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2 8. 낮게 나는 독수리 =========================
* * *
이에샤와 셈브리온은 일요일마다 교외로 나갔다. 삯마차를 빌려, 한 시간 남짓 달렸다. 크지 않은 숲에 다다랐다. 수도 변두리 숲이라면 놀러 나온 객으로 붐빌 법도 했다. 하지만 인적이 끊겼다. 재작년에 살인 사건이 벌어졌던 탓이었다. 슬픈 일이었지만, 사제에게는 연무장이 주어진 셈이었다. 숲은 사람이 죽은 장소답지 않게 생기발랄했다. 이에샤는 비벨라 숲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자신은 셈브리온의 친구를 해쳤다.
“무슨 생각해?”
“……별거 아냐. 여기, 풍광 좋은데 아깝다 싶어서.”
“어쩔 수 없잖아. 우리한텐 잘됐지 뭐.”
셈브리온은 전쟁터를 누비던 용병다웠다. 생과 사에 무뎠다. 킬타로스를 두고도 이에샤에게 “다음에 만나면 죽여라.” 하고 말했을 정도였다. 호인인가 악인인가 하면 전자이겠으나, 이따금 스산스러웠다.
“몸은 다 풀었어?”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을.”
“그건 그렇지.”
빙그레 웃더니, 이에샤에게 달려들었다. 번개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에샤는 검을 가슴께로 들어 올렸다.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 냈다.
요즈음 셈브리온의 가르침이 모질었다. 귀띔도 없이 덮쳐서 대련으로 끌고 가고는 했다. 이에샤의 눈으로도 파헤치기 어려운 검로를 그렸다. 상처가 나도 그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이에샤로서는 공부가 되었지만, 왜인지 초조해 보였다.
이에샤의 것보다 긴 검은색 롱소드가 가로줄을 그었다. 이에샤는 윗몸을 뒤로 뺐다. 셈브리온은 멈추지 않았다. 발을 내디디며 아래에서 위로 베고, 사선으로 내리긋고, 몸을 틀었다 돌아와 좌우로 갈랐다. 이에샤는 이를 악물었다. 세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힘도 속도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요즘 왜 이렇게 진지해?”
“진지해서 싫어?”
“당연히 너무 좋지!”
호전적으로 외쳤다. 몸을 수그렸다. 셈브리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까강! 올려 벤 이에샤와 가로로 든 셈브리온의 검이 맞부딪쳤다. 셈브리온이 한 발로 이에샤의 안쪽 다리를 걸었다. 이에샤는 침착히 중심을 잡았다.
둘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고도 쉬었다가 하자는 뜻이 통했다.
“세비, 당신 그동안 전력으로 싸운 거 아니지?”
“네가 브링어가 된 뒤로 전력으로 싸우지 않은 적 없어.”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버겁지 않았는걸.”
“음, 그건 마음가짐의 차이랄까.”
셈브리온이 이에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슥슥 쓰다듬었다. 이에샤는 뿌리치지 않고 눈만 가늘게 떴다. 길이 든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전에는 제자를 가르친다는 자세로 싸웠고 요즘은 적을 쓰러뜨리겠다는 자세로 싸우는 거지. 기세가 다를 수밖에 없잖아?”
“내가 세비의 적이야?”
“설마.”
셈브리온은 무릎을 구부렸다. 이에샤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검은 눈이 반달꼴로 휘었다. 얼굴 가득 따뜻한 빛이 번졌다.
“예뻐 죽겠는 제자지.”
“그렇지? 당신한테는 내가 제일 예쁘지?”
“그래, 그래. 너 말고 예쁜 사람 없어. 그러니까 더 높은 경지로 키워 주려는 거야. 그동안 일하느라 힘들어 보여서 너무 풀어 줬어.”
이에샤가 말갛게 웃었다. 셈브리온에게 애정 어린 말을 들어서 기쁜 듯했다. 이런 면은 일곱 살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었다. 꼬마 이에샤는 예쁘다, 귀엽다, 사랑한다 얼러 주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얼굴을 했다. 셈브리온이 저를 버린 아버지와 병든 어머니를 대신하는 것처럼.
“우리 딸, 아빠 없이도 꿋꿋하게 살려면 강해져야지.”
“뭔 개소리야?”
