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9 8. 낮게 나는 독수리 =========================
누군가는 멍청하다고 하리라. 엘테르트의 구애를 물리치다니, 주제를 모른다고 비웃음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이에샤는 초조와 후회를 떨어냈다. 멘델린 소공작의 염문 상대든, 연인이든 같았다. 이에샤 자신이 아니라 엘테르트가 주체 되어 유명해지는 것이었다. 언젠가 만난 노부인―헤리카 벨제아를 떠올렸다.
“나는 내 가치를 옆에 둔 남자의 이름으로 결정짓고 싶지 않아요.”
“앨저 경, 경도 나를…….”
“네. 당신도 알고 나도 알죠. 좋아해요, 멘델린 경. 하지만 그뿐이랍니다.”
엘테르트가 안타까이 손을 뻗었다. 이에샤는 비켜섰다. 잡혀 주지 않을 셈이었다. 엘테르트의 표정이 가슴을 찔렀지만, 다짐은 꿋꿋했다. 엘테르트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만했습니다. 경도 나와 같은 마음일 테니 당연히 함께해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난, 저는 멘델린 경의 그런 점에 끌렸어요. 반드시 해낼 수 있다는 마음가짐. 제가 기사 시험에서 떨어진 뒤로 잃어버린 거니까.”
“그렇습니까. 처음부터 앨저 경이 바란 건 사랑도 그늘도 아니었군요.”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지위와 재산, 용모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상에 공감한다 했었고, 자신감이 부럽다고 하였다. 엘테르트처럼 스스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꿈꾸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보챌 수 없었다.
“미안합니다. 괜한 얘기로 불편을 안겨 줘서.”
“……괜찮아요.”
“오늘처럼 당신이 곤란할 때는 돕겠습니다. 그 이상은 참견하려 들지 않을 테니 이까지 거절하진 말아 주십시오.”
이에샤는 엘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따뜻한 갈색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봄처럼 아름다운 청년에게 사랑받는다 깨달으니, ‘내가 뭐라고.’ 싶었다. 사촌끼리 어쩌면 이리도 닮았을까. 1년이 못되는 시간―일주일에서 보름씩 띄엄띄엄 만났을 따름이었다. 그만큼으로 자신을 그리는 루시온과 엘테르트가 생경스러웠다.
“그럼 전 역마차로 갈게요.”
“예. 정거장까지 바래다주겠습니다.”
“됐어요. 벌건 대낮에 브링어를 어떻게 할 놈이 있을까 봐? 멘델린 경은 바쁘잖습니까. 보던 일 마저 보세요.”
엘테르트가 출근하지 않은 것은 바깥일을 돌보는 날이기 때문일 터였다. 이에샤는 나름대로 엘테르트를 배려해 주었다. 엘테르트로서는 쌀쌀맞게만 느껴졌으나. 조금만 상냥하게 대해 줬으면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털었다. 이전에도 태도를 바꿔 보라고 했다가 경을 치지 않았는가. 제가 이에샤를 연모한다고, 이에샤가 제게 사근사근히 굴 까닭은 없었다.
“그럼 가겠습니다. 조심히 출근하십시오.”
“멘델린 경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일하시길. 우연이나마 만나서 좋았습니다.”
“저도…….”
이에샤는 답하기도 전에 뒤돌아섰다. 거리로 빠져나갔다. 삐거덕거리는 철문을 보며, 엘테르트는 멍해졌다. 여기가 보육원 앞마당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뺨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근사하지도 차분하지도 않은 곳에서―뛰놀던 아이들은 건물로 들어간 뒤였지만―연인이 되어 달라고 말하다니. 걷어차이지 않은 게 용했다.
‘그렇게 다급했었나.’
긴 숨을 몰아쉬었다. 이에샤만 얽히면 이성이 흐려졌다. 입맛이 썼다. 지나간 일은 별수 없었다. 궁리나 짜내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이에샤가 싫어하지 않는 선에서 뒷받침해 줄 수 있을까. 이에샤의 바람이 제국 제일의 기사라면, 엘테르트는 자신이 줄 수 있는 도움을 아끼지 않을 셈이었다.
스란은 놀랐다. 10시를 넘기고야 나타난 이에샤가, 사납게 대련을 청해 왔으므로. 투지가 만만해 보였다. 순찰을 내보내면 남자 여럿이 의료원으로 실려갈 성싶었다. 싫증을 삼켰다. “연무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답했다. 오전 수련을 마치고 들어온 참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다.
