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7 9. 아이는 어른이 된다 =========================
이에샤는 말을 잊어버렸다. 셈브리온의 눈물은 처음 보았다. 엘테르트가 울먹였을 때보다도 충격적이었다. 이에샤에게 셈브리온은 어떠한 일에도 지지 않는, 적수가 없는 남자였다. 헤실헤실해 보여도 옹골졌다. 머릿속에 ‘셈브리온은 울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박혔다. 말마따나 하늘과 같았다. 하나뿐인 스승이자, 친우이자, 가족이었다.
“세, 비. 내가 철이 없어서 싫어진 거야?”
“평생을 세 살짜리 애처럼 굴어도 내가 이-샤를 싫어할 일은 없어.”
“그럼 왜 떠나겠다는 거야?”
셈브리온이 팔을 내렸다. 이에샤를 얼싸안았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어깨 위로 고개를 뺐다. 어리벙벙했다. 꽉 안겨서 셈브리온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벨체터에서 할 일이 있어.”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안 돼.”
잘라 말하는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이에샤는 울음을 그친 채였다. 셈브리온 쪽이 꺽꺽대는 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속이 미어졌다. 이 철부지를 두고 떠나야 한다니,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 황궁에서 모진 처우를 받지는 않을까. 불퉁거리다가 동료에게 버림받지는 않을까. 멘델린 공작가의 심기를 거슬러 곤욕을 치르지는 않을까. 브링어임을 밝혔으니 세파에 시달리지는 않을까. 무엇 하나 마음 놓이는 일이 없었다.
“이거 하나만 명심해, 이-샤. 나는 네가 잘못해서 떠나는 게 아니야.”
“세비.”
“너는 나한테 최고의 제자이고 가족이었어. 난 네 덕에 지금까지 살아온 거야.”
“그럼 가지 마.”
“그런데도 가야만 해.”
이에샤가 두 손으로 셈브리온의 등을 움켰다. 쥐어뜯듯이 힘주었다. 목놓아 부르짖었다.
“당신 없이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혼자 어떻게? 내가 힘들 때 누가 안아 줘? 울고 싶을 때 누가 울어도 된다고 말해 줘? 나는 내 봉급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몰라. 시장 보는 법도 모르고 요리도 청소도 빨래도 못 해. 갈 거면 다 가르쳐 주고 가. 내가 다 배울 때까지 가지 마.”
“떠나기 전까지 최대한 가르쳐 줄게.”
“그냥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내가 떠나고 모르는 일이 있으면…….”
듣기 싫었다. 귀를 틀어막으려고 했다. 셈브리온이 이에샤의 팔을 잡아챘다. 어렵고 괴로워도, 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피를 토하는 것 같더라도.
“똑똑한 부하한테 물어 봐. 올센이라고 했지? 걔한테 봉급은 어떻게 찾는지 물어보고, 걔가 널 가르치는 건 의무가 아니니까 고맙다는 인사 잊지 마. 가정부가 올 테니 집안일은 다 맡겨. 대신 팁을 좀 얹어 줘. 나처럼 항상 집에 있지는 않을 테니까 빨랫감 제때제때 내놔야 해. 너는 고기랑 채소를 따로 먹을 땐 편식이 심하니 꼭 샌드위치나 햄버그처럼 섞어서 골고루 먹고.”
“난 그런 거 못 해. 못 할 거야.”
“뭐든 모르는 게 생기면 알 거 같은 사람한테 물어보는 연습을 해. 부하들, 체사로, 황태자 전하, 그 귀엽다는 공주님이랑 황자님. 알았지? 친절한 사람도 많아. 알디온 후작 같은 놈만 있는 건 아니야.”
이에샤를 풀어주었다. 얼굴을 마주했다. 하얀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살며시 닿았다가 ‘쪽’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작고 귀여운 키스였다. 아이가 잠들기 전 해 주는 어머니의 입맞춤처럼.
“옛날에는 엄마랑 나밖에 없었지. 이젠 너그러운 부하들이랑, 결혼까지 하고 싶어 하는 남자가 있잖아. 훨씬 많아졌어. 이-샤가 애쓴 결과야. 응?”
“그래도 난 당신이 없으면 안 돼. 세상 사람 전부 합쳐도 당신 하나만 못해.”
“이제부터 그런 생각, 하지 않도록 노력하자.”
사제의 관계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평범하던 애정이 집착으로 바뀔 만큼. 이에샤는 어리석지 않았다. 셈브리온의 말뜻도 알아들었다. 기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온 잔소리였다. 다른 사람도 만나라. 사교 모임에 다녀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스승의 품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셈브리온에게는 이에샤의 곁에 남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에이릴리가 죽고 9년. 차고도 넘쳐흐를 만큼 이에샤를 아껴 주었다. 셈브리온이 단호하게 밀어냈다. 염치 때문에라도 불들어서는 안 되었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뜻을 꺾지 못하리라고 알아차렸다.
몸에서 힘을 뺐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땅거미가 젖어드는 중이었다. 어스름이 두 사람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이에샤는 눈매를 구부려 보였다.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웃기로 했다. 떠나는 셈브리온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질리지 않도록.
“지금까지 나 당신이 시키는 과제는 전부 해냈어.”
“음, 솔직히 좀 무서울 정도였어.”
“……이번에도 잘하고 있을게. 검사하러 와 주면 안 돼? 언제라도 좋으니까.”
“그럴 거야. 꼭 보러 올게.”
셈브리온이 손을 뻗었다. 이에샤의 팔목을 잡았다.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에샤는 떨어뜨린 검을 주워 들었다. 셈브리온도 자기 검을 주웠다.
