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4 8. 낮게 나는 독수리 =========================
(연참 1/2)
“왜 그랬어요?”
엘테르트는 추억에 잠겼다. 예전에도 받았던 물음이었다.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부정행위자로 몰린 이에샤를 편든 다음에. 달라진 점이 있었다. 이에샤가 식식거리지 않았다. 애끓는 낯빛을 띨 뿐이었다. 엘테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에샤가 발 구르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황태자를 물먹인 두 사람은 “마음대로 하고 꺼져!” 하는 명령에 따랐다. 호랑가시궁을 빠져나왔다. 이에샤는 조마조마했으나, 엘테르트는 태연스러웠다. 토라져서 저럽니다. 놔두면 풀릴 겁니다. 불경한 소리를 지껄였다. 이에샤는 기가 질렸다. 황족에게 방자히 굴 수 있는 남자라니. 생각해 보아도 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둘은 인적이 드문 길을 찾았다. 발맞추어 걸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을 따름이었다.
“왜 이번에는 안 말렸냐고요. 싫어했잖아요? 결투.”
“앞으로 앨저 경의 판단을 존중하겠다고 말했잖습니까.”
“방금은 존중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도와줬잖아요. 왜 내키지 않는 일을 하죠?”
엘테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이에샤가 옳았다. 결투 이야기가 나왔을 때, 욕지기가 치밀었다. 엘테르트에게 새겨진 폭력을 향한 혐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평생 싸움을 거리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날과 차이점이 있었다. 결투를 거북해하기보다, 이에샤가 걱정되었다. 이에샤도 글렘 모드리스도 브링어였다. 경험은 글렘 쪽이 풍부할 터였다. 이에샤가 크게 다칠까 봐 겁났다. 처음이었다. 행위보다 사람을 앞에 두기는.
엘테르트가 발을 멈추었다. 이에샤는 두어 걸음 나아갔다가 섰다. 뒤를 돌아보았다. 간질간질한 시선이 닿아 왔다.
“왜 그래요? 멘델린 경.”
“혹 내가 끼어들어서 앨저 경한테 폐가 되었습니까?”
“예?”
“앨저 경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이어질 말은 뻔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외쳤다.
“사과 좀 하지 말아요!”
“아, 미안합, 이 아니라.”
“제가 무서우면서 왜 그동안 참은 거예요? 알았다면 가까이 가지도 않고, 멀찌감치 피해 줬을 텐데!”
엘테르트는 당황했다. 이에샤는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사과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 괜찮다고 한다면 황태자의 앞에서 거짓말한 셈이 되었고, 참을 만했다고 하면 이에샤가 껄끄러웠노라 고하는 꼴이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를 노려보았다. 왜 비위가 뒤집히는 걸까. 어리둥절한 눈빛과 화를 내면서도, 화내는 데에 자괴를 느끼는 눈빛이 얽혀 들었다.
“앨저 경, 난.”
“왜 저한테 그렇게까지 해 주시죠? 아시잖아요, 빚지는 거 싫다고 말했잖아요. 돌려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왜 자꾸!”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 앨저 경.”
엘테르트가 말허리를 잘랐다. 이에샤는 움찔했다. 엘테르트의 낌새가 우중충했다. 노여워하는 성싶었다. 분노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만난 무렵에는 멸시당했고, 일하다가 실수했을 때는 곤란해하는 느낌이 짙었다. 놀랐다. 이번에는 이에샤가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브링을 무서워하는 거지, 앨저 경이 무서운 게 아닙니다. 그쯤은 구분할 줄 압니다. 왜 참았냐고요? 내 나약함 때문이지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요. 이게 그렇게 앨저 경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입니까?”
“왜, 왜 화를 내죠?”
“화내는 거 아닙니다.”
