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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88화 (88/164)

00088 8. 낮게 나는 독수리 =========================

델페레타 중부는 동서남북 지방에 견주면 작았다. 하지만 수도와 대도시 두 개, 여러 도회지와 마을로 이루어졌다. 소국(小國)만 하다고 해도 좋았다. 해신교 보육원은 몇몇 교구에만 있었다. 통틀면 스무 개 남짓하리라. 큰 수는 아니었지만, 적지도 않았다. 이에샤는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중부의 모든 보육원을? 멘델린 공작가가요?”

“가문과는 상관없습니다. 제 사비로 벌이는 일입니다.”

“그럴 만한 돈이 어디서 나오죠? 적자 안 납니까?”

“쓰는 속도보다 버는 속도가 빠르니 괜찮습니다.”

엘테르트는 태연하게 답했다. 엘테르트의 것인 동산과 부동산이 어마어마했다. 애버토스에게 받은 재산으로부터 시작했으나, 지키고 불린 이는 엘테르트였다. 이에샤는 서글퍼졌다. 사는 세상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스카프를 찾겠답시고 뛰어온 일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그까짓 물건, 엘테르트에게는 별것도 아니었을 텐데.

“앨저 경? 왜 그럽니까?”

엘테르트가 움직였다. 이에샤는 흠칫했다. 곱지만 가냘프지는 않은 손이 이에샤의 옆머리를 집었다.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달리느라 차림새가 흐트러진 채였다. 엘테르트는 반대쪽 머리카락도 똑같이 해 주었다. 손끝이 이에샤의 뺨을 스쳤다. 이에샤는 얼이 빠졌다.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

“급하게 온 모양인데, 여기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표정이 좋지 않군요.”

“후우! 여기 사는 애들한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러고 보니 아까 도둑이 어쩌고 했죠. 혹 손버릇 나쁜 아이라도 있는 겁니까?”

엘테르트는 빠르게 헤아려 냈다. 숨죽이던 수녀가 딸꾹질했다. 수긍이나 다름없었다. 엘테르트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이에샤는 숨기기도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멘델린 경이 선물해 준 스카프를 소매치기당했어요. 쫓으면서 떠드는 소리를 들어 보니 고아원에 의탁하는 애들 같길래 여기다, 한 거고요.”

“그렇군요.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입니까.”

수녀는 엘테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앨저 백작의 서슬이 가라앉아 다행이었다. 그러나 멘델린 소공작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엘테르트는 분기마다 해신교 대사원에 큰돈을 보냈다. 사원에서는 그를 보육원 규모에 따라 나눠주었다. 자신이 곧장 후원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사원과 보육원 사이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엘테르트 멘델린은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었다. 해신교에 헌금해, 교세를 떨치게 해 주는 큰손이기도 했다.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되었다.

“엘바 수녀.”

“예, 소공작님.”

“보아하니 범인을 아는 모양이군. 가서 물건을 돌려받아 오시오. 아이들을 직접 데려오지는 말고. 반성실에 몇 시간 가두는 거로 충분하오.”

수녀가 반색했다. 귀족을 상대로 도둑질을 했으니, 부모가 있는 아이라도 만금을 치렀을 터였다. 천애의 고아는 죽임당해도 도리 없었다. 엘테르트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동정심을 보인 모양이었다. 수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

“멘델린 경.”

“압니다.”

엘테르트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수녀는 멘델린이 용서했으니, 앨저 따위가 나서지 못하리라 여긴 듯했다. 이에샤는 모멸감을 느꼈다. 하나 엘테르트는 미소했다. 저는 비뚤어진 꼬마들을 지키기 위하여 이에샤를 저버릴 만큼 꽉 막히지 않았다.

“앨저 경한테도 만족스러울 방향으로 풀겠습니다.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일 처리를 넘겨주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왜 멘델린 경 얼굴을 보고 참아야 합니까?”

이에샤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엘테르트는 제 감정을 알아챘을까. 엘테르트의 감정도 티가 났으니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음을 인질 삼아 멋대로 구는 건 달갑지 않았다. 엘테르트와 어떠한 사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으므로.

“부탁입니다. 앨저 경을 위해서입니다.”

“저를요? 어째서?”

“경이 해신교 보육원에서 피를 보았다간 교단의 반감을 살지도 모릅니다. 기껏 얻어 낸 달신교와의 친교를 그르쳐서는 안 됩니다.”

