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4 8. 낮게 나는 독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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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델페레타 중부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았다. 여름이면 강수량이 늘었다. 수도는 물난리 대비가 한창이었다. 배수로를 살펴보고, 높은 지대로 비상식량을 옮겼다. 일꾼들이 오가는 동안 경비를 서는 것은 제국 기사였다. 제국 기사단은 바빠졌다. 반면에 백화 기사단은 한가로웠다. 비 오는 날에 관광객이 있을 리 없었다. 물건을 상납하러 들어오는 평민도 적었다. 예약한 살롱이나 클럽도 무르는 마당이었다.
이에샤는 석곡궁의 정원으로 이어진 계단에 걸터앉았다. 무릎에 팔꿈치를 댔다.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태황태후가 비를 좋아했더랬다―여름에 접어들고야 알았다. 석곡궁 현관에는 우비 마법이 갖추어졌다. 일종의 결계였다. 이에샤는 머리 위에서 보이지 않는 막에 부딪쳐 튕겨 나가는 빗방울을 구경했다. 신비로웠다. 질리지가 않는 광경이었다. 눈이나 진눈깨비에는 묵묵한 것이 퍽 정교한 마법이라 했다.
비는 좋아하지 않았다. 수련할 수도 나무를 탈 수도 없었으므로. 하지만 백화 기사단장이 되고는 달가워졌다. 연무장에 나가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여도, 일이 줄어들지 않는가. 알디온에서 놀고먹을 적에는 여가의 귀중함을 몰랐다.
미엘라와 시더는 소일하는 중이었다. 스란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미엘라는 종잡기 힘든 사람이라고 두덜댔으나, 이에샤는 황궁 곳곳에 암무단원이 도사리는 줄 알았다. 모습을 숨기고 에브라힐을 지켜보는 그들은 석곡궁에 들어오기도 했다. 오늘도 그랬다. 스란은 옛 동료와 만나러 갔으리라.
심심했다.
‘세비 보고 싶다.’
멍하니 떠올렸다. 버릇처럼 하는 생각이었다. 셈브리온과 떨어지면 기본적으로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눈앞에 있어야만 안심되었다. 평소에도 불쑥불쑥 보고 싶어지니, 유별한 일은 아니었다. 셈브리온이 안다면 “네가 닭 쫓는 병아리냐.” 하고 핀잔할 성했다.
상념이 뜬구름처럼 흘렀다.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올랐다 치면 복잡한 검로로 바뀌고, 아침에 마주친 쫄딱 젖은 도둑고양이가 되는 식이었다. 떨어지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보았다. 지나치게 할 일이 없어도 탈이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석곡궁 앞을 지나는 사람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손님인 모양이었다. 입구를 통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쏴아아’하는 소음에 잠긴 가운데서도 이에샤의 감각은 날카로웠다. 벌떡 일어섰다. 비옷을 뒤집어쓰고 지우산을 든 청년이 걸어왔다. 새카만 망토에 수놓인 금빛 사자가 우아스러웠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동안 잘 지냈나? 일단 들어가지.”
루시온이 우산을 접었다. 망토를 끌러 벗었다. 하인을 거느렸다면 건네 주었겠지만, 홀몸이었다. 이에샤가 받아 들려 했다. 루시온은 “됐어.” 하고 물리쳤다. 빗길을 걸어온 자신이야 젖은 채여도, 보송보송 마른 이에샤의 몸에 물을 묻히고 싶지 않았다. 이에샤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리 주세요. 왜 저를 불경하게 만들려고 하십니까?”
“됐다니까. 보는 눈도 없는데 누가 그대를 탓하겠어? 으슬으슬하군. 차나 한 잔 줘.”
“지금 하녀를 찾겠습니다. 먼저 사무실로 가 계십시오.”
석곡궁 건물로 들어섰다. 루시온을 사무실로 보냈다. 주방으로 달려갔다. 오크통에 앉아서 다리를 까딱이는 미엘라가 보였다. 시더가 있는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미엘라가 바닥을 디뎠다. 앨저 경, 무슨 일이세요? 이에샤는 고개만 두리번거렸다.
“시더는? 없어?”
“빨래 널러 갔어요. 바깥에 못 너는 날이니 일찍 해야 한다고요.”
“이런.” 하고 중얼거렸다. 미엘라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에샤는 고민에 빠졌다. 미엘라를 쳐다보았다. 준귀족. 부엌일을 시킬 만한 지체가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차를 끓이기도 힘들었다. 밀레나라면 찻물을 알맞게 우리는 방법도 배웠겠으나, 이에샤는 하녀가 대충 올린 차를 받아 마신 적밖에 없었다.
