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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06화 (106/164)

00106 9. 아이는 어른이 된다 =========================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멈칫했다. 이른 오후였다. 이에샤가 돌아오려면 멀었다. ‘도둑인가?’ 하고 떠올렸다가 웃어 버렸다. 이에샤가 퇴궐을 서둘렀다는 편이 타당했다. 도둑이더라도 괜찮았다. 이 집에는 값진 물건이 없었다. 사는 사람은 브링어 두 명이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창고를 빠져나갔다.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이-샤?”

“도대체 어디 갔던 거야!”

이에샤가 소리질렀다. 노여움이 끓어넘쳤다. 셈브리온을 가출했다 돌아온 망나니라도 보듯이 쏘아보았다. 셈브리온은 받아 낸 쿠션을 힐끗했다. 이에샤가 움찔했다. 자신의 패악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엄지손을 깨물었다. 잘근잘근 씹어 댔다. 셈브리온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에샤에게 다가갔다. 쿠션은 소파 위로 되돌려 놓았다.

“화 안 났으니까 그러지 마. 살 물어뜯으면 검 잡을 때 신경 쓰인다.”

“세, 세비, 나 당신한테 던지려던 게 아니라, 너무 화가 나서. 아니, 당신한테 화난 게 아닌데. 미안해. 미안…….”

“쉬이! 착하지. 괜찮다니까. 진정하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이에샤는 얼이 나갔다.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이토록 위태로운 모습은 셈브리온도 처음 보았다. 에이릴리가 죽었을 때보다 심했다. 덜컥 겁이 났다. 헤어질 날이 다가오는데, 이에샤의 상태는 나빠져만 갔다. 지난겨울부터 쌓인 울화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퍼부을 데 없는 감정들이 이에샤를 좀먹었다.

“황궁에서 무슨 일 있었어? 멘델린 소공작이랑 얘기가 잘 안 됐어?”

“모르겠어. 이제 싫어. 나 못 하겠어. 정신 바짝 차리고 얘기하려고 해도 짜증 나서 참을 수가 없어. 난 안 되나 봐. 이런 데엔 소질이 없어. 사람이랑 만나기 싫어. 나 기사도 그만둘래. 나, 나 세비하고만 살,”

“안 돼.”

말허리가 잘렸다. 이에샤는 움찔했다. 불안한 눈으로 셈브리온을 보았다. 지은 죄가 있었기에, 무어라 말하기도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셈브리온은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부드럽게 이에샤를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렇게 안아 주기만 해도 아까운 제자인데 어떻게 잘못된 길로 가게 놔 둬.”

“뭐가, 뭐가 잘못이야? 왜 세비까지 그런 소리를 해? 내가 잘못된 인간이야?”

“이-샤는 평생 나만 보고, 내가 해 주는 것만 받고 살 생각이야? 그건 틀렸어. 몇 번이고 못박을 수 있어. 그건 안 될 일이야.”

“왜, 왜?”

가느다란 떨림이 애처로웠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몰라도, 이에샤는 한계였다. 한바탕 운다고 풀릴 것 같지도 않았다. 셈브리온은 한숨을 삼켰다. 괴로워하는 이에샤 앞에서 탄식하면, 이에샤는 움츠러들었다. 셈브리온마저 제게 질릴까 봐 전전긍긍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아슬아슬할 때만은 한숨짓지 않겠다고 정해 놓았다.

“너무 힘들어서, 기운이 안 남아서 마음의 건강이 잘못됐어. 이, 으이, 샤 앨저라는 사람이 잘못된 게 아니라.”

“세비.”

“역시 발음이 안 되네. 아무튼 이-샤, 잘 들어.”

이에샤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몸을 수그렸다. 눈높이를 맞추었다. 축축한 눈동자에 덩치 큰 사내가 비쳤다. 셈브리온은 문득 이에샤가 아름다워졌다고 느꼈다. 회색 머리카락을 산발하여 들개처럼 보이던 계집애가, 길 가다 마주치면 한 번쯤 돌아볼 듯이 예뻐졌다.

이에샤를 보살펴 준 사람은 셈브리온이었다. 하지만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친 사람은 이에샤 자신이었다. 훌륭하게 닦인 지금 이에샤가 마지막으로 배울 것은,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난 곧 떠날 거야.”

“뭐?”