엘테르트의 말대로였다. 해신교와 달신교는―교리도 방침도 달랐지만―같은 뿌리에서 갈라졌다. 쌍둥이처럼 서로를 뒷받침하는 관계였다. 달신교에서는 백화 기사단보다 해신교가 중할 터였다. 생각지도 못했다. 이에샤는 겸연한 기분이 되었다.

“또 앨저 경이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라고 해도, 뒷말은 나오게 마련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경은 입지가 너무 좁습니다. 어린아이를 해쳤다가 기사로서의 자질을 왈가왈부하는 치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렇군요. 제가 너무 섣불렀어요.”

“대신에…….”

보육원 건물에서 수녀와 원장 사제가 뛰어나왔다. 수녀는 고급스러운 스카프를 든 채였다. 이에샤의 생각이 들어맞았다. 소매치기는 이곳에 사는 녀석들이었다. 사제는 새하얀 옷이 구겨지는데도, 허리를 구부렸다. 엘테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제가 저를 향했기 때문이었다. 이에샤가 아니라.

“원장. 물건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앨저 백작이오만.”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백작님. 저희가 아이들을 잘 가르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문제가 된 아이들은 책임지고 엄하게 다스리겠습니다.”

“음?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잖소. 앨저 백작한테는 따로 보상해야 하고, 애들을 단속하지 못한 처벌도 따로 해야 옳소.”

“소공작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사제의 얼굴이 납덩이같아졌다. 수녀도 마찬가지였다.

이에샤는 손을 내뻗었다. 수녀가 어리둥절했다가, “아!” 하며 스카프를 건네주었다. 스카프를 집어 들었다.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어디가 상했을까 겁났다. 다행스럽게도 멀쩡했다. 팔아먹을 셈이었기에 마구 다루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에샤의 낯빛이 풀어졌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곁눈질했다. 제가 준 선물을 되찾고 기뻐하는 모습이 어여뻤다.

“우선 그 애들은 이곳의 형제 수도원으로 보내시오. 사환 노릇을 시키며 교화에 힘쓰도록 단단히 이르도록.”

“하, 한 아이는 아직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도둑질을 배울 만큼 머리가 자란 나이지.”

사제는 안타까움에 발만 굴렀다. 열한 살이 된 쪽이야 허드렛일쯤 해낼 수 있겠으나, 작은 쪽은 일렀다. 엘테르트를 거스를 수도 없었다. 보육원에서 유년기 아이들을 일꾼으로 내보낸 게 알려진다면 입방아에 오르내리리라.

“그리고 이 보육원만 다음 분기 후원금을 끊으라 전하겠소.”

“소공작님!”

“반성이 필요하잖소? 의지할 곳 없는 아이를 잘 가르쳐 세상으로 내보내야 할 시설이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일축하고 엘테르트는 생각에 잠겼다. 응징만 해서는 안 되었다. 두 아이의 죄로 다른 아이들까지 곤혹을 치르면 부조리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푸른 사자 성으로 이번 분기 자세한 예산안을 보내시오.”

“예? 어째서입니까?”

“갑자기 생활 수준이 떨어지면 아이들에게 못할 짓이니까. 내 살펴보고 한 분기 동안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식료품과 의복을 지급하겠소. 그렇더라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테니 안심하지는 마시오.”

이에샤는 멀거니 엘테르트를 보았다. 문제아를 벌하면서 바로잡도록 했고, 보육원에 책임도 물었다. 이에샤의 평판도 지켜 주었다. 무고한 아이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조치하기까지 했다. 모든 것이 빈틈없었다.

자신에게 엘테르트와 같은 지위, 재산이 주어졌더라도 이리할 수 있었을까?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이에샤도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었으리라. 하나 엘테르트처럼 분란을 풀어 나갈 능력까지 생겼을지는 몰랐다. 오스터 알디온 또한 부와 권력을 지녔으나, 천박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부러웠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에게 없는 것을 갖추었다. 부럽고, 두근거렸다. ‘이런 사람처럼 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과 ‘이런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부딪쳤다.

원장 사제와 수녀가 양손을 모았다. 고개를 숙였다. 성직자식 예를 갖추었다. 터덜터덜한 걸음걸이로 떠나갔다.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돌아보았다.

“앨저 경?”

“고맙습니다. 제 대신 문제를 잘 처리해 주셔서요.”

“아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앨저 경?”

“왜요?”

팔을 뻗었다. 이에샤의 손을 잡아챘다. 이에샤는 질겁했다. 뿌리치려 했으나, 제 힘을 떠올렸다. 평범한 사람은 다칠지도 몰랐다. 손가락이 얽히고설켰다. 엘테르트가 깍짓손을 단단히 붙들었다. 이에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 그럽니까? 손이 떨린다 싶더니, 차갑습니다. 어디 아픈 거 아닙니까?”