설득력이 없었다. 표정도 목소리도 쌀쌀맞았다. 이전에도 엘테르트와 담을 지은 적이 있었지만, 이에샤가 화내는 처지였다. 용서하여 화해했다. 지금 같은 상황은 낯설었다. 셈브리온과 다투더라도 이기는 쪽은 저였다. 사과하는 방법 따위 배우지 못했다.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엘테르트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신경질이 배어났다. 공포를 억누른 까닭은, 이에샤에게 그만큼의 가치가 있으니까였다. 잘해 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미안함으로. 나중에는 좋아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비하하는 듯한 이에샤의 말이 못마땅했다.
“내가 경을 모멸했던 일은 몇 번 사죄해도 모자랍니다. 압니다. 하지만 앨저 경, 왜 계속 사소한 손길조차 거절합니까? 언제가 되면 내 호의가 단순한 호의로 다가갈 수 있지요?”
“나는 더는 남한테 빚지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내 스스로 해내고 싶어요.”
“평생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살 셈입니까?”
이에샤는 말을 잊어버렸다. 그런 뜻은 아니었다. 사람을 꺼리기는 했지만 외돌토리가 될 셈은 없었다. 셈브리온이 있지 않은가.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사랑해 주는 스승이. 또한…….
‘또 누가 있지?’
백화 기사들이 떠올랐다. 라제카와 란델이 뒤이었다. 루시온의 얼굴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누구와도 깊게 사귀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연정을 품은 엘테르트마저 매한가지였다. 따지고 들수록 엘테르트의 이야기가 맞았다. 이에샤에게는 셈브리온만 있으면 족했다. 다른 이는 바라지 않았다.
“아니에요. 혼자는, 저 혼자는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모드리스 경과의 결투가 어긋나면 누가 경을 돕기로 했습니까?”
“절대 지지 않을 테니 괜찮아요.”
“억지 쓰지 마십시오. 상대는 당신과 똑같은 브링어입니다.”
엘테르트는 한숨지었다. 이에샤의 낯빛이 바뀌는 모양새를 보며 깨달았다. 이에샤 곁에는 지나치게 사람이 적었다. 에브라힐에 마음을 터놓는 벗도 없으리라. 작은 걱정조차 뿌리치는 이에샤가 답답했다. 제 힘으로 야망을 이루는 것은 좋았다. 좋았으나, 이에샤는 뭇사람에게 인정받겠다고 했다. 남과 엮이지 않고 자신을 알릴 수는 없었다.
“이번 결투로 앨저 경이 유명해진다면 백화 기사단의 위신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겁니다. 아무리 새 사람을 뽑고, 사교계를 들락거려도 이보다 더한 방법은 없습니다. 득실을 따졌을 때 결투를 벌이겠다는 앨저 경의 판단이 옳았다고.”
“…….”
“나 또한, 판단했을 뿐입니다.”
내뱉고 엘테르트는 뒤돌아섰다. 지나온 길을 되밟기 시작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붙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몰랐다. 하나 엘테르트의 이야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섰다.
몸을 돌렸다.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동쪽으로. 석곡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후에 볼 서류가 쌓였을 터였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엘테르트 탓으로 개운치 못했지만, 허락도 떨어지지 않았는가. 생각났을 때 행동하는 편이 좋았다.
큰길로 나섰다. 쉬는 이동 마차를 찾았다. 터벅터벅 다가갔다. 마부가 바지 차림의 백화 기사단장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에샤는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피곤했다. 마차에 올라탔다.
“서쪽, 부용궁으로.”
“예이.”
제국 기사단의 총본부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좌석에 기대었다. 눈을 감았다. 다그닥다그닥. 짐말의 발굽 소리가 울렸다. 바퀴가 굴러갔다. 불규칙한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가 너무 일일이 의미를 부여했나.’
그동안 엘테르트에게 도움받으면 셈부터 하기는 했다. 엘테르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가 무언가를 해 주어도 가슴에 쌓아 두었다. 갚으려고 했다. 셈브리온과는 달랐다. 셈브리온에게도 책임감을 느꼈지만, 당연한 것을 받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듯이.
