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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102화 (102/164)

00102 9. 아이는 어른이 된다 =========================

“드디어? 어서 모시렴.”

네세라가 반색했다.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바뀌었다. 하녀가 팔짓했다. 스란과 미엘라가 걸어 들어왔다. 스란은 수련할 때처럼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미엘라는 반소매 원피스 차림이었다. 처음 출근한 날에는 남루한 꼴이었으나, 오늘은 깔끔하고 귀여웠다. 봉급이 늘어나니 고향에 부치고도 남는 모양이었다.

네세라의 걱정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화려한 드레스를 보고도 개의치 않았다. 미엘라가 “너무 예뻐요, 페리튼 경!” 하고 호들갑을 떨었을 뿐이었다. 네세라는 잔잔하게 웃었다. 모든 참석자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네세라가 차를 따르려 했으나, 미엘라가 빨랐다. 찻주전자를 집더니 빈 잔마다 기울여 주었다. 하녀 시절 몸에 밴 버릇은 어쩔 수 없었다.

“집이 멋져요. 옛날에 백작 저택에서도 일하긴 했지만 이렇게 손님으로 와서 둘러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원도 깔끔하고 산뜻하고, 페리튼 경이랑 잘 어울려요.”

“난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페리튼 경이라면 화려하고 큰 꽃을 많이 기를 줄 알았어.”

“페리튼 경은 취향이나 행동이 담백하세요, 앨저 경. 서류 한 장을 쓰셔도 어찌나 군더더기 없이 똑바른지 몰라요. 강박까지 느껴지는걸요.”

“아, 그런 거 있어요. 글씨 쓸 때 기울어지거나 간격이 일정하지 않으면 초조해요. 한 구절에 쉼표가 두 번 이상 들어가도. 올센 경은 관찰력이 좋네요.”

이야기가 활기를 띠었다.

이에샤는 차를 마시며 ‘그렇구나.’ 하고 떠올렸다. 네세라의 서류를 수십 장 결재하면서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살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당하고 이목구비가 진한 네세라에게는 화려한 것이 어울리리라고만 여겼다. 어떠한 취향을 지녔는지는 관심 가지지 않았다. 저보다 어린 미엘라만도 못하다니 객쩍었다.

“두 분이 먼저 오셨을 줄은 알았어요. 저희가 많이 늦었나요?”

“아니. 별 얘기 안 하고 있었어.”

“어휴! 글쎄, 이런 날 아침에까지 스란 경은 침대에서 나올 생각을,”

“미엘라.’

스란이 미엘라의 말허리를 잘랐다. 이윽고 ‘아차.’ 하는 낯빛을 띠었다. 이에샤와 네세라의 눈길이 스란에게 쏠렸다. 스란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같이 살면서 꼬박꼬박 성으로 부르기도 뭣하잖습니까.”

“그건 그러네.”

“스란 경은 겉보기보다 사교성이 좋아요. 앨저 경이랑은 정반대로군요.”

“……내가 뭐 어때서.”

귀 기울이던 엘테르트가 손등을 입가에 붙이고 키드득했다. 네세라의 평이 옳았다. 이에샤는 털털한 겉모습과 다르게 내성적이었다. 자신의 사무실에 찾아와서도 수다스럽지는 않았다. 엘테르트를 내버려 두고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시끌벅적한 곳보다 조용한 곳을 좋아하기도 하지요.”

“검술 수련 시간에만 야단스러워지셔요.”

“옆에서 보면 앨저 경은 검에 미친 사람 같습니다. 집중력이 무시무시할 정도예요.”

“난 스란 경이 수련을 의무적으로 한다는 게 더 신기한데. 재밌지 않아?”

스란이 한숨을 쉬었다. 미엘라와 네세라도 난감하게 웃었다. 엘테르트는 애정이 물씬거리는 눈으로 이에샤를 보았다. 스콘 한 개를 쪽접시로 옮겨 왔다. 금간 부분을 따라 쪼갰다. 잼과 크림을 얹었다. 능란한 손놀림이었다. 1분도 걸리지 않은 성싶었다. 먹음직하게 만든 스콘을 이에샤에게 내밀었다. 이에샤는 이번에도 얼떨결에 받아먹었다.

“앨저 경은 재능이 있으니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나도 어릴 적에 독서나 셈은 재밌었지만, 검술 수업만은 도망 다닐 정도로 질색했죠.”

“스란 경도, 우응, 재능 있는데요.”