“올센 경, 미안하지만 두 사람 분 다과를 준비해 줄래? 차는 우유 넣어서 진하게. 황태자 전하께서 왕림하셔서 그래.”
“예?!”
“추우시다니까 최대한 빨리 부탁해. 정말 미안!”
미엘라의 낯빛이 바랬다. 황태자에게 내갈 차라니. 하녀 일을 그만둔 지 넉 달이 지났다. 서향궁에 있을 때도 공주의 시중만 들었다. 막막했다. 명령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엘라가―보기에도 안쓰러운 모습으로―머리를 주억였다. 이에샤는 주방을 뛰쳐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향했다.
루시온은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벽에 건 망토에서 똑, 똑, 물방울이 떨어졌다. 기대어 둔 우산 밑의 양탄자가 젖어들었다.
“어쩌자고 이런 날에 혼자 오셨어요. 존체에 감기라도 들면 큰일입니다.”
“이런 날이니까 더 귀찮아. 남이 씌워 주는 우산 밑에서 걸으려면 굼벵이가 따로 없잖아. 오히려 그쪽이 감기 걸리기 쉽지 않겠어? 혼자서 빨리 오는 편이 낫지.”
“하오나.”
“앨저 경이 걱정해 주니 좋긴 하네.”
루시온이 빙그레했다. 이에샤는 말을 삼켰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루시온이 이에샤를 보는 눈길에는 찌르르한 빛이 흘렀다.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이에샤는 난감해졌다.
엘테르트를 향한 감정을 걷잡은 데에는 루시온의 덕도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상대에게 사랑받는 일이 얼마나 곤란한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제 어디가 황태자를 사로잡은 걸까. 루시온의 취향이 이상하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왜 그래?”
“아닙니다. 그보다 국무를 보실 시간이 아닌가요? 바쁘지 않으신지요?”
“에르디 고생시키고 온 건 아니니까 안심하라고.”
루시온이 장난스레 대꾸했다.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당혹스러웠다. 자기가 루시온을 염려해 줄 계제가 아니었다.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티가 나는 법일까? 루시온은 이에샤의 속에 누가 들었는지 아는 채였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연애든 친애든, 사람과 사귀기란 어려웠다.
“멘델린 경한테는 아무 생각 없어요. 용건이나 말씀하시죠.”
“차가운걸. 놀리려던 건 아니었어.”
사무실 문이 열렸다. 미엘라가 왜건을 밀고 들어왔다. 쟁반에 김이 오르는 찻잔 두 개와 슈가볼, 쿠키 접시가 놓였다. 다과를 책상에 옮겼다. 손가락이 떨렸다. 허리를 꾸벅하고 물러났다. 이에샤는 미엘라에게 ‘미안해.’ 하는 눈짓을 보냈다. 루시온이 찻잔을 들었다.
“좋은 소식이야.”
“달신교 관련입니까?”
“척하면 착이군. 달신교에서 공식적으로 백화 기사단과 친교를 맺겠다는 뜻을 밝혀 왔어. 달신교 행사에서 경호를 서거나, 뭐, 방금 들어온 기사 같은 경우엔 행정직으로 빌려줘도 되겠지. 거긴 늘 인력난에 시달리니까.”
“잘됐네요. 그나저나 인력난으로는 백화 기사단을 따를 곳이 없을 텐데요. 교단과 왕래하려면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이 셋뿐이어서야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그러지 않아도 그 얘기도 하려고.”
차를 두어 모금 마셨다. 찻물에 끓인 우유 듬뿍을 붓고, 생강도 넣은 듯싶었다. 나쁘지 않았다. 쿠키도 집었다. 한입에 털어 넣고는 “여기 간식 괜찮네.” 하고 칭찬했다.
“귀족 중 백화 기사 선발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에르디……, 멘델린 남작이랑 계속 의논해 왔어. 바르벨로샤의 의견도 참고했지.”
공적인 이야기였다. 말씨를 진지하게 바꾸었다. 이에샤도 앉은 자세를 고쳤다. 귀를 기울였다. 루시온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을 쓸 거야.”
“돈, 이요?”
“백화 평기사의 봉급을 제국 기사의 두 배로 올리는 거다. 물론 비밀에 부쳐서. 백화 기사 선발 공문은 주인이나 후계자가 여성이면서 납세액이 적은, 그러니까 여주인이 살림을 꾸려야 하는 빈곤한 가문에만 발송했어. 비밀 서약 조항을 넣고 내 직인을 찍었으니 새어 나갈 걱정은 없겠지.”