……말씨만은 퍽 달라졌다. 이에샤의 입을 걸쭉히 만든 데에는 셈브리온의 공이 혁혁했으나, 후회막심했다. 어여쁜 말만 쓰던 여자아이가 그리웠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속도 모르고 생글생글했다. 손목 운동차 검을 털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를 시집보낼 자신이 도무지 없었다.
* * *
이에샤는 얼이 빠졌다. 여느 날처럼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각에 출근했다. 석곡궁 건물로 들어선 참이었다. 문을 열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눈을 끔뻑했다. 벽에 종이꽃이 다닥다닥 붙었다. 천장에는 흔들개비가 늘어졌다. 장식들은 사무실까지 이어졌다. ‘침입자?’ 하고 떠올렸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바보스러웠다. 숨어들어서 파티 장식을 해 주는 침입자라니. 범인은 짐작이 갔다.
사무실에 다다랐다. 예상대로였다. 집에서 싣고 왔는지, 일인용 안락의자에 앉았던 네세라가 폴짝 일어섰다. 백화 기사단 정복이 굴곡진 몸태에 달라붙었다. 턱시도 베스트가 잘록한 허리를 돋보였다. 이에샤와는 다른 느낌으로 멋들어졌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이게 다 뭐지? 페리튼 경.”
네세라는 페리튼 자작 영애에서, 이에샤의 부하로 바뀌었다. 말을 높이지 않아도 되었다. 네세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제가 입단한 날이니 기념해 마땅하죠. 총무부에 다 얘기하고 한 일이랍니다.”
“난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화내실 건가요?”
“그런 건 아니야.”
이에샤는 손을 내저었다. 장식이라고 해도 현관에서 사무실까지의 복도만 꾸몄다. 치우기도 쉬울 터였다. 고마운 귀족 자원자가 입단을 기념하겠다는데, 이쯤은 봐줘도 되지 싶었다.
“총무부 놈들이 백화 기사단에 사람을 보내줬을 리는 없는데. 혼자 했어?”
“아뇨. 단장님 말마따나 사람은 줄 수 없다길래 돈 내고 불렀습니다.”
“돈?”
“허드레꾼들의 월급 장부를 보고, 지난달 봉급을 가불해 간 하급 하녀 셋만 불러서 일하게 했어요. 그리고 팁을 줬죠. 치울 때도 마찬가지로 할 겁니다. 총무부에서 지급받은 건 장식물이랑 월급 장부 사본뿐이에요. 뭐, 뒤엣것을 받는 과정에서 가문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아,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봉급을 당겨 받았다면 돈이 급했으리라. 이달에는 봉급이 없을 테고. 엘테르트로부터 네세라가 빈민 여자의 구제에 사비를 턴다는 말은 전해 들었다. 황실의 일꾼을 사사롭게 부리기는 어려우니, ‘입단 기념 파티’라는 명분을 만들어 낸 모양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일을 시작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사비를 써도 괜찮아? 백화 기사 봉급이 엄청나졌다지만.”
“괜찮아요. 제 목표는 남동생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 가산을 거덜내는 거니까요.”
네세라가 방긋 웃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말속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네세라는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리보전한 아버지가 딱하기는 했지만, 영특한 저를 제치고 아들을 후계자로 삼은 일이 가슴에 사무쳤다. 그래서 집안의 돈을 어려운 여자들에게 뿌려 대는 것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에샤는 ‘저 집도 복잡한가 보지.’ 하고 말았다.
“우리 기사단 분위기는 기본적으로 자율에 맡기는 편이야. 나랑 스란 경은 밖으로 돌 거고, 페리튼 경은 이제부터 올센 경을 도와주면…….”
“바깥 순찰, 저도 하고 싶은데요.”
“뭐?”
이에샤는 어리둥절했다. 곱디고운 아가씨가 순찰이라니. 오랫동안 백화 기사단 같은 조직이 없었던 까닭은, 남자와 몸싸움할 여자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샤와 스란은 제국 기사와도 겨룰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네세라라면 남자를 말리려다가 도리어 희롱당할지도 몰랐다. 이에샤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단장님은 제가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단장이란 호칭보다 이름이 익숙해. 이름으로 불러 줘.”
“좋아요, 앨저 경. 제가 무기라고는 들어 본 적도 없는 귀족 여자라서 무리라고 하는 거라면, 단단히 오판이랍니다. 전 깨진 술병을 든 주정뱅이하고도 싸워 봤으니까요. 아내랑 어린 딸을 손찌검하는 개자식이었죠.”