대답 도중 스콘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스란이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브링어한테 그런 소리 들어 봐야 허무합니다. 솔직히 앨저 경이 브링어라고 알자마자 내가 왜 암무를 나왔나 생각했으니까요.”

“이길 수 없으니까?”

“검술 실력과 유능함은 별개입니다. 전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딱딱하게 못박았다. 이에샤는 어색한 얼굴을 했다. 스란의 자존심과 경쟁심은 어쩌다가 솟아오른 걸까. 이에샤가 남에게 호기심을 품는 일은 드물었다. 스란은 나름대로 굉장한 결과를 이끌어 냈는지 몰랐다.

그보다 이에샤에게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멘델린 경, 왜 아까부터 자꾸 뭘 먹이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배고파 보이나요?”

“아뇨. 그냥 잘 먹는 게 보기 좋아서 그럽니다.”

“이제 그만해요. 입안이 달아서 못 먹겠어요.”

백화 기사들은 어처구니없어졌다. 이에샤만 엘테르트에게 빠진 줄 알았더니, 엘테르트도 다르지 않았다. 네세라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에샤 같은 여자의 가치가 염문으로 뒤덮여서야 곤란했다. 그렇게 된다면 네세라는 복장이 뒤집혀 죽을지도 몰랐다.

“두 분,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요. 주제넘은 참견 좀 해도 될까요?”

“음?”

“부디 장래 문제는 신중히 생각하시길 바라요. 앨저 경은 모친께서 타계하셨으니 이런 쪽으로는 이끌어 주실 분이 안 계시잖아요. 죄송해요, 멘델린 경을 욕보이려는 뜻은 없답니다.”

“아,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오래 두고 조율하려고 했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어차피 결혼할 생각 없으니까.”

고요가 내려앉았다. 모두가 이에샤를 쳐다보았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에샤에게는 ‘앨저’를 버릴 마음이 없었다. 멘델린 소공작을 데릴사위로 들이기도 불가능했다.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남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스물한 살과 열아홉 살. 혼기인 남녀가 만난다면 다다를 지점은 정해졌다. 엘테르트는 멍하니 물었다.

“앨저 경,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누군가의 연인이나 아내로 기억되기 싫다고.”

“최연소 브링어인 당신이 타인의 이름에 집어삼켜질 리 없잖습니까.”

“어지간한 집안이라면 모를까, 멘델린 공작가는 너무 커요.”

무어라 말하고 싶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들떴던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이에샤를 배우자로 맞이하겠다고 계획하던 차에 청천벽력이었다. 글렘 모드리스와의 결투를 마치고 이에샤가 저를 받아 준 까닭은, 헤어질 날을 정해 놓아서였을까? 엘테르트는 애끓는 눈길로 이에샤를 보았다.

나머지 참석자들도 조마조마해졌다. 두 사람의 낌새만 살폈다. 이에샤가 장래 문제를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제, 제 어머님은 아직도 멘델린 공작 부인보다 알타로샤 공주로 유명합니다.”

“황녀님이랑 망한 가문 여주인이 같을 수 있겠나요? 전 결혼하면 별로 행복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만.”

“앨저 경, 잠깐만요!”

미엘라가 끼어들었다. 연인에게 드러내 놓고 할 만한 소리가 못 되었다. 네세라는 놀라움과 흥미가 뒤엉키는 듯했다. 스란은 ‘저 사람은 도대체 뭐가 문제냐.’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샤로서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짝! 네세라가 손뼉을 부딪쳤다. 관심을 잡아끌었다.

“결혼 직전에 파혼해 본 입장에서는 앨저 경의 뜻에도 공감해요.”

“페리튼 경!”

“들어 보세요, 멘델린 경. 하지만 앨저 경? 지금 경은 혼자서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요. 멘델린 경과 차분히 얘기해서 타협점을 찾아야지 싶네요. 멘델린 경은 말이 통하는 남성분이니까요.”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엘테르트가 자신과 결혼할 생각까지 품었을 줄은 몰랐다. 앨저 백작가가 멘델린 공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는 한 어림도 없었다. 엘테르트처럼 똑똑한 사람이 어째서 허황한 꿈을 꾼 걸까.

“페리튼 경한테 파혼하신 경험이 있다고요?”

미엘라가 네세라의 말꼬리를 물었다. 네세라도 화제를 바꾸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

“어릴 적 집안끼리 정한 약혼자랑요.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친절하고 배려심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왜 파혼하셨어요?”

