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8 9. 아이는 어른이 된다 =========================
이에샤는 숨을 집어삼켰다. 엘테르트의 손끝이 목에 스쳤다. 고의는 아닐 터였다. 하나 엘테르트가 염정을 품고 만진 양, 몸이 얼어붙었다. 떼어 내려면 쉬웠다. 힘주어 밀기만 해도 엘테르트는 나동그라질 것이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에게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어깨에 얹은 손이―간절함마저 느껴지는 접촉이 기분 좋았다.
팔을 들었다. 엘테르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얼굴을 제 가슴에 묻게 했다. 엘테르트는 아연실색했다. 낯가죽에 문대는 푹신한 살이 곤혹스러웠다. 뺨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이에샤가 엘테르트의 등을 토닥거렸다.
“저기, 진정해요.”
“애, 앨저 경? 이게 무슨.”
“우리 스승님이 저한테 해 주는 건데, 심장 소리를 듣다 보면 편안해진다면서.”
편안이 다 얼어 죽었습니까. 엘테르트는 속씨름만 했다. 이에샤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서 진정했다는 점도 거슬렸다. 스승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몰랐으나, 이에샤에게 누구보다도 중한 사람이리라. 도리 없이 부러움이 피어올랐다.
한참 만에 이에샤가 엘테르트를 풀어 주었다. 엘테르트는 손등으로 벌게진 얼굴을 가렸다. 이에샤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서글프면서도 후련해 보이는 미소였다.
“오늘은 대화하러 왔어요.”
“대화?”
“지난번처럼 화내거나 떼쓰지 않고, 울지도 않고. 멘델린 경이랑 얘기를 하려고요.”
엘테르트는 얼떨떨해졌다. 이에샤에게서 ‘떼를 썼다.’라는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이에샤가 어깨 너머로 눈짓했다. 엘테르트는 앞을 비켜 주었다. 함께 소파로 다가갔다. 마주 보고 앉았다.
이에샤는 긴 숨을 들이마셨다. 아침에 셈브리온과 나눈 이야기를 돌이켜보았다. 일주일이 지났으니 엘테르트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셈브리온은 타일렀다. 연인은 나란히 걷는 사람이야. 등에 업혀서 갈 수는 없어. 이에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동안 자신은 화내는 쪽이었다. 부득부득 엘테르트의 사과를 받아 내고는 했다. 이에샤가 잘못한 일은 대부분 엘테르트가 “이제 괜찮습니다.” 하고 용서했다. 이상한 관계였다. 대등해야 할 연인 사이에서 이에샤는 고집만 피웠고, 엘테르트는 지치도록 받아 주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를 향하여 깊게 머리 숙였다.
“이제껏 죄송했습니다.”
“앨저 경?!”
“좋아하는 사람인데 아껴 주지 못하고, 양보라고는 모르고, 상처만 줘서. 멘델린 경한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엘테르트는 입을 헤벌렸다. 사과도 그러했지만, 이에샤가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일컬은 것이 놀라웠다.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에샤는 애정 표현이 헤픈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좋아한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쥐어짠 듯이 깊이가 유달랐다.
“스승님한테 혼나고 알았어요. 전 제가 세상에 잘 맞추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 울분을 다 멘델린 경한테 풀고 있었다고.”
이에샤는 조곤조곤 이어 나갔다.
라제카를 만나 조언했듯이, 세파에 자신을 갈았다. 참기도 했고, 집단을 이끄는 법도 배웠고, 셈브리온 말고도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가슴에 쌓인 답답함은 어찌했을까? 셈브리온과 엘테르트에게 퍼부어 댔다.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 몰상식하다는 것은 알았다. 엘테르트라면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저를 좋아하니까 뭐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자랐지, 속은 알디온 저택에 틀어박힌 골칫덩이 이에샤 그대로였다. 쓴웃음이 흘러넘쳤다.
“멘델린 경이 청혼할 때 하고 싶었다는 말, 정말 좋았어요. 로맨틱하고.”
“그, 그 얘기는 지금 왜 꺼냅니까.”
“그런 멋진 청혼을 받고도 저는 결혼이 꺼려져요.”
엘테르트가 우중충한 낯빛을 지었다. 이에샤는 미안스러워졌다. 오늘은 조금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으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싫다고 내 고집만 피우고, 멘델린 공작이 될 사람을 옭아매면 안 된다고 스승님이 그러더라고요.”
“옭아맨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앨저 경이 정 싫다면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앨저 경 말고 다른 여인을 좋아하는 내가 상상조차 가지 않으니까.”
“제가 왜 그렇게 좋으세요?”
“1년이면 누군가한테 반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죠.”
알디온의 서재에서 마주친 날이 작년 이맘때였다.
이에샤는 엘테르트가 두 번째로―셈브리온 다음으로―맺은 인연이었고, 제게 없는 여러 가지를 지녔기에 선망했다. 선망이 연모로 바뀌었다. 반면에 엘테르트는 서투른 이에샤 앨저를 지켜보았다. 한 해를 꼬박 들여서 빠져들었다. 자연하고도 명료한 마음이었다.
“멘델린 경이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4년 남았죠?”
“시월이 코앞이니, 3년 2개월 정도군요.”
“그럼 3년 2개월을 기한으로 잡고 우리, 약속하지 않을래요?”
