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100화 (100/164)

00100 9. 아이는 어른이 된다 =========================

(연참 1/2)

지난달부터 엘테르트는 이에샤에게 달콤했다. 햇살처럼 웃으며, 산들바람처럼 손을 잡았다. 송악궁에 찾아가면 앉혀 놓고 부채질을 해 주었다. 낯간지러운 말은 오가지 않았다. 눈길만으로도 사랑받는 줄 느낄 수 있었다. 루시온이 단념한 상대에게 잔정을 보낸다면, 엘테르트는 벅차리만큼 연정을 쏟았다. 셈브리온 말고 이토록 이에샤를 아낀 이는 없었다.

“앨저 경은 사랑에 빠지면 온몸으로 티를 내는 부류로군요.”

“별로. 아니야.”

“얼굴에 멘델린 경이 좋아 죽겠다고 쓰였습니다.”

스란이 끼어들었다. 더위도 무릅쓰고 이에샤를 놀리겠다는 뜻이 엿보였다. 이에샤는 인상을 썼다.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14살이 될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지금도 예쁘다는 소리가 입에 붙었다. 여태 이에샤에게 유착 상대라고는 셈브리온뿐이었다. 엘테르트에게 나타내는 애정은 작으면 작았지, 대수도 아니었다.

남이 보기에는 헤어지면 혼삿길 막히겠다 싶은 태도였지만. 이에샤는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다. 미엘라는 시름에 잠겼다. 이에샤는 저보다 두 살 많았으나, 대인 관계는 열 살쯤 어린 듯했다. 지나치게 불퉁하든지 지나치게 정겹든지. 극단적이었다.

네세라와 스란도―미엘라처럼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엘테르트와는 끝장날 것이 틀림없는데, 목을 매서야 힘들어질 터였다. 당장은 재미있어도 주의를 시켜야 할 성싶었다.

“그럼 난 멘델린 경한테 얘기하러 가 볼게. 이틀밖에 안 남았으니까.”

“시간 안 난다고 하시면 조르지 말고 오세요.”

“내가 아주 애 같지? 페리튼 경.”

“설마요. 대륙에서 손꼽히는 호걸을 저처럼 연약한 범인이 어찌.”

네세라는 ‘여걸’ 따위의 낱말은 쓰지 않았다. 백화 기사들도 남성에게나 붙는 말을 듣는 데에 익숙해졌다.

“올센 경, 내가 늦으면 결재해야 할 서류 책상에 올려놓고 할 일 해. 페리튼 경은 순찰 나갈 때 양산 챙겨. 나니까 안 쓰러지는 거야. 스란 경은……, 살아남아.”

이에샤는 휴게실을 빠져나가기 전 부하들을 챙겼다. 제법 우두머리 태가 났다. 발전해 가는 모습이 두드러졌다. 네세라는 다리를 꼬았다. 무릎에 팔꿈치를 붙였다.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눈빛이 깊어졌다.

“우리 단장님, 석 달 뒤면 성년이죠? 나도 저 즈음에 많이 달라졌는데.”

“페리튼 경은 옛날에도 엄청 당당하셨을 거 같은데요.”

“글쎄? 그때는 멍청했다고 생각해요.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도 몰랐고. 어느 날 아침에 비명 지르면서 깨서, 그 길로 달신교 사원에 달려가 어머니가 남겨 주신 땅을 바쳤어요. 그래, 열아홉 살에 난 깨달은 거야. 남자란 열에 아홉이 개자식이라는 걸.”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미엘라와 스란은 어설픈 시선만 주고받았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만에야 미엘라의 입이 열렸다.

“그 땅에는 지금 뭐가 들어섰나요?”

“후후! 4년째 놀고 있어요.”

“어? 달신교 사원이나 고아원 같은 걸 짓지 않고요?”

네세라는 모호하게 웃었다. 달신교에 헌물로 내놓은 땅은 수도 번듯한 거리에 자리한, 노른자위 땅이었다. 그러나 건물 한 채 올리지 못했다. 빈터로 남은 채였다. 여성만을 위한 의료원의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으므로. 관청에서는 ‘공평하게’ 남성도 진료해야만 한다며 버텼다. 아직은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언젠가 쓰임새를 찾으면 얘기해 줄게요.”

“아, 예!”

네세라의 목소리에서 답지 않게 씁쓸함이 묻어났다. 미엘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세라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 무렵, 이에샤는 성큼성큼 걸었다. 이동 마차를 잡지 못했다. 날이 더워질수록 마차의 인기도 뛰어올랐다. 브링 덕분에 더위는 견딜 수 있었으나 귀찮았다. 송악궁까지는 빠른 걸음으로도 시간이 걸렸다. 몇 해 전 황궁에 이동 마법진을 만들자는 안건이 나왔다가, 비용 문제로 엎어졌다고―엘테르트에게―들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도착하고 나니 30분이나 지났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송악궁 관리자는 깍듯하게 이에샤를 맞이했다. 멘델린 소공작이 백화 기사단장을 총애한다는 말이 돌았다. 대귀족의 첩실일지도 모르는 여자 아닌가. 이에샤가 알면 당장에 엘테르트와 갈라설 이야기였다. 진가를 드러내고도 이에샤는 추문에 둘러싸였다.

