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101화 (101/164)

00101 9. 아이는 어른이 된다 =========================

(연참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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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튼 자작저는 크지는 않았지만, 작지도 않았다. 수수하리만치 장식이 적었다. 정원에는 꽃보다 늘푸른나무가 많았다. 네세라가 집안을 돌본다고 했다. 네세라의 취향인 모양이었다. 뜻밖이었다. 화려한 인상과는 딴판이었다. 이에샤는 역마차를 한 번 갈아타고, 15분가량 걸어서 도착했다.

기사단 정복은 빨랫감으로 내놓은 채였다. 옷장에서 새것인 옷을 골랐다. 이에샤의 봉급이 쌓이자 셈브리온은 치마를 사다 주고는 했다. 이에샤는 바지를 좋아할 뿐이지, 치마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나갈 일이 생기면 유용하게 입었다. 짙은 녹색 하이웨이스트 스커트와 살굿빛 블라우스를 매치했다. 흔한 차림새였다. 늘씬한 몸에는 무엇이든지 어울렸다.

정문에서 하녀가 기다렸다.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이에샤를 이끌었다. 큰아가씨는 2층 응접실에 계십니다. 주인님께서는 손님을 치를 상태가 아니시니, 인사를 생략하라 하셨어요. 목소리에서 네세라를 향한 애정과 존경이 묻어났다.

이에샤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네세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멘델린 경이랑 같이 오시는 게 아니었나요?”

“에스코트해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거절했어.”

“왜죠?”

“타고 다니는 마차가 너무 커서.”

이해가 갔다. 이에샤가 피올라 거리에 산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네세라는 달신교 봉사에 따라 평민 지구를 다녀 보았다. 평민들이 사는 거리가 비좁은 줄도 알았다. 페리튼의 마차도 못 지나가는 일이 잦았다. 멘델린 공작가의 마차라면 여간 호화롭지가 않으리라.

“앨저 경이 제일 먼저 오셨어요. 앉으세요. 스커트는 처음 보는데, 잘 어울리시네요.”

“고마워. 페리튼 경도 아주 예뻐.”

“어머나.”

이에샤는 예사로이 칭찬했다. 진심이었다. 풍성한 드레스로 꾸민 네세라는 아름다웠다. 기름을 바른 머리카락에서 윤이 흘렀다. 코를 간질이는 향수 냄새가 좋았다. 창가에 마른 과일이 담긴 접시가 놓였다. 과일 향과 네세라로부터 풍기는 장미 향이 어우러졌다.

“올센 경이랑 스란 경이 절 보고 부담스러워하지 않아야 할 텐데요. 평상복이 거창한 옷밖에 없어서.”

“기사단에 들어오기 전에 한 번 봤잖아? 드레스 입은 모습.”

“으음. 그때는 다들 업무용 옷을 입었으니까요. 사사로운 자리에서 차이가 너무 크면 불화가 생기잖아요.”

“그런가?”

네세라는 쓰게 웃었다. 사교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아가씨가 휘황찬란하면, 나머지 아가씨들은 쫓아가야 하나 고심했다. 작은 모임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참가자 명단을 살피고 알맞게 치장해야 예의였다. 누군가만 뒤처지면 주변 사람도 당사자도 불편하지 않겠는가. 어리석은 자는 여자의 눈치 싸움이 무섭고, 여자의 우정은 옹졸하다고 지껄이기도 했다. 서로서로 맞추어 나가는 일은 친교의 기본이건만.

“어차피 그 둘은 준귀족이 됐다는 인식도 흐린걸. 귀족인 경이 화려하다고 새삼 부러워하겠어?”

“그럼 앨저 경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작위는 저희 아버지보다 경이 높아요.”

“나도 별 신경 안 써. 작위가 무슨 소용이야, 집안이 망했는데.”

이에샤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네세라는 “푸훗.” 하고 웃어 버렸다. 사람에도 사회에도 깜깜한 백화 기사단장. 걱정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때묻지 않은 사람에게는 고민이 적었다. 고민이 적으면 평온했다. 말하자면 이에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재빠른 기지와 눈치라도 갖추어서 다행이었다.