십여 분 뒤, 이에샤가 활동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깍지를 끼었다. 쭉 기지개했다. 한 번 쪼그리고 앉았다가 일어섰다. 몸풀기는 이만하면 되었다. 브링이 쌓인 몸은 언제라도 만전을 기할 수 있었다.
스란은 롱소드를 들었다. 아밍 소드가―이에샤의 보이지 않는 브링에―부러지고 검을 바꾸었다. 이에샤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아밍 소드에 매달릴 까닭은 없었다. 검술을 배울 때 받은 검이었고, 익숙하니 썼을 따름이었다. 장검으로 공격과 견제를 겸하고 단검으로 후속타를 노리는 검술은 변칙적이었다. 셈브리온만 상대해 온 이에샤에게는 재미있었다.
두 사람은 목검이나 수련용 검을 쓰지 않았다. 이에샤의 실력 덕분이었다. 이에샤는 다치지 않을 수도, 상대방을 다치지 않게 할 수도 있었다. 스란은 이에샤와 맞설 때마다 황당했다. 커다란 산을 앞둔 것만 같았다. 좌절감이 컸다.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모로 가도 목적지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겨 보고 싶었다.
예사로운 은빛 검에 새카만 검이 부딪쳤다. 몇 번을 보아도 특이했다. 희귀한 철을 두드려 만든 듯한 검은 스칠 때마다 선득선득했다.
“후우, 하! 오늘은 왜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평소보다, 큭! 밀어붙이시는군요!”
“그냥 마음이 복잡해서.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지각한 거랑도 관련 있는 겁니까? 하압!”
“뭐, 그렇지.”
헐떡거리는 스란과 달리 이에샤는 평온했다. 공격하기도 하고, 공격을 흘리기도 하며 대련을 이어 나갔다. 몸가짐이 춤추는 듯했다. 부드럽고 천천해 보였다. 실지 이에샤의 움직임은 호기로운데다가 눈으로 좇기도 힘들 만큼 재빨랐다.
한참 만에야 마음속이 가라앉았다. 대련을 마쳐도 될 듯싶었다. 스란의 검을 교묘하게 쳤다. 비틀거리게 한 다음 다리를 걸었다. 스란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에샤가 검을 거두었다. 스란은 짜증스레 검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졌습니다.”
“좋은 대련이었어.”
이에샤는 빙그레했다. 한바탕하고 나니 상쾌했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검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땅을 짚었다. 심호흡했다. 활엽수와 관목으로 에워싸인 연무장에는 풀 냄새가 감돌았다. 8월이었다. 나뭇잎에서 생명력이 뚝뚝 떨어지는 철. 몸은 더워도, 눈은 시원했다.
“……페리튼 경은 언제부터 나올까?”
“글쎄요.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까요.”
“아니야, 그 사람 속도 끝내줘. 재판 때도 얼마나 추진력이 좋았는지 몰라.”
재잘재잘 떠들었다. 스란은 자세를 책상다리로 바꾸었다. 수련이 끝나고 담소하는 일은 싫지 않았다. 암무에 있을 적에도 동료와 이러고는 했다. 이에샤는 서먹한 상관이었지만, 연무장에서만은 달랐다. 사무실에서 보지 못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에샤가 스란의 검들을 곁눈질했다. 롱소드는 석곡궁 연무장에 갖추어진 비품이었지만, 단검은 손때가 탔다. 오랫동안 써 온 물건이 틀림없었다.
“쭉 생각해 봤는데, 스란 경.”
“뭘 말입니까?”
“경, 혹시 용병이었어?”
스란은 입을 다물었다. 이에샤를 건너다보았다. 물음에 답하지는 않았다. 엉뚱히 되물었다.
“아는 용병이 있으십니까?”
“있어. 한 사람.”
“저도 용병이랑 아는 사이입니다. 십여 년 전에 용병 길드에서 잡일을 했거든요.”