멍청히 되물었다. 무슨 소리가 지나갔는지 몰랐다. 셈브리온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벨체터로 돌아가게 됐어. 아마도 해가 바뀌기 전에 채비를 마치고, 수도를 나갈 거야. 그때부턴 이-샤 혼자 살아야 해.”

“무, 슨 소리야. 세비, 왜 그래?”

“떠나기 전에 청소하고 너 밥 챙겨 줄 가정부는 한 명 구해 놓을게.”

“세, 세비. 스승님. 내가 쿠션 집어 던져서 화났어?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다시는 멋대로 안 굴 테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나 무섭게 왜 그래…….”

이에샤가 절박하게 매달렸다. 셈브리온의 가슴팍을 쥐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양. 셈브리온은 한숨을 억누르지 못했다. 따뜻한 숨결이 정수리를 간질이자, 이에샤는 흠칫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자를 때가 되었는데 길어만 갔다. ‘내일은 잘라 줘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이에샤를 떼어 놓았다. 하얗게 질린 낯을 훔쳐 주었다. 손등에 물기가 묻어났다. 한 발자국 뒷걸음질했다. 이에샤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셈브리온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만약에 이-샤가 나를 이길 수 있다면 가지 않을게.”

“세비.”

“전력으로 싸워서 네가 나를 뛰어넘었다고 증명한다면 평생 네 옆에서 네 가족으로 살게. 어떡할래?”

짙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넘쳤다. 입술을 악다물었다. 온 힘으로 부딪친다고 셈브리온을 이길 턱이 없었다. 같은 브링어라도 격이 달랐다. 자신은 셈브리온을 따라잡으려면 멀었다. 하나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이에샤가 고를 길은 하나뿐이었다.

이에샤의 고개가 세로로 흔들렸다.

삯마차를 타고 사제는 묵묵했다. 셈브리온은 난간에 기대었다. 바깥만 내다보았다. 이에샤는 양손으로 무릎을 움켰다. 셈브리온을 힐끔거렸다. 마부만이 평온했다. ‘멜리사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로 말을 몰았다. 인적이 끊긴 숲을 찾는 남녀가 나타났다더니, 오늘의 손님들인 모양이었다.

숲 어귀에 다다랐다. 셈브리온이 마차 삯을 치렀다. 이에샤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늘이 회적색으로 물들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무렵이었다. 입안이 바싹거렸다. 침을 모아 삼켰다. 셈브리온은 덥지도 않은지, 관목을 헤치고 성큼성큼 걸었다.

“……이-샤.”

“으, 응?”

“오늘은 정말 쓰러뜨릴 각오로 할 거야. 딴생각하지 마.”

이에샤는 울적한 낯빛을 지었다. 엘테르트 앞에서 이성을 잃었다는 부끄러움이 가시기도 전이었다. 셈브리온의 이야기는 청천벽력이었다. 저에게 왜 이러는지 몰랐다. 신에게 미움받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억울하고 서러웠다.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하지만 셈브리온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 급했다.

일요일마다 수련하는 공터에 다다랐다. 이에샤는 멈추었고, 셈브리온은 더 나아갔다. 이에샤와 떨어진 곳에 자리잡았다. 뒤로 돌아섰다. 둘이 마주 보게 되었다. 각자의 검을 들어 올렸다. 곧게 뻗은 검은색 양날검. 셈브리온은 피식 웃었다.

힐가와 제자들은 휘어진 검을 썼다. 셈브리온만이 고집을 피웠다. 힐가는 제 라이벌이니 다른 검을 쓰겠노라고. 힐가는 재미있다며 웃었다. 자신의 검과 같은 철로 롱소드를 만들어 주었다. 힐가의 사브르는 녹았다가, 생김새를 바꾸어 이에샤에게로 갔다. 우스웠다. 무어가 웃긴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으나.

추억에 잠긴 와중이었다. 이에샤가 땅을 박찼다. 삽시간에 코앞까지 다가붙었다. 셈브리온은 놀라지 않았다. 이에샤의 공격을 쳐 냈다. 자신도 요즈음 이에샤에게 말없이 달려들어 대련을 시작하고는 했다. 절박한 이에샤가 똑같이 나올 것은 뻔했다. 오히려 기다렸다. 한 발짝 물러섰다가, 튀어 나가며 이에샤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벨체터 왕실 기사단과 싸운 날을 돌이켰다. 서른두 명의 공격이 사방에서 닥쳐들었었다. 셈브리온은 막고, 쳐 내고, 피하고, 뒤흔들며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에샤가 복잡한 검로를 펼쳐 보아야 셈브리온은 훨씬 어지러운 싸움을 겪으며 살아왔다. 대련의 승패는 처음부터 정해졌다. 이에샤도 모르지 않으리라.