“집에 갈까?”
“응.”
대답하는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사그라질 것처럼 힘이 없었다.
* * *
델피르력 753년 9월 25일. 부슬비가 내리던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이에샤는 셈브리온에게 이런저런 가르침을 받았다. 공부라고 부르기는 무엇했다. 보통은 열서너 살에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들이었다. 싸우고서 화해하는 방법, 노여움을 터뜨리지 않는 방법, 지인에게 바라도 괜찮은 한계선……. 셈브리온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쁜 년’으로 산다는 자세는 버리지 말자. 안 그러다가 참고 살기 시작하면 나중에 크게 터질 거 같다.」
「만만한 놈들은 계속 후려 패도 되는 거야?」
「옛날에는 알디온 녀석들이나 널 짓밟으려고 했지, 이제 제국 기사를 상대해야 하잖아. 괜히 굽히고 들어갔다간 아가씨처럼 네, 네, 웃는 인형밖에 못 된다.」
아가씨란 밀레나를 가리켰다. 이에샤는 의아해졌다. 밀레나가 자신을 굽혔던가? 웃음과 아양으로 사랑받고, 사람을 주무르는 계집애였다. 남의 뜻대로 사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셈브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에게도 아가씨 나름의 고충이 있는 거야.” 하고 매듭지었다.
“……소공작께서는 황태자 전하의 궁으로 떠나셨습니다만.”
송악궁 관리자가 말했다. 이에샤는 정신을 차렸다. 예상한 바였다. 관리자가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다. 부덕한 여자라도 대하는 모양새였다. 이에샤는 울컥했으나, 셈브리온이 이른 대로 ‘세 번까지만 참자.’ 하고 외었다. 셈브리온은 멋대로 살아온 이에샤가 완벽하게 참아 낼 수는 없으리라 내다보았다.
“그럼 올라가 있지. 멘델린 경이 오시면 앨저가 휴게실에서 기다린다고 전해 주겠어?”
“휴게실입니까. 예, 그러죠.”
관리자의 입매가 비뚤어졌다. 이에샤는 영문도 모르고 기분이 상했다. 관리자가 이에샤와 엘테르트의 음행을 상상하는 줄 알았다면, 참지 않았으리라. 불행하게도 이에샤에게는 남의 마음을 읽는 재주가 없었다.
4층으로 올라갔다. 휴게실을 향했다. 엘테르트는 자리를 비우며 사무실은 잠갔으나, 휴게실은 열어 두었다. 문을 밀었다. 안으로 접어들었다. 엘테르트의 자취가 훅 끼쳐 왔다. 소파―침대 노릇도 하는―에 앉아 보았다. 엘테르트가 누워서 자던 모습이 떠올랐다. 테이블에 꽃병이 놓였다. 오늘 꺾은 듯 싱싱한 델피니움 다발이 꽂혔다. 이에샤는 푸르스름한 꽃잎을 어루만졌다.
“올 때마다 흰 꽃이었던 거 같은데.”
고개를 두리번두리번했다. 휴게실에는 별것이 없었다. 안락의자와 탁자, 옷걸이, 술이 든 진열장. 네 개가 다였다. 올 때마다 엘테르트만 쳐다보느라 몰랐다.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술병마다 노란색, 주황색, 갈색 등의 투명한 액체가 들어찼다. 제법 많았다. 이에샤도 포도주를 즐겼지만, 위스키는 마셔 본 적 없었다. 술과 엘테르트라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술 좋아하나? 이슬만 마시고 살게 생겨선.”
“……이렇게 생겨서 미안하군요.”
엘테르트가 투덜거렸다. 이에샤는 놀라지 않았다. 아까부터 기척을 느꼈다. 일부러 소리 내서 중얼거린 참이었다. 우스개로 분위기를 풀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뒤로 돌아섰다. 엘테르트가 팔짱을 끼고, 삐딱이 섰다. 일주일 전과 다름없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하나 신경이 날카로워 보였다.
“저, 호랑가시궁에서 뭐가 잘 안 풀렸나요? 멘델린 경.”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기분이 더러워 보여요.”
엘테르트가 눈을 치켜떴다. 자신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신경질적인 손놀림이었다. 쯧! 혀 차는 소리가 울렸다. 이에샤는 당황했다. 이러한 엘테르트는 낯설었다. 곱상한 눈가에 기미가 앉은 채였다.
“잠을 잘 못 잤어요? 일이 그렇게 바빠요?”
“…….”
“방해되면 다음에 다시,”
“가지 마십시오.”
말허리가 잘렸다. 이에샤는 움찔했다. 엘테르트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분을 억눌러야지, 다짐하고 온 터였다. 엘테르트의 몸짓과 목소리 하나하나에 마음이 쓰였다. 엘테르트가 이번에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커다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가지 마십시오. 나랑 얘기하러 온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경은 지금 쉬어야 할 거 같은데요.”
“내가 누구 때문에 잠을 못 잤는데.”
이에샤에게 성큼 다가들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새삼스럽게 엘테르트가 훤칠하다고 깨달았다. 셈브리온 때문에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붙어 서니, 여자치고 장신인 저보다 한 뼘 넘게 컸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눈을 멀뚱거렸다. 엘테르트가 무얼 하고 싶은지 몰랐다. 엘테르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늘 그렇게.”
“멘델린 경?”
“나를 봐도, 못 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해.”
이에샤의 양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수그렸다. 이에샤에게는 엘테르트의 정수리와 뒤통수만 보이게 되었다.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얼굴 아래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이제 괜찮은 겁니까? 내가 당신을 다시 만나도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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