네세라가 찻주전자에서 거북이 모양 인퓨저를 꺼낸 참이었다.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렸다.

“네세라 아가씨. 메, 멘델린 소공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하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알려 왔다. 대귀족의 방문에 바짝 얼어붙은 성싶었다. 엘테르트는 하녀에게 “고맙다.” 하고 인사한 뒤 응접실로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우아한 정장 차림이었다. 이에샤부터 쳐다보았다가, 멈칫했다.

“초대해 줘서 감사합니다, 페리튼 경. 앨저 경이 치마 입은 모습은 두 번째로 보는군요. 기사단 옷을 입고 오리라 생각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멘델린 경. 정복은 세탁 중이에요. 전에도 제가 경 앞에서 치마를 입었던가요?”

“오드펠 철공소에서.”

이에샤도 기억해 냈다. 기사단 입단 시험 전에 엘테르트와 마주쳤었다. 그날 입은 원피스는 생각나지 않았다. 오늘보다는 초라했으리라. 쑥스러워졌다. 괜스레 차를 홀짝였다.

엘테르트가 이에샤 곁의 의자를 뺐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다른 사람과 앉으면 이상하구나, 깨달았다. 엘테르트는 제 연인이었다.

네세라가 엘테르트의 찻잔에 주전자를 기울였다. 삼단 트레이에 늘어선 간식에서 단내가 났다. 이에샤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밀레나가 예쁜 티세트를 준비하여, 친구들을 초대한 날을. 이에샤는 내심으로 부러워했었다. 자신은 부모가 갈라서기 전에도 그러한 물건을 만져 보지 못했으므로. 실소를 머금었다.

“앨저 경? 배고프시면 먼저 드셔도 돼요.”

“내가 온종일 배고픈 사람으로 보여? 페리튼 경.”

“계속 과자를 쳐다보길래 먹고 싶으신가 했죠. 아닌가요?”

“진짜 배고프다면 저기 있는 과자로는 어림없어.”

빗나간 소리를 투덜거렸다. 엘테르트와 네세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둘은 다과회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불편스러웠다. 앉아서 잡담하기보다, 검을 부딪치고 싶었다. 좀이 쑤셨다. 네세라가 엘테르트에게 아버지의 병세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에샤는 창밖만 힐끔거렸다. 맑은 날이었다. 수련하기에 알맞았다. 교외의 숲에서 셈브리온과…….

“앨저 경?”

“아.”

퍼뜩 정신을 다잡았다. 지나간 대화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엘테르트와 네세라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아 왔다. 이에샤는 자기도 모르게 엄지손을 깨물었다. 왜일까? 뱃속이 술렁거렸다. 예감이 나빴다. 셈브리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앨저 경, 혹시 어디 불편합니까? 얼굴색이 안 좋은데.”

“그런 건 아닌데,”

“식은땀도 흘리는 거 같아요. 몸 안 좋은데 억지로 온 거 아니에요?”

“아니,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서. 아픈 건 아니에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고개를 털었다. 낯설어서 불안한 것이리라. 휴일을 남과 보내기는 처음이라서. 남겨 두고 온 셈브리온에게 죄책감이 들어서. 별일이 났을 턱이 없었다. 이에샤의 스승은 델페레타에 머무르는 브링어 가운데 으뜸이었다. 누가 해를 끼치겠는가.

“그럼 뭔가 밝은 이야기를 할까요?”

“밝은 이야기?”

“멍청한 남자들을 씹으, 아니, 비판하면 한결 상쾌해질 거에요.”

“괜찮은 화제로군요.”

엘테르트가 네세라의 제안에 맞장구쳤다. 이에샤는 황당해졌다. 두 사람은 쿵짝이 맞았다. 제국 기사나 무지렁이 남자를 헐뜯을 때 그러했다.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둘은 왜 그렇게 남자를 싫어하는 거예요?”

“폭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 들고, 강자한테만 아첨하는 이가 태반이니까요.”

“여자를 자기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 취급하는데 어떻게 좋아하겠어요?”