‘아니, 세비랑 남이 같을 수가 없잖아. 도대체 나 왜 혼난 거야?’
입술을 깨물었다. 억울함이 솟았다. 엘테르트가 브링어를 무서워하는 줄 몰라줬다는 데에 미안했을 뿐이었다. 어쩌다가 대화가 다툼으로 흘러갔는지 몰랐다. 절대로 사과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자신은 잘못한 점이 없었다.
이에샤는 몰랐다. 사람이 벽에 부딪치기를 되풀이하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네게는 내 울타리에 받아들일 가치가 없어.’ 하는 태도가 얼마나 비참을 불러일으키는지. 어려서는 밀레나에게, 지금은 셈브리온을 뺀 모두에게 그러했다. 자신은 똑같은 일을 겪더라도 상처받지 않았으므로. 무관심은 잔인하면서도 편리했다.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어.”
부용궁에 다다랐다. 마부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이에샤는 짧게 인사하고, 이륜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투박한 풍경이 펼쳐졌다. 부용궁 건물은 별궁이라기보다 탑 같았다. 제국 기사단 전체의 본부였으나, 석곡궁보다 자그마했다. 제국 기사는 의무적으로 출근하지 않으니 괜찮은 모양이었다. 정원이 없었다. 커다란 연병장과 연무장 여섯 개가 주위를 둘러쌌다.
이에샤는 연무장 사잇길로 걸어 들어갔다. 눈총이 쏟아졌다. 쑥덕임도 들려왔다. “백화 기사단장 주제에 어딜.” 같은 말은 점잖은 축이었다. 모르는 줄 알고 저 미친년이라느니, 어린 계집이라느니 지껄이는 놈도 있었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땀 냄새가 자욱했다.
‘남 헐뜯을 시간에 좀 씻지.’
이에샤와 스란은 수련을 마치면, 목욕을 잊지 않았다. 백화 기사는 반듯한 차림새를 지켜야만 했다. 지저분한 꼴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귀찮게 몸 구석구석 윤을 내는 자신과 웃통도 벗고 돌아다니는 제국 기사의 차이에 짜증이 났다.
건물에 들어섰다. 때마침 기사 한 명이 지나갔다. 이에샤는 “거기!” 하고 불러 세웠다. 기사가 이에샤 쪽을 보았다. 표정이 찌그러졌다.
“……무슨 일이, 십니까.”
어설픈 높임말이 흘러나왔다. 제국 기사단은 이에샤를 윗사람 취급하면 두드러기가 나는 놈들의 모임 같았다. 이에샤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제3 기사단장 모드리스 경이 어디 있는지 아나?”
“저는 4 기사단 소속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기사단장 사무실이 몇 층에 있는지 가르쳐 주겠어?”
“3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친 기사는 친절한 편이었다. 이에샤에게 시비하지 않고 대답해 주었으니. 이에샤는 “고마워.” 하고 말한 뒤, 계단을 향했다. 성큼성큼 올라갔다. 빠르게 3층에 다다랐다.
고요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방문이 늘어섰다. 기사단장들의 개인 사무실 같았다. 문과 문의 거리로 미루어, 제법 넓어 보였다. 이에샤는 고민했다. 어느 문을 두드려야 할까. 팻말 따위는 걸리지 않았다. 어림잡으면 가까울수록 숫자가 크고, 안쪽이 근위 기사단일 듯싶었다. 하지만 6 기사단이 양쪽 어디에서부터인지도 문제였다.
칫! 혀끝을 찬 참이었다.
“이런, 웬 아가씨가 서 있다 했더니 앨저 경이었나. 여기까지 어쩐 일인가?”
뒤로 돌아섰다. 체사로 에버렛, 기사의 정점이자 제국 기사단에 하나뿐인 이에샤의 우군이 빙그레했다. 회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이에샤를 담았다. 이에샤는 곤두섰던 신경을 누그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