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3 8. 낮게 나는 독수리 =========================
엘테르트는 잘라 말했다. 이에샤에게 ‘내 식은 잘못되었다.’ 하고 생각도록 한 이는 자신이었다. 제가 바로잡아 주어야 했다. 언젠가 했던 이야기를 돌이켜보았다.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멘델린의 이름으로 이에샤의 결백을 보증한 뒤에.
「난 무 자르듯 나눠 떨어지는 공정함이야말로 조화를 해친다고 믿습니다. 약자에게는 꿀을, 강자에게는 매질을. 그렇게 조율해 나가는 것이 멘델린의 방식입니다.」
애버토스의 가르침을 깨달았다고 믿어 왔다. 아니었다. 엘테르트는 ‘강자’와 ‘약자’를 잘못 이해했다. 여자가 남자보다 부조리한 처지인 줄은 알았다. 하나 이에샤에게는 무력이 있었다. 괜찮으리라 단정했다. 검술을 배웠으니까. 특별한 여자니까. 저보다 뒤떨어지는 남자를 굽어살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이에샤는 강자가 아니었는데.
이에샤는 몇 번이나 짓밟혔다. 호랑가시궁의 결계에 걸어 들어가는데도 말려 준 사람이 없었다. 황후를 지키고도 공을 가로채였다. 그 밖에도 숱한 일이 있었다. 브링이라는 힘을 지니고서도, ‘여기사’는 약자였다. 눈총 앞에 던져진 신세였다. 못하면 물어뜯기고 잘하면 무시당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엘테르트는 이에샤에게 참으라고 말했다.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난 지금도 이성과 말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내가 멘델린의 후계자인 덕에 쌓아 올릴 수 있었던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경한테 나와 같기를 강요해서는 안 됐는데.”
“아니에요. 저는, 멘델린 경이 옳다고 생각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자 기사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당신이 백날 검을 휘두르더라도 그들과 같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남아도는 힘을 내세우는 거고, 당신은 모자란 힘을 쥐어짜 싸우는 사람이니까요.”
“……그렇게 거창할 거 없다니까요…….”
입매를 둥글게 했다. 사실은 울고 싶었다. 쑥스러운 듯이 떨어진 이에샤의 고개가 안쓰러웠다. 도닥여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세상이 원반 모양이라면, 비스듬하게 기울었으리라. 안에 담긴 황금은 한쪽으로만 쏟아져 내렸다. 그를 맞은편에도 베풀려면 평행을 이루어야 했다. 엘테르트는 균형을 맞춘답시고 원반의 가운데에 섰다. 애버토스라면 위로 솟은 끄트머리에 서야 한다는 걸 알았을 터였다. 엘테르트는 아직 멀리 날지 못했다.
“앨저 경, 말했다시피 부탁이 있습니다.”
“으음, 제가 들어 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쉬운 일입니다.”
이에샤의 오른 가슴에서 빛나는 은 브로치가 눈에 띄었다. 얇은 스카프가 매달린 채였다. 선물한 물건을 지녀 주었다고 알자 즐거워졌다. 웃음이 나왔다. 이에샤는 멍하니 엘테르트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내 이상을 기억해 주십시오.”
“예?”
“내게 따르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앨저 경은 경의 방식대로,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이면 됩니다. 단지 내 꿈을 기억만 해 주십시오.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그런 세상이 찾아온다면.”
엘테르트가 이야기를 멈추었다. 숨을 들이마셨다. 바라는 낙원은 몇 백, 몇 천 년 뒤에도 어려울지 몰랐다. 현세에 기대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이에샤에게 말하고 싶었다. 저에게 공감해 준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괜찮다면 나와 함께해 주십시오.”
“뭐라고요?”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에샤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엘테르트의 부탁은 뜻을 모아 달라는 것이겠지만, 너무했다. 청혼처럼 들리지 않는가. 정리되어 가던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난감했다.
“이 얘기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시간을 빼앗아 미안합니다.”
엘테르트가 깍지 낀 손을 풀었다. 가볍게 털었다. 홀가분한 목소리로 마무리 지었다. 이에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는 됐대도요. 전 가끔 처음 만났을 때 껄렁껄렁하던 경이 꿈이었나 싶어요.”
“껄렁껄렁이라니.”
“틀린 말 했어요?”
실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과하고 부탁하려고 고민해 왔다니. 상상도 못 했다. 엘테르트와 같이, 이에샤의 속내도 산뜻해졌다. 선망하는 이와 다르게 무력에 기대야만 하는 제가 비참했었다. 그러나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틀리지 않았노라 말했다.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라고 해 주었다. 기뻤다.
감각을 곤두세웠다. 부엌 쪽에 누군가가 있는지 살폈다. 인기척 둘이 잡혔다. 시더와 미엘라이리라.
“멘델린 경.”
“예.”
“오늘은 차, 마시고 가실래요?”
“기꺼이. 감사합니다.”
이에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엘테르트가 잔잔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셈브리온은 생각에 잠겼다. 사나흘을 걸러 찾아오던 아고르가 이십여 일째 감감했다. 포기한 걸까? 시간이 없다고 했었다. 벨체터로 돌아갔는지도 몰랐다.
킬타로스의 죽음을 실감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다그쳐도 아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가자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숨이 새었다. 다른 동료들은 어찌 되었는지 몰랐다. 셈브리온과 가족처럼 자란 킬타로스, 아고르만은 위험한 일에 발을 들였음이 틀림없었다.
‘하긴, 내가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
쓰게 웃었다. 셈브리온은 벨체터 땅을 밟을 수조차 없는 몸이었다. 지옥 같은 곳이나마 조국에 사는 아고르가 저보다 나았다.