“그게 다 꾸며진 모습이었거든.”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렸다.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눈빛이 일렁였다. 지난날을 돌이켜보았다. 이에샤는 베빈을 떠올렸다. 친절하고 세련된 남자에게 속아 넘어갔다가, 큰 상처를 입었던 전 렌디드 자작 부인.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남동생이 성년이 되면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노라 선언하시자 태도가 싹 바뀌더군요. 내가 무슨 말만 꺼내면 면박하고 짜증 부리고. 그러다 나도 짜증 나서 콱 파혼해 버렸죠.”

“그, 그렇군요. 콱…….”

네세라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지금도 돌이키면 울컥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원래도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그런 결정도 내릴 수 있었던 거겠죠.”

“옛날부터 남자를 싫어하셨어요?”

“저 같이 생긴 여자라면 어떻게 한 번 꼬드겨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놈들이 너무 많아서. 전 약혼자는 기폭제였을 뿐이에요.”

단조로운 말투로 늘어놓았다.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네세라의 관능적인 생김새를 보고 문란할 것이다, 음탕할 것이다, 잠자리에서 죽여줄 것이다 쏙닥대는 남자는 숱했다. 실망할 기운도 남지 않았다. 모든 남자가 똑같노라 여기고 멀리하는 편이 나았다.

스란은 턱을 어루만졌다. 네세라의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그런 점은 귀족이나 천것이나 똑같군. 밑바닥 인생 사는 놈들도 마찬가지야. 매춘부면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여자, 매춘부가 아니면 돈 안 주고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여자. 그렇게 나눴지.”

“아, 그거 알아요. 구역질나는 구분법이죠. 다만 스란 경? 우리 막내인 올센 경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미엘라는 제 이름이 나오자 당황했다. 평민 여자로서 산 세월이 17년이었다. 추잡한 이야기라면 익숙했다. 하녀는 에브라힐에서 가장 하잘것없는 취급을 받았다. 귀족이나 기사의 푸대접은 물론이고, 하인에게마저 무시당했다. 스란과 네세라의 대화에도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괜찮아요.” 하고 말하려는 참이었다. 묵묵하던 엘테르트가 중얼거렸다.

“앨저 경의 뜻을 헤아릴 생각조차 안 했다는 점에서 나도 비슷할지 모르겠군요.”

미엘라는 주눅 들고 말았다. 다른 쪽을 향하던 화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에샤가 “후우!”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불편한 티를 감추지 않았다. 엘테르트와의 사이가 삐거덕거리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덮고 넘어가고 싶었다.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남작님이 얼마나 친절하고 좋으신 분인데요.”

“여러분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멘델린 경, 우리 그 얘기는 나중에…….”

엘테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로가 밀려들었다. 즐거우리라 기대한 휴일 나들이가 이 모양이 될 줄이야. 이에샤를 탓할 수는 없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왜 나랑 결혼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하고 따지기도 우습지 않은가.

“그래요, 시간이 필요할 거 같군요. 나중에 상의합시다.”

“그럼 다른 얘기를,”

“미안합니다, 여러분. 무례인 줄은 알지만 먼저 자리를 떠도 괜찮겠습니까?”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테르트 멘델린은 기분이 나쁘다고 제멋대로 굴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모습은 낯설었다. 어쩔 수 없죠. 네세라가 중얼거렸다. 불씨를 던진 장본인으로서 책임감이 느껴졌다.

“돌아가세요, 멘델린 경. 배웅 못 나가는 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오늘은 모임에 낄 상태가 못 되는 거 같군요. 다음에 네 분께 사례라도 하겠습니다. 그럼.”

엘테르트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이에샤는 목덜미를 긁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상황이 돌아가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점은, 제가 엘테르트의 마음을 심하게 건드려 버렸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역시 이런 모임에 나오는 게 아니었어.’

목이 말랐다.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들이켰다. 사람과 사귀기란 까다로웠다. 귀찮기 그지없었다. 셈브리온이 그리웠다. 백화 기사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한 귀로 들어와, 흘러 나갔다.

============================ 작품 후기 ============================

자정에 잤다고 오늘 또 몸이 작살이 나서 일찍 올리고 내일 자정 업데이트를 쉽니다...ㅠㅠ

세계관 내에서는 혼기 찬 남녀가 만나면 혼삿말 오가고 날짜 잡는 게 상식이라...

아이고 자꾸 설명이 붙네요...지난화에서 엘에샤가 언제 연인이 됐지? 하고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낮게 나는 독수리 챕터 마지막에 이에샤가 엘테르트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부분이 짤막하게 있었습니다...전달력이 부족한 듯하니 나중에 좀더 보충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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