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8. 낮게 나는 독수리 =========================
루시온은 웃음을 터뜨렸다. 극적이지 않은가. 검에 브링을 휘감고 선 이에샤는 눈부셨다. 이오르가 손가락을 움직거렸다. 정면에 지팡이를 세우고, 양손으로 꼭대기를 누른 자세였다. 집게손가락이 사자 장식을 두드렸다. 루시온은 부황이 흥분했다고 눈치챘다. 이오르가 중얼거렸다.
“이벨리오노, 네 눈은 틀림없구나. 실로 기재로다.”
“저도 저렇게까지 해낼 줄은 몰랐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전부터 앨저가 브링어인 줄 아신 것 같던데, 어떠십니까?”
“짐작만 했다. 나도 브링어의 칼에 당해 본 적 있으니.”
루시온은 “아.” 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브링어 암살자가 이오르를 노렸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앞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라제카가 손을 모아 쥐었다. 이에샤의 선전에 기뻐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라제카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옆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라제카, 왜 그러느냐. 뭐가 그리 불안해?”
“맞아, 누님. 앨저 경이 잘 싸우고 있잖아.”
“아직은 숨겨 뒀던 패를 꺼내서 몰아붙였을 뿐이에요. 이제 모드리스 경도 진지하게 임할 겁니다. 라제카는 앨저 경이 확실한 승기를 잡을 때까지 안심하지 못하겠어요.”
루시온은 빙그레했다. 똑똑한 여동생은 경거망동하는 법이 없었다. 루시온도 이에샤가 압승하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글렘 또한 공으로 세 번째 기사단을 이끄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을 다잡으면 이에샤도 고전할 터였다. 다만 루시온은 제 노름꾼으로서의 감을 믿었다. 작년에도 ‘이에샤 앨저’를 얻으려고 용썼다. 그 판돈은 지금 상상치 못한 재산으로 불어났다. 기대가 컸다.
체사로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어려웠다. 체사로가 브링을 깨친 때는 4년 전―나이 서른아홉에였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늦지도 않았다. 셈브리온이 왜 넘어설 수 없는 벽이었는가. 스물다섯 살에 브링어가 된 천재였기 때문이었다. 이에샤는 성년조차 아니었다.
셈브리온 데힐은 십여 년 동안 터무니없는 괴물을 길러 냈다.
이에샤의 검이 사선을 그렸다. 쾅! 쇠끼리 부딪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글렘은 녹색 브링으로 감싼 검을 들었다. 침착하게 공격을 막아 냈다. 눈앞의 계집은 환상도 속임수도 아니었다. 진짜 브링어였다. 모두가 뻔하다고 웃은 결투는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진다면? 간담이 서늘했다.
글렘은 넓고 두꺼운 양날검을 썼다. 찌르기보다 베기에 능했다. 커다랗게 휘둘렀다. 브링으로 절삭력을 끌어 올려, 바위도 자를 법한 칼날이 이에샤를 노렸다. 동작 끝에서 기검을 쏘아 보냈다. 이에샤는 옆으로 굴러 피했다. 이쯤은 예상한 바였다. 셈브리온도 자주 써먹는 기술이었으니까.
우락부락한 글렘은 이에샤보다 느렸으나, 완력으로는 앞질렀다. 힘겨루기로 가면 이에샤가 불리했다. 지금도 맞부딪칠 때마다 손목이 저릿거렸다. 하지만…….
‘세비보다는 약해!’
이에샤는 담대하게 달려들었다. 검을 어깨 뒤로 젖히고 글렘의 코앞까지 다가붙었다. 글렘은 주춤했다. 경험도 적을 계집애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그사이 이에샤가 검을 내리그었다. 글렘의 셔츠 자락이 잘려 나갔다. 멈추지 않았다. 올려 베고, 빙그르 돌며 휘두르고, 왼손으로 검을 옮겨 후속타를 이었다. 몸놀림이 길짐승처럼 매섭고 날짐승처럼 재빨랐다. 무용수의 춤 같이, 흐르는 물 같이 부드러웠다.
