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8. 낮게 나는 독수리 =========================
이에샤는 짧은 숨을 터뜨렸다. 루시온의 호의가 진득했다. 당황스러웠다. 사랑받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셈브리온의 지독하도록 너그러운 애정이 아닌, 염정이 서린 눈길은 낯설었다. 제가 엘테르트를 볼 때도 이러할까? 생각하자 오싹해졌다. 시시각각 바뀌는 안색을 보며 루시온은 씁쓸한 심정이 되었다.
“제발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 맹세하지, 절대로 경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하, 제가 전하께 보답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바라지 않는다니까?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그대의 뜻인 걸 왜 몰라.”
이에샤의 머리가 기울어졌다. 루시온은 얼굴을 내렸다. 팔 속에 묻었다. 차이고 아무렇지도 않을 턱이 없었다. 표정을 감추었다.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음을 받은 만큼 반드시 돌려줄 필요는 없어. 사람은 결국 개인이야. 자기가 필요하다 느끼는 교감만 하면 돼. 정말이지 사람살이에 서투르구나, 그대.”
“죄,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앨저 경이 부담이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고. 나는 개의치 말고 그대에게 소중한 사람한테 충실하도록.”
이에샤도 알아들었다. 루시온은 저를 존중하겠다는 것이었다. 연인 자리를 강요할 수도 있을 텐데. 먹먹해졌다. 좋은 사람이었다.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지만, 흉이 지더라도 아물게나마 애써 주었다. 언젠가 황태자를 좋아하게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겼었다. 지금은 루시온에게 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하도 제게…….”
“쉿.”
루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파란 눈동자에 이에샤가 담겼다. 반듯한 이목구비가 비뚤어졌다. 웃는 듯했다. 우는 듯도 했다. 기묘하게 찡그린 낯으로, 루시온은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어디가 좋은 걸까. 스스로도 꼬집기 힘들었다. 재미있고, 재주를 갖추었고, 이야기가 통해서? 좋아한다고 말해 주어서? 생김새가 예쁘장해서? 이따금 지레 포기하고 기죽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계기는 상관없었다. 물꼬가 트인 감정은 순식간에 깊어졌다. 이제는 목마르게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마.”
“어째서,”
“누가 들으면 큰일 나잖아.”
얼버무려 버렸다. 이에샤에게 소중하다는 말을 들으면 참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이에샤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지만, “조심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루시온은 몸을 일으켰다. 전할 바는 전했다. 그리워한 만큼 얼굴도 보았다. 떠나야 했다. 자신이 5분 자리를 비울 때마다 엘테르트와 보좌관들의 수명도 줄어들리라. 벽의 돌기에서 망토를 거두었다. 우산을 집어 들었다. 어느덧 기름종이가 말랐다. 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하며 비옷을 둘렀다.
이에샤도 따라 일어났다. 주섬주섬 블라우스의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나오지 않아도 된다. 여름비라지만 춥다고.”
“전하께서 왕림하시기 전에도 밖에 있었잖습니까. 튼튼하니까 걱정 마십시오.”
“한 마디도 안 지지.”
루시온이 투덜거렸다. 이에샤는 루시온에게 다가붙었다. 지키듯이 앞몸을 가리고 섰다. 제법 태가 났다. 적이나 자객이 있을 리도 없건만, 기사의 자세가 몸에 배었다. 입단 시험 때는 천둥벌거숭이일 따름이었는데. 이에샤가 용쓴 결실이었으나 황태자의 뒷받침 덕분이기도 했다. 루시온은 뿌듯함을 느꼈다. 원석을 보석으로 갈아 나가는 일이란 즐거웠다.
“그럼 배웅을 받아 볼까. 에스코트 받는 레이디라도 된 기분이군.”
“…….”
“그런 표정 짓지 마. 내가 실언했다.”
이에샤는 불경한 티를 갈무리했다. 레이디 루시온이라니. 해괴해서 눈빛이 차가워지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루시온은 어설프게 웃었다. 이에샤의 사교성은 유감스러웠다. 농담이 통하지 않았다.
추적거리는 소리가 그득했다. 엘테르트는 일에 파묻혔다. 엘테르트의 집중력은 교향곡이 울리는 연회장에서 서류를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우중충한 날씨 따위 문젯거리도 아니었다. 익은 손놀림으로 총무부의 보고서에 서명했다. 외무부와 재무부가 보낸 각국의 공물 일람을 대조했다. 법무부에서 올라온 범죄율과 죄질, 형량 등의 통계표를 읽었다. 유년기부터 아버지를 거들어 온 터였다. 스물한 살의 청년은 이미 노련한 관료였다.
종이 다발을 끌어왔다. 공문서는 아니었다. 사사로운 서찰이었으나, 일에 관련한 것이었다. 마지막 줄에 보낸 이의 이름이 적혔다. 페리튼 자작 영애 네세라. 엘테르트는 집게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당당하던 네세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웃음이 나왔다. 네세라라면 이에샤에게 큰 도움을 주리라는 믿음이 들었다.