동시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에샤는 눈만 끔뻑거렸다. 셈브리온을 떠올려 보았다. 이에샤가 사리를 따지는 기준은 대부분 셈브리온이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남자 기사들이 싹수없기는 했으나, 그만큼 좋은 남자도 있었다. 하나로 묶자니 꺼림칙했다.

“아니,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남자도 있잖아요? 당장 멘델린 경만 해도…….”

“나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무심결에 억압하려 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의식하며 살 뿐이지요. 대부분의 사람이―특히 여성이 나보다 약자이니.”

“분하지만 맞는 말이에요. 여자는 완력도 그렇고 영향력도 밀리니까 남자한테 찍소리도 못할 수밖에 없어요. 그 점을 악랄하게 이용해 먹는 놈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요.”

“하지만 내가 아는 어떤 남자는 그러지 않는데…….”

“앨저 경, 경향성이라는 말을 압니까?”

“앨저 경의 그분이 다른 머저리들을 적극적으로 말리고 억제하는 활동을 펼치나요?”

이야기를 꺼내 놓는 족족 공격이 들어왔다. 이에샤는 쩔쩔맸다.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수그렸다. 차만 들이켰다. 대화를 이어 갈 자신이 나지 않았다. 셈브리온이 보고 싶었다.

“전 오히려 앨저 경이 이해가 안 돼요. 기사단장이면서 평기사밖에 안 되는 놈들한테 얼마나 무시당하셨어요? 어떻게 문제점을 못 느낄 수가 있죠?”

“나도 앨저 경의 반응이 무르다고는 생각합니다.”

“결투나 감봉권으로 그때그때 갚아 줬으니까,”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잖아요! 질리지 않으세요?”

짜증스러웠다. 질리지 않을 턱이 없었다. 모멸당한 기억은 이에샤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다 하여 처벌한 기사를 거듭 벌하기는 어려웠다. 직권 남용이었다. 곱씹어 보아야 속만 터졌다. 잊어버리는 편이 이로웠다. 네세라처럼 바득바득 달려들기는 피곤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심력을 쏟아도 모자랐다.

“굳이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요? 솔직히 나 불편해, 페리튼 경.”

네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에샤는 눈에 띄게 기가 죽었다. 안절부절못했다. 네세라는 이마를 짚었다. 속이 쓰라리다고 애꿎은 여자를 다그치다니. 배보다 배꼽이 커졌다. 종종 저지르는 실수였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참기 힘들었다. 이에샤 쪽으로 머리를 숙여 보였다.

“미안해요. 제가 흥분해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앨저 경.”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에샤를 불렀다. 이에샤는 서러운 낯으로 엘테르트를 보았다. 엘테르트는 빙긋이 웃었다. 접시에 놓인 쿠키―가운데에 사과 잼이 들어간―를 집었다. 이에샤의 코앞에 내밀었다. 이에샤는 반사적으로 쿠키를 깨물었다. 엘테르트가 동강 난 쿠키를 자기 입에 털어 넣고 말했다.

“앨저 경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

“아무리 힘들어도 싸워야만 할 때가 있다는 걸. 7월에 재판을 준비하며 그러지 않았습니까. 기즈 부인이 어서 결심해 줬으면 한다고.”

“…….”

“페리튼 경한테는 매일매일이 그런 거지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생각해 보면 앨저 경의 눈에도 보일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 듯싶었다. 이에샤는 고개만 주억였다. 쿠키를 우물거리느라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때,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다른 손님들이 모두 도착하셨습니다.”

============================ 작품 후기 ============================

이렇게 많은 분들이 셈브리온을 걱정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혼수검은 해피 엔딩을 지향합니다. 스승님의 죽음을 딛고 제자가 강해진다! 전개는 안 나올 거예요...

이번 챕터는 큰 사건 없이 잔잔하게 진행되어서 독자님들께 꽤 고비이지 않을까 싶네요...사실 쓰는 작가한테 고비입니다 제 눈으로 봐도 지루한데 이를 어쩌나 싶고...

음...

이런 글을 쓰고 있느니만큼 페미니즘은 다른 여성을 공격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말을 자주 되새깁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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