“돈이 간절한 여자들부터 포섭하는 겁니까?”
“그래. 별다른 관문은 없게 해. 백화 기사들이 한동안 기사단 업무를 도왔던 멘델린 남작과 협력해서 면접으로 적당히 뽑도록.”
이에샤는 생각에 잠겼다. 괜찮은 방법이었다. 이에샤 또한 저택조차 없는, 한 명뿐인 앨저의 적자였다. 같은 처지의 여자가 얼마나 어려울지 알았다. 저야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으니 나은 편이었다. 셈브리온도 있었다. 다른 사람은 드레스다 화장품이다, 돈 걱정이 마르지 않을 터였다. 제국 평기사 봉급의 곱절이라면 기사단장보다 조금 적은 정도였다. 매력적일 법했다.
“잘 통할지도 모르겠네요. 평판이 중요하다 해 봐야 먹고 사는 게 우선이니까.”
“예상하는 선발자는 다섯 명 미만이야. 자원도 적을 테고 거기서 실무에 도움될 인재는 더 적을 테니까. 대신 자원자에 한하여 붙든 떨어지든, 황실 지원으로 아카데미 하급생 과정의 교육을 시킬 거다.”
“전하!”
경악스러웠다. 파격이 지나쳤다. 아카데미 학생 1,000여 명 중 여자는 정확히 여든세 명이었다. 귀족의 딸이라면 얼마만큼 학식을 닦았지만―평민도 기초적인 공부는 할 수 있었다―고등 교육까지 시키는 일은 드물었다. 하물며 황립 아카데미 수준이라니.
“백화 기사단이 덩치를 불리려면 우선 선택의 폭부터 넓혀야 돼. 차근차근 추진해 나가자고.”
“저야 환영할 일이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반발이 엄청날 텐데요.”
“그대를 기사 시험에 넣으면서 치른 회의들을 생각하면 솔직히 골치 아파. 하지만 뭐, 에브라힐이 너무 오랫동안 남자로만 굴러오기는 했지.”
루시온이 눈을 빛냈다. 그동안 제가 골라 뽑은 사람에서 여자는 이에샤뿐이었다. 성에 차는 여자가 라제카와 이에샤밖에 없었다. 루시온은 날카롭고 공정한 통찰력을 갖추었다. 여성이 남성보다 뒤떨어지지 않으며, 활약할 자리가 주어지지 않아 왔을 뿐임을 알았다. 같은 기회를 베풀어 보고 싶었다. 키워봄 직한 인재가 두 배로 불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그래서, 우리의 앨저 경은 기분이 어떠신가?”
“예?”
“모두 라제카와 경으로부터 시작된 일이잖아.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도 이렇게 여성을 등용하려고 기를 쓰진 않았을 거야. 그대는 참으로 멋진 여자란 말이지.”
“가, 감사합니다. 기분, 기분……. 지금은 그냥 얼떨떨하네요. 전하랑 멘델린 경이 이렇게까지 도와주실 줄은 몰라서.”
“그대를 위해서라면 힘낼 수밖에.”
깜빡. 이에샤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루시온을 쳐다보았다.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매끄러운 상아에, 열성을 다해 정과 망치를 두드린 양 준수한 얼굴이라고. 이토록 잘난 남자가 왜 저에게 반했는가.
“전하, 저는.”
“아무것도 바라는 거 없어.”
루시온이 웃었다. 이에샤는 루시온의 뜻을 알아들었다. ‘말하지 말라.’ 하는 함구령이었다. 눈을 홉떴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를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
루시온은 윗몸을 내밀었다. 책상에 양팔을 얹고 엎드렸다. 이에샤를 올려다보았다.
“난 앨저 경을 제국 제일의 기사로 다듬을 수 있다면 족해.”
진심이었다. 루시온은 이에샤를 영예로운 자리에 올려놓고 싶었다. 그것이 황태자비―나아가 황후는 아니었다. 황제가 되었을 때, 신하로서 곁을 지켜 주었으면 했다. 이에샤가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취하려고 드느니 지기(知己)로 남는 쪽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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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연애에 한해서만 갑자기 눈치가 없어지는 내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알고 타는 썸이 좋습니다...그래서 주연 삼인방 모두 자기 감정에도 남의 감정에도 예민한 편입니다...눈새에게 내줄 비중은 없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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