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5 8. 낮게 나는 독수리 =========================
(연참 2/2)
“에버렛 경. 오랜만입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아주 편안했네. 앨저 경이랑, 음, 다른 사람도 잘 있지?”
체사로는 셈브리온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이에샤와 셈브리온 모두를 배려한 선택이었다. 황실이 셈브리온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하고, 이에샤와 자신의 사사로운 고리를 감추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나머지 백화 기사의 안부를 묻는다고 여길 법했다. 이에샤는 고마움을 느꼈다. 왜 셈브리온이 벨체터에 파병했던 제국 기사 중 체사로만 친구로 삼았는지 알 성싶었다.
“물론이죠. 저, 에버렛 경. 여쭐 말이 있습니다.”
“음? 말해 보게. 우리 본부에 찾는 사람이라도 있나 보지?”
“예. 3 기사단장의 사무실이 어디인지 알고 싶은데요.”
체사로가 눈을 치켜떴다. 모든 기사가 글렘이 이에샤를 증오하는 줄 알았다. 눈에 뜨이면 쫓아가서 을러댔고, 공석에서도 드러내 놓고 빈정거렸다. 글렘은 저열하고 편협한 사내였다. 어고트 프리슬리가 체사로보다 낫다고 떠들기도 했다. 글렘에게 이에샤를 혼자 보내서는 안 되었다.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셈브리온을 볼 낯이 없었다.
이에샤는 눈만 말똥거렸다. 체사로는 드러날락 말락 한숨을 쉬었다.
“내 안내해 주지. 그리고 볼일이 끝나면 나도 좀 봄세. 앨저 경한테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아, 예! 얼마든지요.”
거짓말이었다. 이에샤와 나눌 말이라고는 안부, 일 이야기―제국 기사와 백화 기사가 부딪쳤을 때―가 다였다. 글렘의 사무실까지 따라갈 구실이 필요했다. 이에샤는 지나치게 허술해 보였다.
체사로는 복도 왼편 두 번째 문으로 다가갔다. 근위 기사단과 홀수 번은 왼쪽, 짝수 번은 오른쪽에 자리잡은 모양이었다. 똑똑! 곧바로 문고리를 돌렸다. 노크란 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여섯 브링어가 지내는 곳이었다. 자기 사무실로 누가 오는 것쯤은 다들 눈치챘다.
글렘은 소파에 드러누운 채였다. 눈알만 굴렸다. 체사로와 이에샤를 보았다. 이에샤는 황당해졌다. 체사로는 다른 기사단장보다 윗사람이었다. 백화 기사단장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상관을 앞에 두고 무엄하기 짝이 없었다. 체사로는 익숙한 듯 “잠시 실례하겠네, 모드리스 경.” 하고 인사했다.
글렘이 뭉그적뭉그적 일어나 앉았다. 자리조차 권하지 않았다. 못마땅히 이에샤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음, 모드리스 경. 점심은 들었는가?”
“에버렛 경이 신경 쓸 바가 아니오. 저치는 왜 데려왔소?”
“내가 데려온 게 아니라, 앨저 경이 자네에게 볼일이 있다길래 안내해 준 걸세.”
체사로는 ‘앨저 경’에 힘주어 발음했다. 글렘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으나.
“여기사가 나한테 무슨 일이냐.”
“…….”
“나는 바쁘다. 소꿉질 같은 여자 기사단 단장처럼 한가하지 않단 말이다.”
누워서 쉬던 주제에 뻔뻔스러웠다. 이에샤는 눈썹을 꿈틀했다. 백화 기사단은 셋이서 온 에브라힐의 여자를 수발하느라 정신없었다. 네세라가 더해졌다고 달라지지는 않을 터였다.
노기를 갈무리했다. 브링 말고는 내세울 것 없는 망나니가 후회할 날도 머지않았다.
“모드리스 경.”
“꾸물대지 말고 말해라!”
글렘이 성깔을 부렸다. 이에샤는 엄지와 검지로, 반대쪽 손의 끄트머리를 집었다. 스르륵. 하얀 장갑을 벗겨 냈다. 망설임 없이 글렘에게 집어 던졌다. 체사로가 경악한 목소리로 "앨저 경!" 하고 외쳤다. 글렘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명예를 걸고, 경에게 황태자 전하의 입회 하에 결투를 신청한다. 허가라면 이미 받아 왔다.”