이에샤가 주섬주섬 말머리를 꺼냈다. 엘테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약속이라니. 짚이는 바가 없었다. 무슨 약속입니까? 되물어 보았다.
“멘델린 경이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제가 온 제국에 이름을 떨치는 기사가 못 되면―그리고 그때까지 경이 절 좋아한다면, 좋아요. 결혼해도.”
“앨저 경!”
“기한이 된다고 포기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난 제국 최고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겁니다. 내 자리를 당신 옆자리로 바꿀 뿐이기만 해도 좋다면 해요. 결혼.”
말을 잊고 말았다. 이에샤의 제안은 갑작스러웠다. 동시에 절충적이었다. 스물다섯. 혼기는 넘었으나 아슬아슬한 나이였다. 남자라면 더더욱 괜찮았다. 이에샤는 엘테르트가 삿된 눈초리에 휩싸이지 않게끔 기한을 내세운 것이었다.
“앨저 경, 이건,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왜 이렇게 급하게? 뭔가 무리하는 게 아닙니까?”
“꼼꼼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에요. 이것도 멘델린 경이 손해 보는 조건이라 죄송스럽지만…….”
“아닙니다. 말했잖습니까, 경이 싫어하는 일은 강요할 수 없다고. 억지로 나한테 맞출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어리광 받아 주지 마세요.”
고개가 숙어졌다. 목소리가 떨렸다. 엘테르트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샤는 넘칠 것 같은 눈물을 참았다. 셈브리온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꾸 내 고집만 들어주면 멘델린 경한테도 앙금이 쌓이잖아요. 그러다 사이가 틀어지겠죠. 그건 싫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앨저 경, 결혼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정히 싫은데 추진한다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어떡해요!” 하고 소리지를 뻔했다. 혀를 물고 억눌렀다. 일주일 전과 같은 상황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었다. 심호흡을 했다. 엘테르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맛살이 찌푸려진 채였다. 엘테르트가 지나치리만큼 양보해 주는 까닭도, 제가 떼써 온 결과였다. 이 자리에서 바로잡아야 했다.
“그럼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멘델린 경이 저보다 훨씬 똑똑하니까 더 좋은 수를 내신다면 거기에 따를게요.”
“굳이 타협점을 찾자면 앨저 경이 내놓은 게 최선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왜 받아들이지 않죠?”
“앨저 경이 말한 대로 나는 타협을 해도, 하지 않아도 잃을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형평이 맞지 않는 약속이에요.”
어리둥절한 낯빛을 지었다. 엘테르트의 말속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엘테르트는 잔잔히 웃었다. 괴롭던 속에 온기가 퍼지는 듯했다. 이에샤가 자신을 위해서 머리를 쥐어짜고, ‘약속’을 전하러 왔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사랑스러웠다.
“앨저 경이 아예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을 접어 준 것만으로도 나는 얻을 만큼 얻었습니다. 약속을 해야겠다면 무기한으로 하죠. 당신이 기사로 크게 성공해, 멘델린 부인보다 앨저 경으로 기억될 수 있을 때. 내 나이가 어찌 되든 그때 이야기합시다.”
“하, 하지만.”
“열다섯 살에 브링어가 된 경이라면 내가 서른을 넘기기 전에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스개를 건네었다. 이에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울음을 참고자 한 행동이었다. 엘테르트 멘델린은 자신에게 과분했다. 그렇게 여기면 섭섭해할 사람이기도 했다. 이럴 때는 뭐라고 하더라? 셈브리온에게 뭐라고 했었지? 기억할 수 없었다. 이에샤에게 셈브리온의 사랑은 당연한 것이었다. 감사를 표해 보지 않았다. 결국은 자그맣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힘내 볼게요.”
“좋습니다. 이제야 앨저 경답군요.”
엘테르트가 몸을 일으켰다. 이에샤는 의아쩍게 고개를 치켰다. 엘테르트는 테이블을 돌았다. 이에샤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어깨와 어깨가 스치도록 가까운 거리였다. 이에샤는 영문을 모르고 눈만 깜빡거렸다.
“메, 멘델린 경?”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껴안았다. 목께에 얼굴을 묻었다. 이에샤는 화들짝했다. 블라우스의 천을 통하여 닿아 오는 숨결이 뜨거웠다.
“조금만 이러고 쉬게 해 주십시오.”
“왜 이런 자세로 쉬어야 합니까!”
“앨저 경이 보고 싶어서 일주일 동안 잠을 설쳤으니까, 보충하게 해 주십시오.”
뺨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이러한 행동에는 익숙지 못했다. 엘테르트가 응석 부려 오기는 처음이었다. 이에샤는 바짝 얼어붙었다. 옆쪽을 돌아보았다. 엷은 금발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한 올 한 올이 햇살 같이 예뻤다. 다섯 손가락이 엘테르트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스르르 빗겨 내렸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을 내쉬었다. 몸에서 힘을 풀었다. 엘테르트의 품에 기대었다.
“일, 밀리지 않으려나…….”
진심으로 염려되었다. 조금만 뒤에 깨우기로 했다. 10분. 딱 그만큼만 지금처럼 안기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여자친구 경력단절 시키느니 무기한 독수공방하는 남자가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편으로 이번 챕터가 끝날 거 같네요.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