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6 8. 낮게 나는 독수리 =========================
상아색에 가까운 금발이 비를 맞았다. 빛깔이 짙어졌다. 곤혹스러웠다. 자신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으니 괜찮았다. 엘테르트까지 젖을 필요는 없었다. 이에샤는 덮개가 엘테르트 쪽으로 돌아가도록 손을 밀려 했다. 궂은비가 풍기는 추위 속에서, 체온이 느껴졌다. 흠칫했다.
“아, 미안해요. 우산을 돌려주려고 했어요. 당신 손, 을, 잡으려고 한 게 아니라…….”
말끝이 수그러들었다. 엘테르트의 눈빛이 따끔따끔했다. 간질간질한 듯도 했다.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내려다보았다. 팔을 뻗었다.
크고 섬세히 생긴 손이, 자그맣고 단단한 손을 쥐었다. 주먹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벗겨 냈다. 이에샤는 화들짝하면서도 엘테르트를 뿌리치지 못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오른 손바닥에 우산 손잡이를 옮겼다. 손가락을 그러모아 주었다. 이에샤는 멍한 낯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앨저 경이 비 맞는 모습을 보는 게 싫어서 이럽니다.”
“…….”
“갑시다.”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테르트는 비옷을 입지 않았다. 셔츠가 물을 먹었다. 몸에 달라붙었다. 비치는 피부는 살굿빛이었다. 이에샤는―언젠가처럼―‘망했다.’ 하고 떠올렸다. 제가 흠뻑 젖은 여인이 아름답다던 엽색꾼 희곡 주인공 같은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되도록 엘테르트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우산을 든 손이 떨렸다.
석곡궁에 다다랐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접어들었다. 빗방울이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엘테르트는 “이게 말로만 듣던 석곡궁 결계군요.” 하고 중얼거렸다. 비 오는 날에 찾아온 적이 없어서 처음 보았다.
축축한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거두어 모았다. 꽉 쥐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이마에서부터 뒤로 쓸어 넘겼다. 향유 대신 빗물로 고정된 올백 머리가 색다른 인상을 풍겼다. 이에샤는 우산을 접으며, 발끝을 보았다. 엘테르트를 쳐다보기가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앨저 경.”
“네, 네?”
“오전에 황태자 전하가 다녀가셨지요? 새로운 백화 기사 선발에는 저도 협력할 겁니다.”
“아, 예.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멘델린 경이랑 일하겠네요.”
엘테르트는 멈칫했다.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여인을 에스코트해 놓고 꺼낸 이야기가 일 관련이라니. 이에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황당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에샤는 태연하게 조잘거렸다. 그동안 요강 고안하느라 멘델린 경도 수고 많으셨어요. 엘테르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멘델린 경은 왜 거기 계셨던 거예요?”
“원래 정오부터 잠시 휴식을 갖곤 합니다. 산책 중이었습니다.”
“비 좋아하시나 보네요.”
무언가가 이상했다. 이에샤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앨저 경? 불러 보았으나 이에샤는 가만했다. “왜요?” 하고 대답했을 따름이었다. 엘테르트는 석곡궁으로 오는 십여 분 동안, 제가 실수라도 저질렀는지 생각했다.
이에샤는 손바닥으로 뺨을 두드렸다. 젖은 살결이 달라붙어 왔다. 뒤숭숭하던 속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데려다줘서 감사해요. 경은 저 같은 여자도 레이디 취급을 해 주시네요. 그다지 필요는 없지만요.”
“아닙니다. 감히 브링어를 지켜 주겠다느니 하는 생각을 품었을 리가요. 난 다만.”
엘테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혀가 깔깔했다. 떠오른 말을 뱉어도 될까. 이에샤가 오해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 그제야 이에샤가 의아한 눈길을 엘테르트에게 향했다. 시선이 얽혔다. 엘테르트는 저도 모르게 털어놓고 말았다.
“앨저 경이 걱정돼서.”
“뭐가요? 말 안 듣고 계속 비 맞으면서 다닐까 봐? 그 정도로 막무가내 아니에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허둥거렸다. 스스로도 무얼 걱정했다는 건지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감기? 지나치게 날카로운 감각 탓에 느끼는 괴로움? 흙탕에 처박힌 손수건마저 주우려 들 만큼 성과를 올리는데 매달리는 절박함? 고개를 털었다. 정과 연정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마음이 한쪽으로 쏠리려 했다.
어설프게 둘러대었다.
“그냥 비 맞는 사람을 보면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순찰을 방해받은 거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그, 그런 건 아니에요. 멘델린 경은 왜 그렇게 제가 무슨 말만 하면 사과해요?”
“……그동안 지은 죄가 많아서 지레 찔리나 봅니다.”
이에샤는 할 말을 잊었다. 엘테르트가 실수할 때마다 쥐 잡듯이 잡은 것은 자신이었다. 버릇처럼 사과하지 말라고 해 보아야 설득력 없었다.
“아, 그렇지. 앨저 경한테 전달 사항이 둘 있습니다.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군요.”
“전달 사항이요?”