엘테르트는 관람석에 있지 않았다. 이에샤가 지나간 통로에 섰다. 벽에 기대었다. 팔짱을 꼈다. 이에샤와 같은 높이에서 결투를 지켜보았다. 브링이 번쩍일 때마다 어깨가 떨렸다. 하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름답군.”
이에샤의 움직임이? 검술 솜씨가? 새파랗게 튀어 오르는 빛줄기가? 세계의 강자로 꼽히는 이들의 싸움이?
“앨저 경이 열심히 하는 모습.”
이에샤는 아등바등해 왔다. 죄 없는 자와 저보다 어려운 자를 지키면서. 이에샤의 칼끝은 영예로운 곳으로 올라가고자, 무뢰배에게만 향했다. 이에샤가 바닥을 굴렀다. 글렘의 공격으로부터 달아났다. 조금도 구차해 보이지 않았다. 약해 보이지도 않았다. 검술에 까막눈인 엘테르트도 알 수 있었다. 승운은 이에샤에게 따랐다.
이에샤는 끝장을 보기로 했다. 글렘의 실력은 파악되었다. 자신과 비슷한 성싶었다. 셈브리온에게는 견줄 수조차 없었다. 크게 당황하여 빈틈까지 생겼다. 지는 것이 이상한 싸움이었다.
조금씩 발을 뒤로 옮겨 놓았다. 글렘은 눈치채지 못했다. ‘어라?’ 했을 때는 둘의 거리가 벌어진 뒤였다.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글렘보다 작고 팔도 짧은 이에샤로서는 근접전이 유리할 터였다.
이에샤의 입매가 휘었다. 몇 번이나 기검으로 이에샤를 바닥에 굴린 글렘과 달리, 이에샤는 브링을 아껴 두었다. 글렘의 기술은 브링 덩어리를 일자로 쏘아 보내는 짓에 지나지 않았다. 셈브리온의 표현을 빌리자면 ‘졸렬한 소꿉놀이’.
바닥을 지르밟았다. 검을 뒤쪽으로 빼 들었다. 아래에서 위로 초승달 무늬를 그렸다. 새파란 브링이 그물처럼 펼쳐졌다. 넓게 흩뿌린 기검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사방에서 모래흙이 튀어 올랐다. 굉음이 울렸다. 모든 일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벌어졌다.
부연 먼지가 나풀나풀 내려앉았다. 투기장의 정경이 드러났다. 관중은 말을 잊었다. 엉덩방아를 찧고 자빠진 제국 제3 기사단장의 목에, 백화 기사단장의 칼끝이 닿았다. 누구도 내다보지 못한 결과였다. 루시온이 벌떡 일어났다. 부스를 빠져나갔다. 체사로는 루시온의 모습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팔짓으로 이에샤를 가리켰다.
“승자는, 백화 기사단 소속 앨저 경!”
이에샤가 검을 거두어들였다. 조금 뒤 콜로세움 통로에서 루시온이 달려 나왔다. 내려오는 사이에 걸쳤는지, 군청색 망토를 두른 채였다. 루시온은 이에샤 곁에 멈추어 섰다. 한쪽 눈을 찡긋했다. ‘끝내줬어.’ 하는 뜻을 담아.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숨을 들이마셨다. 시원시원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벨리오노 델피르, 이번 결투의 증인이자 델페레타의 황태자로서 에버렛 경의 심판을 인정한다. 불복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드넓은 대연무장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에샤는 덜컥 불안해졌다. 속임수니, 부정행위니 하며 들고일어날까 봐 겁났다. 황태자의 입증으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여자 기사라는 이유로 당해 온 모멸들을 떠올리면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조마조마하게 입술을 씹는 참이었다.
짝짝짝!