계단을 올랐다. 4층에 다다랐다. 고요했다. 쓰는 이가 한 명뿐이었으니 당연했다. “어라?” 하고 중얼거렸다. 이 시간이면 엘테르트는 일에 파묻힐 터였다. 사무실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인기척이 휴게실에서 났다. 이에샤는 복도 오른편, 세 번째 객실로 향했다. 문고리를 돌렸다.

엘테르트는 소파에 누운 채였다. 햇빛이 유리창을 투과했다. 드리워진 속눈썹 위로 부서져 내렸다. 탄탄한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자네?”

이에샤는 고민했다. 내버려 두어야 하나, 깨워도 괜찮은가. 곰곰 따져 보았다. 이에샤도 한가롭지 못했다. 돌아가 오후 업무를 시작해야 했다. 금요일이었다. 일요일에 약속을 잡으려면 오늘 알려야 했다―전날에 시간을 내기는 어려울 테니. 자느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기회를 놓친다면, 엘테르트도 손해 아닐까? 이에샤는 좋을 대로 결론지었다. 엘테르트의 어깨를 붙잡았다. 흔들어 댔다.

“멘델린 경! 일어나 봐요! 멘델린 경!”

“……뭐, 뭡니까?!”

“앨저예요. 잘 잤어요?”

엘테르트가 화들짝하며 깨어났다. 윗몸이 튀어 올랐다. 이에샤는 예사스럽게 인사했다. 엘테르트는 멍청히 이에샤를 올려다보았다. 집게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꾹꾹 문질렀다. 골이 띵했다.

“예, 안녕하십니까. 다음부터는 좀 살살 깨워 주십시오, 앨저 경.”

“너무 셌나요? 스승님한테 하듯이 했는데.”

“사부께서 어깨에 멍들지는 않으셨습니까?”

“겨우 이 정도로 멍드는 약골이 세상에 어딨어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에샤 앨저는 인류를 완력으로 줄 세운다면, 선두 가까이에 설 터였다. 자신이 받아들여야 했다.

“후우, 됐습니다. 지금 몇 시쯤 됐는지 아십니까?”

“한 시를 조금 넘겼어요.”

“십 분쯤 잤나. 깨워 줘서 고맙습니다, 앨저 경. 하마터면 일이 밀릴 뻔했습니다.”

이번에는 이에샤가 얼떨떨해졌다. 쉬는 시간이 10분을 넘기면 일이 밀린다니. 이에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엘테르트는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쪽잠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엘테르트의 몸은 최소한의 휴식으로 최대한 회복할 수 있게끔 길들었다. 고위 관료라면 누구나 그러했다.

엘테르트가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왔습니까. 더운데 오기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그다지요. 바쁘실 테니 얼른 말하겠습니다. 멘델린 경, 모레 일요일 저랑 보내지 않으실래요?”

“…….”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기색을 살폈다. 언제나와 같았다. 웃음기가 적었고, 뾰족한 눈빛을 띠었다. 그것이 이에샤의 ‘평상시’였다. 지금도 별생각은 없는 듯했다. 긴장감이라고는 풍기지 않았다. 데이트 신청 한 번 담백했다. 얼마 전까지 안절부절못하거나 뺨을 붉히기도 했는데, 요즈음 태연해졌다. 연인이라기보다 어린 동생과 놀아주는 기분이 들 정도로. 한숨이 나왔다.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나 보군요.”

“페리튼 경의 초대를 받았어요. 앞으로 휴일은 저, 어지간하면 스승님한테 쓰고 싶거든요. 이번밖에 기회가 없을 테니 멘델린 경도 같이 갔으면 합니다.”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에샤는 제 스승에 관하여 가르쳐 주는 법이 없었다. 이름 한 자 몰랐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스승님’이라는 낱말조차 꺼내지 않았으니, 제가 나은 편이기는 했다. 이에샤가 은퇴한 브링어의 제자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진실은 깜깜했다.

엘테르트도 어림짐작할 따름이었다. 체사로 에버렛과 아는 외국인. 추운 나라에서 온 자이리라. 뒷조사는 하지 않았다. 이에샤가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좋습니다. 일정을 조율해야겠군요. 제 보좌관들은 우수하니 괜찮을 겁니다.”

“멘델린 경, 당신 가끔 진짜 가차없어요.”

“누군가 쉬면 누군가는 일을 해야만 하니까요.”