* * *
백화 기사단장이 제국 제3 기사단장에게 장갑을 던졌다.
소문은 반나절 만에 퍼져 나갔다. 호랑가시궁의 아랫것들이 옮겨 나르기도 했고, 글렘 스스로 떠벌리기도 했다. 그 정신 나간 계집을 혼쭐내 주겠노라고. 이튿날 정오에는 온 에브라힐이 이에샤와 글렘의 결투를 알았다. 저녁에는 궁전 밖까지 파다해졌다. 사흗날에는 이에샤가 상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이오르 아르데오노 황제가 석곡궁으로 발걸음한 것이었다.
작약화 가득한 정원을 보고 이오르의 눈빛이 오련해졌다. 태황태후를 추억하는 듯싶었다. 시중꾼들을 기다리게 하고, 시종 한 사람만 거느렸다. 이에샤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에샤는 질겁했다. 제 의자를 뺐다. 이오르에게 내주었다. 자신은 책상 앞에 꼿꼿하게 섰다.
이오르는 잠잠했다. 스란을 힐끗하며 “잘 적응한 모양이구나.” 하고 일렀을 뿐이었다. 이에샤를 올려다보았다. 지팡이 손잡이에 달린 사자 장식을 톡톡 두드렸다. 한참 만에야 말을 꺼내 놓았다. 무거운 목소리가 울렸다.
「올해는 황실에 고초가 많았지. 지친 이들을 북돋울 수를 찾고 있었다.」
이오르는 이에샤가 브링어에게 덤빈다는데도 태연스러웠다. 무언가를 꿰뚫어 본 듯이. 이번 결투를 황실 행사로 결정짓고 대연무장의 문을 열겠노라 말했다. 파격적이었다. 대연무장이라니! 올해는 단 한 번, 여름철 기사단 입단 시험에만 쓰인 장소였다. 신년맞이 토너먼트가 물거품이 되었으므로.
루시온은 한술 더 떴다. 귀족들에게 콜로세움의 자리를 내주고 관람료를 걷었다. 허드레꾼에게도 소액으로 입석을 허락했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글렘이 단칼에 이기리라 예상하고 관심을 두지 않은 이들도 들끓기 시작했다. 황제와 황태자가 나섰다. 이에샤 앨저, 그 어린 여자에게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더라도 황궁의 천둥벌거숭이가 망신당하는 꼴은 재미있는 구경거리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샤는 찧고 까부는 말들을 흘려 넘겼다. 처음에야 당황했으나, 잘되었다 싶었다. 크게 벌어진 판, 십분 써먹을 셈이었다.
델피르력 753년 8월 15일. 소철궁 휴게실.
이에샤는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눈을 감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왔다. 머리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속을 가라앉혀야 했다. 사색에 잠겼다. 휴게실 한구석에는 백화 기사들이 옹기종기했다. 이에샤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활발’이라는 글자를 사람으로 만든 듯한 네세라조차 숨죽였다. 오늘 이에샤에게서는 기이한 분위기가 풍겼다.
브링이란 육신이 경계를 넘는 순간 끓어넘치는 힘이었다. 브링어는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고절한 경지에 올라선 자들이었다. 태산 같은 존재감을 지녔다. 여느 때처럼 브링을 다스리지 않고 풀어놓은 이에샤는, 보기만 해도 위압적이었다.
이에샤는 지난날을 차근차근히 돌이켰다. 머릿속에서 에이릴리의 관이 묘소에 묻혔다. 열 살짜리 이에샤는 팔뚝으로 눈가를 훔치며, 하염없이 울었다. 예복이 없어 검은색 평상복을 입은 셈브리온이 이에샤를 부둥켜안았다.
「나는 어디 안 갈게. 계속 이-샤 옆에 남아서 검술 가르쳐 줄게. 엄마만큼 잘해 줄테니까, 뚝 그치자, 응? 이-샤.」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알디온 후작가에서 셈브리온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엿새를 굶은 끝에, 오스터가 셈브리온을 불러 주었다. 그때도 이에샤는 울었다. 어디에 갔었냐며 셈브리온을 때리고 꼬집었다.
언니, 선물이야. 여덟 살의 밀레나가 뜰에서 꺾은 꽃을 내밀었다. 이에샤는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짓밟아 버렸다. 밀레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에샤는 오스터에게 매를 맞았다. 셈브리온이 달려오고야 풀려날 수 있었다.