“조금도 가망이 없는데 매달릴 정도로 내가 필요해?”

이에샤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셈브리온의 연격을 막기만도 버거웠다. 셈브리온은 교묘하게 검에 브링을 실었다, 흐트렸다 했다. 얼마만큼의 힘으로 쳐 내야 할지 몰랐다. 평범한 검을 힘주어 받으면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브링이 담긴 검을 약하게 받으면 뒤로 밀렸다. 이에샤는 이런 식으로 싸울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셈브리온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난 너를 이상하다고 여긴 적 없어. 기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나 파티에 바지를 입고 가겠다고 했을 때 말리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널 이상하게 볼까 봐 걱정한 거였고. 하지만 이-샤, 네가 가진 나에 대한 집착은 이상해.”

“읏!”

“생각해 봐. 너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나한테처럼 찰싹 붙으려 했어? 가끔 답답하니까 저택 밖에 나가고 싶다고 조르기까지 했잖아. 일고여덟 살 때 이-샤가 지금 너보다 당당하고 어른스러웠단 말이야.”

이에샤는 이를 악물었다. 반박하고 싶은데, 입을 뗄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셈브리온의 검이 턱을 스쳤다. 오싹했다. 조금이라도 머리를 늦게 뺐다면 베였을 터였다.

“기사가 되고 한동안은 좋아 보였어. 사람들하고도 어울리려 노력했고, 남한테 맞춰 굽히는 방법도 배우고. 평생 나쁜 년으로 살 수는 없다는 걸 스스로 깨달아서 얼마나 대견했는데. 그런데 이-샤, 왜 이렇게 겁쟁이가 됐을까?”

“겁쟁이 아니, 콜록!”

셈브리온이 발로 이에샤의 다리를 걸었다. 중심을 잡으려는데, 폼멜이 명치께를 찔렀다. 급소에 맞지는 않았으나 순간적으로 숨이 멎었다. 괴로웠다. 가슴을 감싸고 웅크렸다. 셈브리온은 이에샤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이에샤가 위험해질 정도로 공격하기는 처음이었다.

“넌 좋아하는 사람한테 목을 매. 그 사람이 하늘이라도 되는 양 매달려. 나한테 그랬고―지금도 그러고, 멘델린 소공작한테도 마찬가지였지?”

“세, 세비, 나 아파. 세비.”

“다른 브링어랑도 싸워 봤잖아. 몇 번이나 바닥을 굴렀다면서? 내 앞에서만 우는소리 내는 건 어리광이야.”

“세비…….”

셈브리온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에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속가슴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슬프고 안타까워서, 당장에라도 이에샤를 부둥켜안아 주고 싶었다. 하나 안 될 일이었다. 제 손으로 만들어 낸 이상하고 그릇된 애착을 깨뜨려야 했다.

“특별한 사람이 생길 때마다 그럴 거야? 네 마음대로 안 되면 울고 화내고 떼쓰고, 다 그만두겠다며 틀어박히고, 남이 위로해 줄 때까지 포기하겠다고 소리지르고?”

“세비. 나, 나는.”

“멘델린 소공작은 나랑 달라. 나처럼 이-샤의 모든 걸 받아 줄 수가 없어. 그런 사람은 세상에 나 말고 한 명도 없단 말이야. 서로 생각이 다르면 부딪치고 싸우고 타협해 나가야만 해. 근데 너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나처럼 해 주기를 바라고, 잘 안되면 상처받고 있잖아.”

한숨이 흘러넘쳤다. 팔로 이에샤의 뒤통수를 감쌌다.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새카만 눈에서 툭, 눈물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이에샤는 화들짝 놀랐다. 얼굴을 들었다. 셈브리온이 웃었다. 입매를 찌그렸다. 우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친구나 애인한테 부모를 바라면 안 돼.”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를 마무리할 때까지 조금 머리를 식히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 같네요...감정들이 너무 격하다 보니 쓰는 제가 지쳐서...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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