엘테르트는 산뜻하게 답했다. 이에샤의 권유는 시간을 내 달라는 청보다, 시간을 내 주겠다는 선심에 가까웠다. 둘은 궁전 밖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이에샤는 “일요일은 스승님이랑 보낼 겁니다.” 하고 물리치기만 했다. 아쉬운 쪽은 엘테르트였다. 자신의 빈자리를 메꾸느라 보좌진이 죽어나겠으나, 다음주에 휴가를 주겠다 마음먹었다.

“그럼 일요일 아침에 제가 에스코트하러…….”

“아뇨. 그냥 페리튼 저택에서 만나요. 오지 마세요.”

“어, 어째서입니까?”

당황스러웠다.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이에샤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엘테르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면 기분은 날아갈 터였다. 그러나 도리 없었다. 피올라 거리는 좁았다.

“저 사는 곳에 당신 마차가 못 들어올 거예요.”

“그 정도입니까? 아무리 길이 좁아도 마차가 못 지날 정도는 아닐 텐데요.”

“괜히 찾아와서 충격받지 말고 페리튼 경네에서 보시죠.”

야멸차게 못박았다. 엘테르트의 어깨가 늘어졌다. 안쓰러운 꼴이었다. 이에샤 또한 엘테르트가 도련님 티를 낼 때마다 입맛이 썼다. ‘앨저 백작가를 멘델린에 뒤지지 않게 키우리라.’ 하는 야망이 생겼다. 자기 대에서 이룰 수 있을까 싶었으나.

“……그런 일이 있었어.”

셈브리온은 이에샤의 이야기에 귀만 기울였다. 시원한 날이었다면 맞장구도 치고, 농도 걸었을 터였다. 말할 힘이 없었다. 이에샤도 익숙한 듯이 혼자 조잘거렸다. 여름의 셈브리온은 밥 못 먹은 저처럼 예민했다. 반응을 바라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셈브리온은 턱까지 자란 회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잘라 줄 때가 된 성싶었다. 이에샤는 단발이 자기에게 어울린다고 여겼다. 오스터를 물 먹일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머리 모양을 지켰다.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머리카락을 길렀으면 했으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알디온 저택으로 가기 전날이 기억났다. 한밤에 이에샤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싫어서 숨었겠거니 했다. 머리채를 썩둑썩둑 자르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셈브리온은 기겁했다. 개판이 된 머리 꼴을 어떻게 가다듬어야 하나 고뇌했다. 다행스럽게도―쫓겨났다가 불려 가 보니―알디온의 하녀가 손질해 주었다. 그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 자르지 못하게 했었다.

“사실은 나, 세비랑 놀고 싶었어. 그런 모임 별로 재밌을 거 같지도 않고.”

이에샤가 셈브리온의 어깨에 기댔다. 투덜투덜 늘어놓았다.

“근데 그동안 부하들이 나한테 참 잘해 줬더라고. 난 톡톡대기만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나 너무 입만 닦았다 싶어서 거절하기가 그렇더라.”

“잘했어. 다른 사람하고도 고루고루 어울려야지. 너 거절하고 왔으면 내가 화냈을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당신은 나랑 있는 게 싫어?”

“그거랑은 다른 문제.”

셈브리온이 엄지와 중지로 이에샤의 이마를 튕겼다. 남에게 받은 바를 생각하고 돌려주려 한다니 기특했다. 옛날에는 자신과 헤어지면 어떻게 살까 걱정했지만, 마음이 놓였다. 함께할 수 있을 때까지 이에샤의 곁을 지킬 셈이었다. 하나 사람 일이 마음대로 되지만은 않는 법이었으니.

“이-샤한테는 휴식이 좀 필요해. 평일엔 일하고 휴일엔 수련하고, 어린 나이에 벌써 인생이 고루하잖아.”

“나도 이제 성년이거든.”

“진짜 어른은 자기가 어른이라 생각하지 않는 법이에요, 아가씨.”

이에샤는 대꾸를 삼켰다. 제가 셈브리온의 딸뻘인 것은 사실이었다. 말꼬리를 잡아 보아야 밀릴 듯싶었다.

“그래도 세비.”

“으응?”

“다음주부터는 꼭 당신하고 있을 거야. 다 평일 내내 부대끼는 사람들이잖아. 굳이 일요일까지 볼 필요 없어.”

“글쎄, 사람은 필요로 만나는 게 아니라니까.”

고개를 틀었다. 셈브리온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이 오련한 빛을 품었다. 추억을 되새기는 모양이었다. 셈브리온이 옳았다. 이에샤에게는 셈브리온이 필요했으나, 셈브리온에게는 이에샤가 필요치 않았다. 백화 기사들 또한 이에샤에게 살갑게 굴지 않아도 되었다. 엘테르트와 루시온도 마찬가지였다. 무어가 부족해서 저 같은 여자를 좋아하겠는가? 마음이란 복잡했다.

“……그냥 세상에 세비랑 나, 둘만 있었음 좋겠다.”

“그런 소리를 하니까 어리다는 거야.”

셈브리온이 이에샤의 정수리를 문질렀다. 회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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