그 박수 소리는 조그마했다. 대연무장을 채우기에는 하잘것없었다. 그렇더라도 이에샤는 들을 수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벅차오르는 웃음을 띠었다. 손뼉을 부딪치는 라제카 공주도 환하게 웃었다. 박수 여럿이 더해졌다. 누구인지 알 만했다. 이에샤는 백화 기사들이 앉은 쪽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박수란 전염되는 법이었다. 휩쓸린 이들이 갈채하기 시작했다. 황태자와 근위 기사단장이 가름한 승자였다. 축하하는 일 자체가 명예로웠다. 함성과 휘파람이 울려 퍼졌다. ‘어떤 사람’이 이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가 베푼 황실의 행사 아닌가. 즐겨야 마땅했다. 오늘만은 천덕꾸러기 백화 기사단장도 환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글렘은 얼이 나갔다.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렸다. 인정 못 해! 그렇게 외치며 일어나려는데,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루시온이 피식했다. 까딱 고갯짓했다. 이오르가 앉은 부스를 가리켰다. 글렘의 눈에 느릿느릿 박수하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이에샤가 도도히 글렘을 내려다보았다. 예쁘장한 입술이 벌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모드리스 경. 남기사치고는 제법이시네요.”
루시온은 체통도 잊어버렸다. 배를 쥐었다. 허리를 구부리며 웃어 댔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게 웃기는 이야기를 한 걸까? 네세라를 따라 했을 뿐이건만.
그때, 엷은 금색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흠칫 놀랐다. 머리보다 먼저 다리가 움직였다. 어두컴컴한 통로로 뛰어들었다. 엘테르트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에샤는 정신없이 달렸다. ‘멘델린 경을 잡아야 한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멘델린 경!”
“앨저 경?”
엘테르트의 소맷부리를 붙들었다. 홱 끌어당겼다. 엘테르트는 거센 팔심에 끌려갔다. 허리가 고꾸라졌다. 이에샤는 화들짝하며 손을 떼었다.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짧은 사과와 대답이 오갔다. 엘테르트는 흐트러진 셔츠를 바로잡았다.
“왜, 왜 그냥 가시는 거예요? 응원해 주겠다고 했잖아요?”
“응원했습니다. 줄곧.”
“그럼 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샤를 구경하려는 관중이 찾아올지도 몰랐다. 초조해졌다. 이에샤로부터 몇 발짝 물러났다. 이에샤는 오도카니 섰다. 낯에 섭섭한 빛이 번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엘테르트에게 잘못이라도 저지른 걸까? 아니면 브링어라서 싫어졌는가?
“내가 바로 축하하면 관련된 소문에 휩싸일까 봐.”
“아.”
“온전한 앨저 경의 승리 아닙니까. 앨저 경만의 일로 남아야지요. 나중에 따로 만나 축하드릴 셈이었습니다.”
이에샤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동안 남에게 담을 쳐 왔다. 높고 단단한 담을. 그런데도 엘테르트는, 루시온과 라제카는, 백화 기사들은 돌아서지 않았다. 불현듯이 깨달았다. 누가 ‘명예와 좋아하는 사람을 모두 거머쥐면 안 된다.’라고 정했는지.
‘내가, 지레 겁먹어서.’
하나를 고르기는 싫었다. 욕심부리고 싶었다. 자신은 잘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이든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여자라도 괜찮았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오늘도 이기지 않았는가! 복잡한 생각은 떨어내기로 했다. 지금은, 지금만큼은 충동에 몸을 맡겨도 될 것 같았다.
“앨저…….”
엘테르트는 팔을 늘어뜨렸다. 이에샤가 달려들었으므로.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등을 부둥켜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째서일까? 눈물이 흘러넘쳤다. 엘테르트의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고, 고마, 고마워요. 고마워요. 멘델린 경.”
“뭐가, 말입니까?”
“그냥 다. 전부 다요.”
엘테르트는 한숨지었다. 떨군 손을 들어 올렸다. 이에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다른 손으로는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이에샤는 울음을 삼켰다. 나긋나긋한 속삭임이 귓전을 울렸다.
“이긴 것, 축하합니다. 잘하셨습니다.”
언젠가와 똑같은 칭찬을 받았다.
고개를 젖혔다. 엘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이에샤는 말갛게 웃었다. 셈브리온이 아닌 사람에게 처음으로 비치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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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에샤야 내가 너희를 그렇게 쉽게 붙여 줄 거 같으냐
낮게 나는 독수리 챕터가 끝났습니다...쉴 땐 쉬더라도 챕터는 끝내고 쉬자 싶어서...내일은 정말 쉽니다 정말정말 쉽니다 죽을 거 같아요...ㅇ<-<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