엘테르트는 페리튼 자작가로 간 편지를 떠올렸다. 속달로 부쳤으니 사흘이면 도착할 터였다. 네세라의 행동력은 무시무시했다. 8월 상순이면 입궁할 성싶었다. 기사단장인 이에샤와 상의하지 않고 결정지어 멋쩍었지만, 크게 문제 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네세라 페리튼 자작 영애라고 아십니까? 기즈의 재판 때 증인으로 섰다던데.”
“물론 알아요. 멘델린 경도 페리튼 영애하고 아는 사이였어요?”
“일전에 한 번 만났습니다. 그녀가 강력하게 원해서 방금 새로운 백화 기사로 받아들이겠다는 통지를 보냈습니다. 내력을 들으니 능력도 출중하고, 귀중한 자원자니까요.”
이에샤는 생각에 잠겼다. 네세라의 입단이라면 바라던 바였다. 시험도 없이 엘테르트가 넣어 준다니, 환영할 일이었다. 스란에게 듣자 하니 네세라는 백화 기사단에 정해진 방침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관해서도 자세하게 듣고 싶었다. 잘되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요. 또 사람이 늘어난다니. 이제 슬슬 미엘라도 독방을 줘야겠습니다. 휴게실도 마련하고요. 지금은 모든 일을 내 사무실에서 해결하는 판이니까.”
“총무부에 요청하십시오. 나중에 내가 백화 기사단 일을 우선 봐주라고 일러 놓겠습니다.”
“권력이 좋긴 좋네요.”
썩어 빠진 권력자 같은 표현이었다. 엘테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할 이야기가 남았다. 8월까지 사흘을 앞둔 채였다.
“그리고 8월부터는 하계 정복을 입고 출근하십시오.”
“아, 하복이 나와요?”
“예. 동계 정복을 만들 때 재 둔 치수대로 세 사람의 옷이 완성됐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자택에 배달될 겁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나야 추위도 더위도 별로 안 타지만, 올센 경이랑 스란 경은 더워 보였거든요.”
이에샤가 투덜거렸다. 제국 기사단은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백화 기사단과 달라, 정복 착용이 의무가 아니었다. 사사롭게 입고 다녀도 괜찮았다. 하인·하녀에게도 얇은 옷감으로 지은 옷이 있게 마련이었다. 백화 기사들만 겨울옷으로 고생하던 차였다. 참으로 달가웠다.
“미처 신경을 기울이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멘델린 경 바쁘신 거 아는데 말 꺼내기도 좀 그랬어요. 음, 더 하실 말씀 있나요?”
엘테르트는 “이제 됐습니다.” 하고 답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눈빛에 뜻이 뚜렷했다. 그럼 가라. 엘테르트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석곡궁을 떠나기가 싫었다. 이에샤와 더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에샤에게는 아쉬움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듯이 보이기까지 했다. 섭섭해졌다. 자주 찾아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방해꾼 취급인가.
엘테르트의 짐작과 달리, 이에샤는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젖은 얼굴로 눈길이 가서 난처했다. 반질반질하는 살갗이나 입술을 만져 보고 싶었다. 루시온을 대할 때는 이러지 않았다. 사람이 바뀌었다고 설레는 마음에 어이가 없었다. 이성을 흐리는 격렬한 감정을 혐오하는 이에샤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순조롭게 정리되어 갔는데, 말아먹었다. 엘테르트 때문이었다. 손가락을 차근차근히 풀어내 우산대를 쥐여 주던 행동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그랬단 말인가. 도대체 어찌하여.
“……들어가서 몸을 말리고 싶어요. 계속 젖은 채로 이러고 있으니 찝찝하네요.”
“아, 그,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돌아가야겠군요.”
이에샤는 망설였다. 비는 그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우비가 없는 엘테르트에게 우산을 돌려줘야 했다. 어떻게 건네야 할지 몰랐다. 평상시라면 잘 썼다고 인사하며 넘겼겠지만, 아까 일 때문에 겸연했다. 떠안듯이 받은 물건을 돌려주면서는 무어라고 해야 할까.
한숨을 내쉬었다.
“멘델린 경.”
“예?”
“비 맞지 마세요. 멘델린 경 말마따나 걱정되니까.”
그렇게 말하며 우산을 내밀었다. 엘테르트는 주춤주춤 받아 들었다. 이에샤는 머리만 꾸벅했다. 고위 관료에게는 예를 차려야 마땅했으나 피곤했다. 엘테르트라면 좀 까불어도 눈감아 주리라는 까닭 모를 믿음도 있었다. 계단을 올랐다. 석곡궁의 현관문을 지나쳤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힘이 풀렸다. 이에샤는 쪼그리고 앉았다. 비옷 차림 그대로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자기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작게 씹어뱉었다.
“망할.”
벌떡 일어났다. 몸을 말리고, 옷을 갈아입는 일은 미루어 두기로 했다. 어차피 젖은 터였다. 거칠 것이 없었다. 칼자루를 어루만졌다. 복도를 걸어갔다. 연무장으로 나가는 샛문이 보였다. 빗속일지라도 검이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