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1 8. 낮게 나는 독수리 =========================
밀레나는 으뜸이 되기를 바랐다. 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숙녀가. 옛날에는 남이 친절하게 대해 주면 기뻐했다. 손가락질하지만 않아도 좋았다. 요즈음 만족이 어려워졌다. 사람을 매혹하는 재미를 알아 버렸으므로. 거울로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모임에서 써먹는 일은 얼마나 보람찬가.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명예를 거머쥐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엘테르트가 필요했다.
붓꼬리로 섬세하게 그린 듯한 입매가 휘었다. 하인과 하녀를 가리지 않고 눈길이 쏠렸다. 알디온의 고용인들은 밀레나가 명령하면 죽음도 마다않을 것처럼 굴었다. 밀레나는 남이 저에게 목매달 때 충족감을 느꼈다.
“아가씨. 차와 스콘이 준비되었답니다. 2층으로 올려 보낼까요?”
“그래, 왜건을 서재 앞에 가져다 놓으렴. 종아이 하나도 대기시켜 두고.”
“물론이죠. 아가씨께 트레이를 드시게 했다간 주인님의 불벼락이 떨어질 겁니다.”
주방에서 나온 하녀가 우스개를 부렸다. 밀레나는 자애롭게 들어 주었다. 계단을 밟았다. 측근 하녀가 따라붙으려 했다. 손짓으로 가로막았다. 트레이를 옮길 하녀가 기다릴 터였다. 아랫것을 주렁주렁 달고 갈 수는 없었다. 폐가 되리라.
실내용이라도 드레스는 무거웠다. 당연했다. 속치마를 몇 겹이나 둘렀으니. 느릿느릿 걸었다. 서재로 다가갔다. 다과―고용인 통로로 올려 보낸―가 실린 왜건과 눈을 내리깐 하녀가 보였다. 똑똑! 밀레나는 손등으로 노크했다.
작년 일이 떠올랐다. 9월의 중순이었다. 그날도 엘테르트는 오스터의 서재에서 일을 보았다. 밀레나에게는 끼어들 용기가 없었다. 문가만 알짱거렸다. 이에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엘테르트와 말 한 마디 섞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는데.’
오스터는 물론, 상냥한 엘테르트가 밀레나를 쫓아낼 리 없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면 되었다. 지난해 밀레나는 그러지 못했다. 우스웠다. 회상에 잠기던 차였다.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오스터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밀레?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두 분, 말씀 나누시려면 목이 탈 거 같아서요. 그리고 아버지 점심도 못 하셨잖아요. 요기하시라고 다과를 좀 챙겨 왔어요.”
밀레나는 눈짓을 보냈다. 하녀가 왜건을 밀었다.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응접 탁자에 다과를 늘어놓았다. 오스터는 깜찍해 죽겠다는 낯꽃을 띠었다. 셀더리와 사이에서 본 딸은 사근사근하고 마음씀씀이가 고왔다. 앨저 모녀는 견줄 수조차 없었다.
‘어미나 자식이나 건방진 것들이었지.’
에이릴리 알디온은 너그럽지도 엄격하지도 않은 안주인이었다. 싹싹하지도 매몰차지도 않은 아내였고. 하나 오스터의 머릿속에서는 음침하고 고집불통인 여자로 남았다. 참으로 독했다. “내가 있는 한 그 여자도 아이도 첩과 사생아일 뿐이에요.” 하며 씹어뱉던 모습이 기억났다. 그렇게 대가 세니 남편의 정도 지키지 못하고 버려졌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습니다만, 후작.”
“아! 멘델린 경. 우리 딸아이가 수고해 줬는데 셋이서 차라도 들지 않겠나.”
엘테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드러날락 말락 한숨지었다. 밀레나는 괜찮아도, 오스터와 티타임이라니. 오스터 알디온은 잘못해 놓고 남 탓을 하는 재주가 빼어난 작자였다. 이야기하다 보면 ‘다섯 살짜리랑 얘기해도 이보다는 속이 덜 터지겠군.’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엘테르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디온 영지에 사업장을 세우고자, 권리증을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황실 등기소의 인장이 찍힌 종이를 톡톡 두드렸다.
“말했다시피 후작, 우리 측에서 귀 영지의 산림 자원에 손댈 일은…….”
“경.”
“후우! 말씀하십시오.”
“티타임이라고 하지 않았소? 밀레는 그런 복잡한 이야기 따위 들어도 모른다오. 신사 중의 신사라는 멘델린 경이 숙녀를 앉혀 놓고 따돌리면 쓰나.”
짜증을 다스렸다. 별수 없이 서류에서 눈을 떼었다. 맞은편 소파에 앉은 밀레나를 바라보았다. 밀레나에게 유감은 없었지만, 지금은 골치가 아팠다. 엘테르트는 바쁜 몸이었다. 일정이 밀리면 큰일이었다.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알디온 영애.”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괜히 끼어들면 안 될 자리에 끼어든 거 같아서 면구스럽습니다.”
“괜찮습니다. 일하다 보면 적절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허울 좋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밀레나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했다. 몸가짐이 반듯하고도 점잖았다. 알디온 후작 부부가 어떻게 밀레나 같은 딸을 낳았은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녀도 마찬가지고.’