12년 전. 셈브리온은 내란을 끝내고 싶어 하는 청년이었다. 뛰어난 검술을 빼면 민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벨체터는 썩은 왕정과 새로운 지도자를 옹립하려는 귀족들로 갈라졌다. 셈브리온으로서는 누가 위에 앉아도 좋았다. 전쟁만 잦아든다면. 돈을 받고 왕당파나 귀족파에 들어서 싸우기도 했지만, 정견은 없었다. 어디든 빨리 이겨 달라는 마음뿐이었다.
벨체터의 왕자가 셈브리온을 찾으며 문제가 시작되었다. 셈브리온은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구슬림에, 왕당파에서 시키는 ‘어떤 일’을 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내란은 불타올랐다. 왕실은 쓸모를 다한 용병을 팽개쳐 버렸다. 셈브리온은 양측의 공적으로 몰렸다. 그렇게 도망친 곳이 델페레타였다. 혹시나 싶어 동료에게 숨기고 일을 처리한 것이 천운이었다. 아무도 휘말리지 않았으니.
그리고 이에샤를 만났다. 이에샤가 아니었다면 외로움을 이기지 못했으리라. 뜨내기로 사느니, 벨체터로 돌아가 쫓기기를 선택했을지도 몰랐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끈이었다. 여기저기에 배신당하고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붙잡아 주는 끈.
‘대체 왜 제국에 왔던 거지.’
셈브리온은 델페레타가 평화롭기를 바랐다. 이에샤는 ‘무너지지 않는 하늘탑’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깨끗하고 안락하게 살아야 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를 위해서라면 조국과도, 헤어진 동료들과도 척질 각오가 되었다.
끼익. 문 미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렸다. 머릿속에서 상념을 몰아냈다. 현관을 돌아보았다. 문틈으로 암청색 하늘이 비쳤다. 이에샤가 피곤한지 목을 주무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셈브리온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에샤에게로 날듯이 다가갔다.
“어서 와, 이-샤.”
“다녀왔어. 거실에서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있었어. 밥은 먹었지?”
“응. 당신도 안 굶었지?”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저녁 내내 고민하느라 끼니를 거르고 말았다. 이에샤의 양미간이 죄어들었다. 셈브리온은 어설프게 “아하하.” 하고 웃었다.
“내가 없다고 너무 막 지내는 거 아니야? 세비. 지난번 대련 때 보니까 검이 좀 느려졌던데.”
“이-샤의 실력이 늘었다는 생각은 왜 못 해? 말했잖아, 네 재능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런 말 들어 봐야, 내가 다른 브링어를 봤어야 말이지…….”
이에샤는 투덜투덜했다.
블라우스에서 브로치를 끌렀다. 스카프를 집었다. 귀퉁이에 수놓인 방패 무늬를 내려다보고, 샐쭉 웃었다. 셈브리온은 눈썹을 치켰다. 이에샤는 괜한 웃음이 적었다. 즐거울 때가 아니라면 찡그린 표정이 대부분이었다. 헤실헤실하는 꼴이 낯설었다. 불안이 피어올랐다. 이보르 센트라의 스카프는 문외한이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었다. 셈브리온은 ‘황태자의 하사품이라도 되나?’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샤. 아빠랑 얘기 좀 할까?”
“저녁을 안 먹은 게 아니라 잘못 먹었어?”
“됐고. 너 정말로 사귀는 남자 생긴 거 아니야?”
이에샤가 움찔했다. 셈브리온의 낯에 배신감이 번져 나갔다. 허둥지둥 고개를 털었다. 제가 좋아하는 엘테르트와 저를 좋아하는 루시온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남녀로서 오가는 상대 따위 없었다.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라니까.”
목소리에서 짜증이 배어났다. 셈브리온은 섭섭해졌다. 자신은 이에샤의 인간관계에 가타부타할 셈은 없었다. 황태자와 엮이는 건 걱정스러웠지만, 평범한 귀공자와 만난다면 바라는 바였다. 손을 뻗었다. 잿빛 머리카락을 헤집어 버렸다. 이에샤는 “하지 말래도.” 하면서도 물리치지 않았다.
“네가 귀찮다면 하는 수 없지만, 그래도 나중에 특별한 사람 생기면 나한테 꼭 소개해 줘야 한다.”
“실없는 소리. 나한테는 평생 세비뿐이야.”
‘그건 그거대로 막막한데.’
한숨이 흘러넘쳤다. 기뻐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몰랐다. 죽고 못 사는 친구도 사귀어 보고, 연애도 해 보고, 괜찮은 남자랑 혼삿말도 주고받고……. 정해진 틀대로 살면 좋을 터였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응석받이에서 벗어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에샤가 은 브로치와 스카프를 갈무리했다. 블라우스의 목둘레를 잡았다. 팔락팔락 흔들어 댔다. 더운 모양이었다. 나 들어가 볼게. 자기 방 쪽으로 돌아섰다. 셈브리온은 맥없이 팔을 흔들었다.
“잘 자, 제자님.”
“스승님도 좋은 밤.”
밤마다 벌레가 우는 철이었다. 8월까지 열흘이 남았다.
============================ 작품 후기 ============================
작품 시작 시점에서 752년 9월, 기사단 입단 시험이 12월,
753년 1월에 무도회, 3월에 스란과 미엘라 입단, 4월 초에 사냥 대회, 4월 말~6월 말까지 리타 밸리의 별 챕터, 7월 중순에 알드릭 재판...작중에 이따금 날짜가 나오는데,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있습니다ㅎㅎ
엘에샤 커플은 언제쯤 진도를 뺄지 모르겠네요...완결 전에 고백은 하겠죠...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