시로 보는 길드에밖에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었다. 두 아이는 힐가가 떠나면 길드에서 먹고 잤다. 돌아오면 힐가의 집에서 검술을 배우고, 마음껏 어리광 부렸다.

용병이 된 때는 언제였을까. 그래, 열여섯 살이었다. 은패를 지닌 용병이 셈브리온을 보고 “그 빨강 머리 년이 애라도 뱄던가?” 하며 낄낄거렸다. 셈브리온의 움직임은 쏜살같았다. 벽에 걸린 장식용 검을 잡아 뜯었다. 놈에게 달려들었다. 놈은 양팔이 잘렸고, 셈브리온은 말짱했다. 용병 길드의 지부장은 셈브리온을 지하에 가두었다. 힐가에게 돈을 내밀며 ‘저것’을 팔라고 꼬드겼다. 힐가는 아들을 내놓으라며 버텼으나, 셈브리온의 이름은 길드 명부에 올라가고 말았다.

열여덟 살에는 킬타로스까지 용병 노릇을 시작했다. 그때쯤에 아고르와도 만났다. 아고르는 집안일에 소질이 있었다. 셋이서 치워도 개판이던 집 꼴이 아고르의 손길 한 번에 깔끔해졌다. 힐가와 두 아이는 만장일치로 아고르를 받아들였다.

스물두 살. ‘벨체터 내란’이 일어났다. 왕실과 귀족 연합이 갈라져서 전쟁을 벌였다. 평민들에게는 지옥의 시작이었다. 왕실 기사는 반동분자라는 구실을 붙여, 심심풀이로 평민을 베었다. 귀족의 사병은 여염집을 수탈하며 물자를 채웠다. 셈브리온과 두 청년은 “곧 지나갈 거야. 괜찮아.” 하는 힐가의 위안을 믿었다.

이듬해 힐가는 황혼의 세계로 떠났다. 왕실 기사단의 탈영병들에게 입은 치명상 때문이었다. 손쓸 도리가 없었다. 힐가가 얻어 온 정보는 용병 길드에서 알차게도 써먹었다. 분노한 셈브리온은 서른 명쯤 되는 용병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었다. 그 무렵 셈브리온 데힐은 길드 제일의 전력(戰力)이었다.

스물다섯 살에 브링어가 되었다. 스물여섯 살에는 ‘무너지지 않는 하늘탑’ 델페레타에서, 벨체터 내란을 진압하겠답시고 파병군을 보냈다. 용병 길드는 제국에 납작 엎드렸다. 브링어를 보유했다는 사실까지 까발렸다. 셈브리온은 노련한 브링어인 제국 기사단장에게 패하여, 협력하는 신세가 되었다.

2년 뒤, 델페레타 파병군이 철수했다. 자유의 몸이 된 셈브리온에게 왕자가 찾아왔다. 이 일만 잘되면 내란도 끝나고 평화가 돌아올 거다. 달콤한 꼬드김이었다. 셈브리온은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셈브리온이 귀족 연합을 이끌던 데바르트 공작을 암살하자, 광분한 귀족 연합은 왕실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왕당파는 셈브리온을 귀족 연합에 던져 주고자 했다. 그 대가로 귀중한 기사단 한 개가 사라졌다.

스물아홉 살. 3월이었다. 셈브리온은 소소리바람을 맞으며 델페레타의 국경선을 넘었다. 그리고 신록이 돋아나는 5월에, 회색 머리카락 소녀를 만났다.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고달픈 삶이었다. ……참으로 행복한 삶이었다.

“이-샤.”

이에샤는 답하지 않았다. 셈브리온이 깨끗하게 빨아 둔 상앗빛 코트 차림이었다. 10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첫새벽이라 쌀쌀했다. 셈브리온은 등짐을 진 채였다. 눈앞의 성문만 지나면, 수도에서 셈브리온 데힐이라는 뜨내기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샤.”

“……응.”

“네가 시집가기 전에는 돌아올게. 내 제자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신부 되는 모습은 봐야지.”

“언제라도 괜찮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웃고 말았다. 요즈음 이에샤는 어른스러워졌다. 화내지도 않았고, 우울해하는 일도 줄었다. 참을성을 길렀다. 낯빛이 부드러워졌다. 연인과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결국은 멘델린 소공작을 만나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 아쉬웠지만, 벨체터인이 멘델린을 만나서 좋을 게 없었다. 이제부터 제국에 벌어질 일을 생각해서라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샤는 괜찮으리라. 마음을 다스리려고 해도, 걱정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눈과 눈을 맞추었다.

“이-샤, 잘 들어.”

“세비?”

“난 대륙 최강으로 꼽히는 브링어 중 하나야.”

“뭐야, 떠나기 전 마지막 자기 자랑이야?”

“레오웰의 악귀 헤놀하고도 호각으로 싸웠고, 해적섬 하나를 청소한 적도 있어. 샤비어 마파랑 사태에도 불려갔다가 샤비어 왕이 날 귀족으로 만들고 안 놓아 주려 해서 야반도주하기까지 했어. 벨체터의 왕실 기사단 한 개는 나 한 놈 잡으려다 사라져 버렸지. 네 스승은 그런 사람이야.”

이에샤는 묵묵했다. 셈브리온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성싶었다. 입을 열면 울음이 터져 나올까 봐 대답할 수 없었다.

“기 죽지 마. 누구든 널 괴롭게 한다면 내 모든 걸 걸고 싸울 테니까.”

“……응. 고마워, 세비.”

“그리고 너는 나보다도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검에게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것도 잊지 마.”

셈브리온의 두꺼운 팔이 이에샤를 부둥켰다. 이에샤도 셈브리온의 등을 끌어안았다. 짙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셈브리온은 메어서 꺽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 이-샤.”

“응.”

“잘 있어.”

“응.”

“다시 만나자.”

“꼭이야.”

성년을 두 개월 앞두고, 이에샤는 스승과 헤어졌다. 혼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연인도 있었고 동료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에샤의 세상에서 축이 무너져 내렸다. 올겨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 작품 후기 ============================

아이는 어른이 된다 챕터가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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