페리튼 자작가는 가난하지 않았다. 네세라가 물려받을 집안도 아니었다. 오늘내일하는 자작 대신 네세라가 살림을 돌보았지만, 자작이 고른 후계자는 열여섯 살 난 아들이었다. 남동생이 성년이 되면 물러나야 했다. 네세라 페리튼은 백화 기사 선발 대상에 들지 못했다.
이바노 후작―엘테르트처럼 송악궁에 사무실을 가진―에게 선발 요강을 들은 네세라는 멘델린 공작가로 편지를 보냈다. 종이 다섯 장에 내력이 빼곡했다. 달신교 신도로서 베풀었던 봉사, 얼마나 많은 여자의 아픔을 지켜보았는지, 어떠한 대처 방안을 익혔는지……. 엘테르트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주장대로 네세라는 백화 기사단에 알맞는 인재였다. 백화 기사가 되기 위하여 살아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또 놀라운 점이 있었다.
“일을 하는 여성이라…….”
편지에는 평민 여성의 삶이 고스란했다. 네세라가 보듬어 온 여자에는 여러 가지 곡절로 가족의 생계를 도맡은 이가 많았다. 그들은 남자처럼 바지를 입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벌목꾼이나 노역자로 일하기까지 했다. 엘테르트는 몰랐다. 여성의 노동이라고 해 봐야 여급이나 바느질꾼 정도일 줄로 알았다. 하지만 네세라는 남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훨씬 치열하게 일하는 여자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들이 마땅한 품삯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이바노 후작도 백화 기사단의 방침까지는 몰랐다. 네세라는 봉급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백화 기사가 제국 기사와 같은 돈을 받으리라고만 여겼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였다. 백화 기사단의 기틀을 짜신 분이 황태자 전하와 멘델린 경이라고 들었습니다. 남녀의 임금에 차별을 두지 않으신 점에 저는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엘테르트는 깊은 부조리를 깨달았다. 두 기사단을 동등하게 대했을 뿐이었다. 감사받을 일이 아니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돈을 주려 하지 않는단 말이지.”
무른 채소나 오래된 곡식이라도 던져 주면 나은 편이었다. 남자에게는 꼬박꼬박 삯을 주면서 여자에게는 차일피일하는 치가 흔하다고 했다. 그들이 내세우는 까닭은 이러했다. 여자는 남자처럼 제대로 일하지 못한다. 보수는 가당치 않다. 엘테르트는 피식, 입술을 터뜨렸다. 이에샤와 두 백화 기사를 보아 온 엘테르트로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무능하다는 말에 비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네세라는 자신이 백화 기사단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만 부르짖었으나, 엘테르트는 네세라의 참뜻을 꿰뚫어 보았다. 그것은 라제카의 바람과도 상통했다.
‘에브라힐 바깥으로 제도의 확장을 노리는군.’
아니라면 평민을 구제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까닭이 없었다. 네세라는 백화 기사단의 소임을 ‘황궁 여인의 수호’에서 ‘여인의 수호’로 넓히려는 것이었다. 백화 기사는 라제카의 숙원이기도 했지만, 루시온이 이에샤를 얻고자 무리하여 만든 자리였다. 영역을 늘리기에는 일렀다. 그러나 뛰어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엘테르트의 이상과 같이.
이에샤를 떠올렸다. 어려움에 빠진 여인을 찾겠다고, 온 황궁을 뛰어다니는 백화 기사단장. 성과를 올리겠다는 욕구로부터 비롯한 행동이었다. 그 자기중심적인 노력이 황궁 여인들을 안전하게 만들었다. 무뢰한 같은 기사나 관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에샤 한 사람의 발버둥으로도 고래등 같은 에브라힐 궁전이 바뀌어 갔다.
네세라의 포부에도 걸어 볼 가치가 있었다. 네세라는 엘테르트가 아끼는 이를 위해서라도 놓쳐서는 안 될 인재였다. 네세라라면 이에샤를 바른길로 이끌어 줄 것이다. 엘테르트는 재주 가진 사람이라면 탐내고 보는 루시온을 조금 이해했다.
“그래, 좋지.”
책상 서랍을 열었다. 편지지를 꺼냈다. 잉크병에 깃펜을 담갔다. 글을 써 내려갔다. 미사여구로 이루어진 겉치레 끝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냈다.
「준비를 갖추는 대로 백화 기사로서 입궁하십시오. 이 편지를 부치는 즉시 귀녀에게 백화 기사 작위를 내리고 정복을 준비하겠습니다.」
중앙 종탑의 종이 열두 번 울었다. 엘테르트는 보좌관에게 황궁 집배국으로 가, 이런저런 서찰을 부치도록 시켰다. 일상적인 일이었다. 다만 오늘은 ‘페리튼 자작가, 네세라 영애’라고 적힌 편지를 속달로 보내라 일렀다.