이에샤는 눈을 빛냈다. 흥미로웠다. 용병 길드란 많은 나라에 자리했다. 대도시마다 지부를 세우고, 갖은 의뢰를 받아 주는 조직이었다. 타국 길드끼리 일감을 주고받기도 했다. 마스터는 다르지만 기능은 똑같았다. 협력하기가 쉬웠다. 델페레타에도 용병 길드가 있었다. 하나 정세가 평화로웠다. 지부도 용병도 많을 수가 없었다. 용병에 관해 물어보아도 셈브리온은 “너 같은 애가 알아서 좋을 게 없어요.” 하고 따돌리고는 했다.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용병 길드는 어떤 곳인데?”
“아는 용병이 있다지 않았습니까. 그쪽에 물으시면 될 걸.”
“안 가르쳐 주니까 이러지 않겠어? 그리고 은퇴한 지 오래된 사람이야.”
스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에샤의 질문 탓은 아니었다. 용병 길드와 관련해서는 좋은 기억이 드물었다. 용병에는 제국 기사보다 머저리 같은 남자가 많았다. 사람을 패 놓고 경비대가 나타나면, “내가 때리긴 했지만 내 잘못은 아니라고!” 하고 소리지르는 놈투성이였다. 돌이키자 한숨이 나왔다.
“귀족 나리께서 관심 둘 만한 곳이 아닙니다.”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이에샤가 투덜거렸다. 토라진 티가 뚜렷했다. 이렇게 생생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검을 휘두른 다음에나였다. 스란은 문득 아까워졌다. 이에샤가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끄는 때는 흔치 않았다.
“좋습니다. 몇 가지 얘기해 드리죠. 음, 일단 외국인이 많았습니다. 경비대나 관청에 민원을 넣기 어려우니 용병 길드에 해결을 맡기는 거죠. 주로 제국민에게 사기당한 돈을 돌려받아 달라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구질구질하네.”
“다른 나라 길드랑은 분위기가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제국에는 은패를 받은 용병도 거의 없다고 하니까요.”
“은패?”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용병의 호패란 대륙의 모든 길드에서 통하는 신분증을 일컬었다. 생김새는 나라마다 달랐지만, 주먹만 한 크기의 철판인 것은 같았다. 등급은 금패·은패·철패로 나누어졌다. 금패와 은패에는 도금을 했다. 그들은 국경선을 넘을 수도 있을 만큼 신뢰성을 띠었다. 금패쯤 되면 어느 나라든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은패를 받았다면 제법 뛰어난 용병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그렇게 드물지 않다는데, 델페레타는 용병이 설 자리가 적은 나라다 보니 대부분 철패라더군요. 조무래기 소굴이죠, 뭐.”
“그럼 금패는 얼마나 대단한 거지?”
“어차피 길드에서 내주는 물건이니 여러 평가 기준이 있겠지만, 브링어에 가까운 실력자가 아니면 꿈도 못 꾼다, 라고 어떤 놈이 말한 적 있습니다. 실제로 대륙을 통틀어도 몇 없다고 합니다.”
셈브리온은 금패를 받았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에샤에게 호패 이야기 따위는 들려주지 않았다. 어려서 길드의 허드렛일을 한 줄만 알았다. 용병이 되고 난 뒤의 삶은 어떠했을까? 셈브리온은 용병이었던 과거를 잊으려 용쓰는 것 같았다.
“그렇군. 아, 처음 하던 얘기로 돌아갈까? 경의 싸우는 방식이 어쩐지 용병 같다고 느껴서 물어본 거야.”
“그렇겠지요. 처음 검을 가르쳐 준 사람이 용병이니.”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용병 길드의 여급이 검을 쥘 계기가 그밖에 있었겠는가? 저처럼 용병을 스승으로 두었다니 묘할 따름이었다. 친밀감이 드는 듯도 했다.
“실력자였어?”
“전혀요. 제 또래의 외국인 남자애였는데, 어느 날 저더러 검을 가르쳐 주마 하더군요. 말도 잘 안 통하는데 손짓 발짓 섞어 무어라 무어라 하더니 목검을 내미는 게 아닙니까.”
“그거…….”
“아마도 절 좋아했던 거 같습니다.”
스란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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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페레타가 잘나가는 나라라서 그렇지(저는 약간 아편전쟁 이전의 중국에 신의 가호가 더해진 느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만 곳이 싸움판인 세계관입니다. 용병들이 매우 활발합니다...델페레타의 용병 길드는 기형적일 정도로 쪽을 못 씁니다...법률이나 치안 같은 게 워낙 철저히 닦여 있어서 칼싸움으로 뭘 해결하려 들면 잡혀가기 때문입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