……열다섯 살. 검술의 오의에 닿았다. 브링을 깨쳤다. 알디온 저택에 만든 연무장은 어찌 되었을까? 잡풀로 뒤덮였으리라 생각하니 아까워졌다.
열여섯 살. 처음으로 셈브리온을 이겼다. 셈브리온은 성내지 않았다. 이에샤를 칭찬하느라 여념 없었다. 돌이켜보면 설렁설렁 대련해 준 것이었다.
열일곱 살. 달거리를 시작했다. 셈브리온은 잊을 만하면 아프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이에샤는 말짱했다. 셈브리온이 갖춰 놓았던 월경대 덕분에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다. 피 받이 천을 준비하며 쩔쩔맸을 셈브리온을 상상하니 우스웠다.
열여덟 살―――――.
똑똑!
눈을 떴다. 문 쪽을 돌아보았다. 놀라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다가오는 기척을 읽었다. 방문객이 누구인지도 알았다. 이에샤의 감각은 활짝 열린 채였다. 주변의 모든 실재를 지각할 만큼.
“들어와요, 멘델린 경.”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에샤는 잠잠히 기다렸다. 문이 밀려 열렸다. 언제나처럼 정장을 차려입은 엘테르트가 들어왔다. 이에샤에게 다가서러 했다. 백화 기사들을 보고 멈칫했다. 네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눈치껏 피해 주죠? 스란 경. 올센 경.”
“메, 멘델린 남작님 안녕하세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올센 경.”
엘테르트는 열없이 고개를 끄떡했다. 그때, 방 안을 메우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이에샤가 배려해 준 성싶었다. 사실은 들어오자마자 밀도 높은 브링에 나자빠질 뻔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짙푸른 눈동자가 엘테르트를 쳐다보았다. 밑바닥에서 불길이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저, 앨저 경. 일주일 만입니다. 그간 잘 지냈습니까? 오늘 상태는 어떤지…….”
“아주 좋아요.”
짤따란 대꾸가 돌아왔다. 엘테르트는 한숨지었다. 이에샤가 호랑가시궁에 찾아왔던 날, 험악하게 헤어진 뒤로 처음이었다. 어떻게 말문을 터야 할지 몰랐다. 이에샤 쪽에서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에샤는 열여덟 살의 어느 날을 기억했다. 여름 한낮이었다. 더운 바람이 맴돌았다. 먼지 냄새와 닮은 종이 냄새. 창문 위틀에서 펄럭이던 장막. 머리카락을 붙잡고 선 아름다운 청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에샤의 낯꽃을 보고 엘테르트가 물었다.
“무언가 좋은 일이라도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글쎄요.”
“결투를 시작하기 전에 앨저 경과 얘기가 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내게 시간을 허락해 주겠습니까?”
이에샤는 답하지 않았다. 엘테르트의 몸이 살며시 떨리는 게 보였다. 브링의 자취 탓인 듯했다. 별수 없었다. “알았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엘테르트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가까운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렸다. 이에샤는 귀만 기울였다. 평정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엘테르트의 입이 떨어졌다.
“그날, 화내서 미안합니다. 또 멋대로 굴어 버려서. 나는 정말로 앨저 경한테는 잘못만 하는군요.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전 멘델린 경이 화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영문은 알고 싶어요. 왜 그러셨나요?”
“답답했습니다.”
양미간을 찌푸렸다. 답답해야 할 사람은 저였다. 까닭도 가르치지 않고 가 버린 쪽이 누구인데. 엘테르트가 말을 이었다.
“앨저 경이 문제를 혼자 끌어안고, 남은 의견조차 내지 못하도록 막는 점이 줄곧 답답했습니다. 힘을 합치면 간단하게 풀릴 문제를 쩔쩔매며 고민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말했잖아요. 제 스스로 해내고 싶다고.”
“그럼,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엘테르트는 이상을 좇았지만, 합리적인 남자였다. 이에샤의 무모(無謀)를 꿰뚫어 보았다. 이에샤는 지나치게 심지가 굳었다. 세파에 부딪쳐 자신을 깎아 나가면서도 목표는 잃지 않았다. 단단하고 가엾은 모난 돌.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바람을 응원하되 고집은 꺾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기 전에.
“도움받는다고 경을 약하다 할 사람 없습니다.”
“있어요. 아주아주 많이.”
“그런가요? 그럼 그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말아 버립시다.”
이에샤는 기침을 터뜨리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