“그, 그러고도 무사했어?”
네세라가 뽐내듯이 가슴을 폈다.
“샐먼 선생은 무척 실력 좋은 의사랍니다.”
“다쳤단 소리잖아!”
“황궁에도 의료원은 있잖아요? 다치면 다치는 대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죠.”
이에샤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무언가가 어긋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세라는 지나치게 과격했다. 여인을 지키겠다면서, 자신은 돌보지 않았다. 이에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안 돼. 상관으로서 위험할 게 뻔한 일을 시킬 수는 없어. 페리튼 경은 사무랑 접대 쪽을 책임지는 게 합리적이야.”
“어째서죠? 앨저 경은 브링어니까 뭐든 할 수 있고, 나는 할 수 없다는 소리인가요?”
“그런 뜻이…….”
입을 다물었다. 적갈색 눈동자가 쏘아보아 왔다. 네세라가 저러한 기세를 띠면 이에샤는 맞서기가 어려웠다. 야단맞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세라는 한숨을 지었다. 네 달 뒤에야 성년이 되는 백화 기사단장은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몸을 사리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안 돼요. 앞으로 들어올 백화 기사 중에 무예를 익힌 여자가 얼마나 될까요? 언제까지 두 사람만으로 이 넓은 궁을 감당할 셈이에요? 제가 한 번 다치면 책임을 묻고, 두 번 다치면 더 큰 책임을 묻고, 세 번 다치면 황실 재판정에 회부할 겁니다. 그러다 보면 건드리는 사람이 없어질 테죠. 제 좌우명은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거든요.”
“그래도.”
“자율에 맡기신다면서요? 기사단에 폐가 될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에게도 순찰 일을 맡겨 주세요.”
이에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받아치고 싶은데,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가녀린 여자가 남자와 맞설 수는 없다. 그렇게 내세우면 “여자가 가녀리면 아무것도 못 하고 참아야 합니까?” 하고 화낼 것 같았다. 그 예상은 실지이기도 했다.
“후우, 알았어. 페리튼 경 마음대로 해.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나 스란 경을 부르고.”
“스란 경, 좋죠. 전 그 사람 참 마음에 들더라고요. 시원시원하고 일에 자부심도 있어 보이고.”
스란은 네세라를 두고 ‘얽히면 귀찮을 듯한 여자’로 평했었다. 이에샤의 속에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어째서 서로의 인상이 갈리는 걸까.
사무실 문이 열렸다. 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는 양 스란, 미엘라가 걸어 들어왔다. 둘도 황당한 표정이었다. 네세라의 장식이 효과가 좋았다. 미엘라 또한 네세라일 줄 알았는지 부드럽게 “안녕하세요, 페리튼 경.” 하고 인사했다. 스란은 묵묵했다.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연무장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뭐? 스란 경, 인사는 하고 가야지.”
“잘 부탁합니다, 페리튼 경.”
건성으로 내뱉었다. 복도로 나가 버렸다. 이에샤는 당황했다. 스란과 네세라 사이에 다툼이라도 있었는가 싶었다.
‘보고할 때 별다른 말은 없었는데.’
“놔둬요. 창피해서 저러는 거니까.”
네세라가 입가를 가렸다. 키드득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샤와 미엘라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아뇨. 네세라는 스란의 태도가 아무렇지도 않은지 생글생글할 따름이었다.
“처음 만난 날 스란 경, 나를 철부지 귀족 영애로 생각했거든요. 장난으로 백화 기사가 되겠다는 거라면 그만두라고.”
이에샤도 실소하고 말았다. 알 성싶었다. 스란의 자존심이라면 민망하기 그지없으리라. 네세라가 불쾌하지 않다면 내버려 두기로 했다. 마음을 추스르면 스스로 사과할 터였다. 스란의 태도에 안절부절못하던 미엘라도 안심했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앨저 경, 오늘 보셔야 할 서류 정리해 드릴게요.”
“…….”
이에샤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 작품 후기 ============================
친구와의 약속 시간이 오후로 미뤄져서 허둥지둥 썼네요. 연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네세라가 합류했습니다...요즘 말로 극인싸라 부르는 네세라는 잘 적응할 듯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 오타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