이에샤 또한 오스터와 판달랐다. 생김새가 비슷하기는 했다. 하지만 성미는 딴판이었다. 서로에게 정도 없었다. 남남이라 해도 어울리렸다. 어머니와는 닮았을까. 엘테르트는 에이릴리 앨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졌다.
밀레나가 뜨거운 물이 찬 주전자를 집었다. 찻잎이 담긴 주전자를 채웠다. 뚜껑을 닫았다. 작은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상앗빛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엘테르트는 따분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요가 내려앉았다.
3분 뒤. 모든 모래가 밑바닥에 쌓였다.
“엘테르트 님부터 드릴게요. 괜찮으시죠, 아버지?”
“물론이다, 내 천사.”
밀레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엘테르트 앞의 찻잔에 거름망을 올렸다.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말간 찻물과 찻잎 조금이 흘러나왔다. 엘테르트는 오래 전, 지나간 티타임을 기억했다. 백화 기사단 사무실에서 이에샤와 차를 마셨었다.
「멘델린 경이랑 공주님 눈은 이 찻물 같네요.」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는 제가 이에샤에게 사로잡힐 줄 몰랐다. 돌이켜보면 사랑스러운 소리가 아닌가.
밀레나는 눈을 깜빡했다. 얼떨떨했다. 자신이 무엇을 본 걸까? 엘테르트의 낯에 스친 표정이 익숙했다. 밀레나와 춤춘 다음, 이만큼으로도 영광이라며 웃던 영식과 비슷했다―귀찮게 추근덕거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찌하여 엘테르트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하는지 몰랐다.
머릿속이 식었다. 궁리가 가쁘게 섰다. 엘테르트에게 정인(情人)이 있다면, 밀레나가 해야 할 일도 달라졌다. 누구인지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저와 싸울 법한 적수인지 보잘것없는 여자인지―엘테르트가 품을 정도라면 여간내기는 아니겠지만. 두 사람이 맺어질 가능성도 따져 보아야 했다. 엘테르트를 손에 넣지 못할 성싶다면 서둘러 다른 길을 찾아야 했으니까. 애인 자리를 내주고 부인 자리를 꿰차는 수도 있었다.
밀레나에게는 남자의 사랑보다, 남자의 지체에 딸려 오는 영예가 귀했다. 이 생각만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귀족은 드물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서야.
“엘테르트 님.”
“무엇입니까, 영애.”
“상사화가 피는 철이 왔지요. 최근에 젊은 귀족 사이에서 무슨 얘기가 도는지 아시나요?”
엘테르트도 사교 모임에 곧잘 다녔다. 하지만 젊은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애버토스의 대리인으로서 나이든 귀족들을 만날 따름이었다. 입지가 탄탄한 대귀족에, 고위 관료를 겸했다. 또래 무리에 낄 필요가 없었다.
“일찍 피어난 상사화를 꺾어서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바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들 해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이겨 낸다는 뜻이라나? 재밌는 미신이죠?”
“그렇군요. 일전에는 강령술 같은 게 유행하더니.”
“후후, 그건 벌써 작년 일이잖아요.”
밀레나는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엘테르트다웠다. 사교계는 빠르게 흘렀다. 강령술 말고도 여러 유행이 지나갔다. 엘테르트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사랑’이라 하니 이에샤가 떠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지만.
“어머, 엘테르트 님께도 마음에 품은 분이 있으신가 봐요?”
“그렇지 않습니다.”
“얼굴이 붉으신걸요.”
“알디온 영애의 입담은 갈수록 느는군요. 제 어머님께서도 영애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밌다 하셨죠.”
말머리를 돌리자는 뜻이 훤했다. 밀레나는 순순히 따랐다. 과찬이세요. 레이디 엘로나야말로 언변이 뛰어나신걸요.
엘테르트에게 그리는 사람이 있음은 분명했다. 둘의 격이 맞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룰 수 없는 사랑’ 하는 부분에서 움찔하는 걸 보았다. 엘테르트보다 차는 여자란 있을 수 없었다. 상대방 쪽이 기울 터였다.
‘이에샤 언니……, 는 아니겠지. 이건 과한 생각이야.’
오스터는 두 남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딸을 내보낼 때가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리를 피해 주고 싶기까지 했으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흠흠!” 하고 헛기침했다.
“밀레, 이만 가 보지 않겠느냐? 아비가 멘델린 경과 할 일이 많아서 말이다.”
“아, 제가 너무 앉아 있었나 봐요. 죄송해요, 아버지.”
“아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너랑 보내고 싶구나.”
밀레나가 드레스 자락을 잡았다. 소파에서 일어났다. 엘테르트에게 무릎을 굽혀 보였다. 흠잡을 데 없는 예법이었다. 엘테르트도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밀레나는 잰걸음으로 서재를 빠져나갔다. 한숨이 흘러넘쳤다. 아버지의 훼방이 예상보다 빨랐다. 오스터는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어쩐지 조용히 스콘만 먹는다 했다. 일을 끝내 버리고 식사가 하고 싶었으리라.
‘아버지, 제발 저 좀 그만 괴롭히세요. 도움이 안 될 거면 방해라도 마셔야죠.’
옛날이었다면 품지도 못했을 악심이 치밀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올리려고 쓰다가 이에샤가 등장하지 않는 편이라서 지루하실까 봐 그냥 일찍 올립니다...
적당히 잘라서 분량이 애매하네요...
지난편 후기로 적었듯 내일은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