“제 손이 떨렸다고요?”

“예.”

이에샤는 인상을 썼다. 몰랐다. 제가 생각보다 낙담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붕붕 털었다. 연정도 선망도, 질투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손을 빼냈다. 엘테르트의 아귀힘은 이에샤에게 댈 바가 못되었다. 엘테르트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잠시 오한이 들었나 보네요. 괜찮습니다. 전 이제 에브라힐로 가야 해요. 소매치기를 쫓느라 엄청나게 지각해 버렸거든요.”

“아, 그렇다면 제 마차로 함께 가죠. 큰길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에샤는 거절하려 했다. 막힌 공간에서 엘테르트와 단둘이 앉는다니. 상상만 해도 갑갑했다. “됐어요.” 하고 뱉으려다가, 멈칫했다. 억울함이 솟았다. 왜 자신만 전전긍긍해야 하는가. 탐나는 것에 거리낌없이 손을 뻗을 수 있는 엘테르트가 얄미웠다.

“……좋아요. 감사히 받아들이죠.”

“저, 앨저 경. 혹시 내가 갑자기 손을 잡거나 해서 화났습니까?”

“화난 건 아니지만, 다음부터는 함부로 몸에 닿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저,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귀부인이니까요.”

속마음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불편했다. 이에샤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싫어했다. 끌리는 남자라 하더라도 살결을 부대끼기는 껄끄러웠다. 설레기는 했지만, 거리낌이 컸다. 엘테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답지 않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애처로운 눈빛을 띠었다. 시무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허락받고 닿겠습니다.”

이에샤는 황당해졌다. ‘다음부터는’의 뜻이 다르지 않은가. 못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은 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얼떨떨했다. 엘테르트도 저와 엮이기를 피하리라 내다보았다. 이 같은 태도는 뜻밖이었다. 무엇을 바라는 건지 몰랐다.

“멘델린 경. 역시 저 그냥 역마차를,”

“싫습니다.”

“예?”

엘테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이에샤가 피하려 하는 까닭은 알았다. 하나 엘테르트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제 쪽에서 염문에 주의하라고 타이르기도 했었으나, 이제는 달랐다. 에브라힐에서 이에샤의 처지를 깨달았으니까. 더는 거리를 두지 않을 셈이었다. 멘델린이라는 이름으로 이에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저랑 같이 가 주십시오. 앨저 경. 부탁입니다.”

“경, 도대체 왜 이래요, 며칠 전부터?”

“정말로 몰라서 그럽니까?”

이에샤의 눈꼬리가 바르르했다. 속눈썹을 쓰다듬어 보고 싶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뜨거운 물이 들어찬 욕조에 몸을 담그듯, 마음이 젖어들어 갔다. 열한 달―한 해에 못 미치는 시간 동안 애지중지하게 되었다.

“앨저 경, 나를 이용하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

“내가 가진 걸 당신의 장식처럼, 방패처럼, 무기처럼 써 주십시오. 내 곁에 있으면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이에샤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어질 말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엘테르트가 빨랐다. 염려하던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내 연인이 되어 주십시오.”

한숨이 입술을 비집었다. 피로가 몰려들었다. 이런 일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엘테르트가 눈부셨지만, 사랑스러웠지만, 욕심났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짜증이 났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곁에 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엘테르트의 품속에서 쉬고 싶지는 않았다.

“싫습니다.”

“앨저 경.”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멘델린 경. 하지만 그거 아시나요? 나는 남의 보호를 받고는 못 살아요.”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에샤의 낯빛은 굳건했다. 어느 때보다도. 이에샤가 “당신 곁으로 갈 수 없어요.” 하고 못박았다.

“나는 내 힘으로 제국에서 제일가는 기사가 될 겁니다.”

============================ 작품 후기 ============================

페미니즘에서조차 목이 터져라 외치는 여성의 소리보다 권위 있는 남성의 몇 마디가 파급력이 큰 게 참 언제나 씁쓸했습니다...하지만 그런 도움이라도 필요한 상황이고...근데 대체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왜 이따위지? 싶은 것도 사실이고...

이 소설은 그 부분에서부터 고민을 시작해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중립을 내세웠던 이상주의자 엘테르트가 남주인공이에요...완성된 주인공보다 성장하는 주인공 좋아합니다...엘테르트의 호의를 적당히 써먹지 못하는 이에샤도 서투르고, 이에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엘테르트도 서투르고...

두 녀석이 잘 타협해서 행복까지 골인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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