정오부터 20분은 쉬는 시간이었다. 옛날에는 과로로 쓰러질 때까지 일했다. 엘로나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고는 했다. 엘로나가 울면 애버토스의 눈총이 뒤따랐다. 쉬엄쉬엄할 수밖에 없었다. 멘델린 공작 부부는 아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금실이 좋았다.
산책을 나섰다. 우산대를 붙잡고 걸었다. 빗물이 기름을 먹인 종이에 쏟아졌다. 오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궂으니 당연했다. 비 오는 날은 좋았다. 북적거리는 에브라힐의 소음이 자연음에 잦아들었으니까.
다리를 멈추었다. 앞쪽을 바라보았다. 젖어서 늘어진 회색 머리카락. 무지개가 선다는 여우비 속도 아닌데, 어떻게 생각하던 사람이 나타났을까. 비옷 차림으로도 후드는 눌러쓰지 않은 이에샤가 허리를 구부렸다. 어디가 아픈가 싶었다. 걱정이 솟았다.
“앨저 경!”
“어라? 멘델린 경. 안녕하세요.”
다행스럽게 이에샤는 멀쩡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내려다보던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귀부인이 쓸 법한 손수건이 뒹굴었다. 그것을 주우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이에샤가 머쓱하게 웃었다.
“누가 버린 건지 떨어뜨린 건지. 아까 순찰할 때는 없었거든요. 여자 물건 같으니까 주인을 찾아 줘야 하나 해서.”
“버렸을 겁니다. 아니, 떨어진 거겠지만 어차피 흙탕에 빠졌다고 줍지 않고 갔겠지요.”
“아하. 그렇군요.”
엘테르트는 정신을 차렸다. 빗방울이 이에샤의 머리와 얼굴을 때려 댔다. 우산을 기울였다. 작은 우산은 이에샤와 엘테르트, 어느 쪽의 몸도 반밖에 지켜 주지 못했다.
“왜 머리를 안 가린 겁니까. 다 젖었잖습니까.”
“갑갑해서요.”
“어린애도 아니고 갑갑하다고 비를 맞는 사람이 어디에,”
핀잔을 그만두었다. 이에샤가 물끄러미 쳐다보아 왔다. 반들반들한 이마가 희게 빛났다. 짙푸른 눈동자에 불만이 서렸다. 내가 또 뭘 잘못했나? 엘테르트는 안절부절못했다.
“멘델린 경. 브링어는 감각이 엄청나게 좋답니다.”
“갑자기 무슨…….”
“후드에 물방울 부딪치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져요. 너무 거슬리고 갑갑해서 그랬습니다. 기사가 되기 전에는 비 오는 날 외출 자체를 삼가서 몰랐는데.”
그런 괴로움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안타까워졌다. 우산은 사치품이었다. 만들기도 까다로웠고, 들기 번거롭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비옷만을 걸쳤다. 하나 이에샤에게는 우산이 필요할 듯했다. 엘테르트는 우산대를 완전히 이에샤 쪽으로 기울여 주었다. 이에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단 돌아갑시다. 석곡궁까지 바래다주겠습니다.”
============================ 작품 후기 ============================
몸이 너무 많이 안 좋아서 내일 하루 쉬겠습니다.
작품에서 궁금하신 점은 언제든지 코멘트로 달아 주시면 나중에 스포 안 되는 부분만 정리해서 답변하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 잠들기 전에 코멘트를 확인하고 들어온 질문에 관하여 덧붙입니다.
1. 세계관 내에서 우비는 기름종이로 만든 지우산 아니면 비옷(후드가 달린 망토) 정도인데, 후자의 경우에는 두꺼운 가죽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고 천에 기름을 먹여 만드는 경우도 있고 사용자의 처지에 따라 다양합니다. 이에샤는 황실 총무부에서 지급받은 비옷이라 제법 그럴싸한 기름옷입니다^^;
2. 음량으로만 따지면 우산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나 사방을 메운 빗소리 쪽이 소음이지만, 이에샤는 총체적으로 예민한 오감 탓에 후드를 썼을 시 머리와 귀 부분 천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촉각→소리를 유난히 거슬려 합니다(공감각). 이는 작가의 경험과 체험에 의존해서 쓴 묘사라, 타인에게 전달이 미흡할 수 있는 부분을 간과했습니다. 비축분이 없이 쓰다 보니 세밀한 검토가 힘들어서...^^; 후에 공감각 묘사를 덧붙이거나 보다 직관적인 설명으로 고치겠습니다.
3. '귀녀' 호칭 문제: 3인칭 시점의 서술이 아니라 캐릭터가 쓴 서간이라는 점을 헤아려 주세요.
+) 오전 11시, 2번 답변에서 말씀드린 대로 설명을 고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