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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82화 (82/164)

00082 8. 낮게 나는 독수리 =========================

엘테르트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운 감정이 담뿍했다. 네세라는 신기로운 표정을 지었다. 멘델린 소공작이 혼기가 빠듯하도록 결혼하지 않은 일은 사교계의 오랜 관심거리였다. 남색자가 아니냐는 쑥덕질마저 나왔다―소문을 퍼뜨릴 귀족은 없었으나. 네세라는 신경을 끄고 살았다. 엘테르트의 인상은 남자치고 좋은 편이었으나, 그래 보아야 남자였다. 뒤로는 무슨 호박씨를 깔지 몰랐다. 하지만 엘테르트가 어느 여인을 떠올리는 모습은 가없이 정중했다. 입에 올리기조차 조심스러운 듯싶었다.

놀라기는 스란도 마찬가지였다. 보름여 만에 만난 엘테르트는 아름다워졌다. 본디도 훤칠한 청년이었지만, 분위기가 무르녹았다. 갈색 눈동자에 선량한 빛이 감돌았다. 몸가짐 하나하나에서 전보다 품위가 배어났다.

네세라는 부채 끄트머리로 입술을 두드렸다. 궁금증과 장난기가 피어올랐다.

“존경하는 여인이라. 제국의 지성이라는 멘델린 소공작께 그럴 만한 여자가 있다니 놀랍네요. 얼마나 학식이 고매하시길래? 아카데미 학생 중 여자가 100명도 안 되는데, 누구인지 궁금한걸요.”

“글쎄요. 높은 학식을 갖추었다 하긴 어렵습니다만.”

“어머나? 그럼 대체 어떤 분이시죠?”

엘테르트가 입꼬리를 추어올렸다. 수도사 같던 인상이 개구쟁이 소년처럼 바뀌었다. 네세라는 주춤했다.

“사람이 존경받을 길은 다양하지 않습니까. 글로, 기술로, 마음으로. 많은 이가 여성의 미덕이 양순함과 현숙함이라고 하지만, 페리튼 영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요.”

“…….”

“그녀도 웃음이 다소곳한 레이디는 아닙니다. 강하고 용맹한 사람입니다.”

말을 잊어버렸다. 제가 했던 이야기를 되돌려 받은 셈이었다. 여자도 남자와 같이 재주를 갖출 수 있다 내세워 놓고, 왜 내가 여자를 존경한다는 사실이 놀랍느냐. 더하여 여자에게도 남자처럼 숱한 가능성이 잠들었다는 인정이기도 했다. 네세라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엘테르트 멘델린은 담론에 뛰어났다.

“소공작의 말은 알아들었어요. 어쩐지 우린 잘 지낼 수 있을 거 같군요.”

“고맙습니다. 영애도 백화 기사가 된다면 종종 만나게 되겠지요.”

네세라가 눈을 치떴다. 엘테르트는 예사로이 물어보았다.

“아닙니까?”

“어떻게 아셨죠? 제가 백화 기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걸.”

“며칠 전 이바노 공이 백화 기사단 선발 요강을 묻더이다. 그한테는 딸도 질녀도 없지만, 페리튼 자작하고 사돈 관계이지 않습니까.”

이바노 후작은 페리튼 자작의 친구였다. 여동생의 시아주버니이기도 했다. 네세라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네세라는 이바노를 만나, 백화 기사단에 관하여 묻고자 황궁을 찾아왔다. 엘테르트의 추론에 혀가 내둘렸다.

“그리고 스란 경.”

엘테르트가 스란 쪽을 향했다. 스란은 긴장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나 스란이 싸움박질을 벌이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주의를 들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엘테르트는 웃을 따름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아서 다행이군. 혹여 다친 곳이 있다면 꼭 의사에게 보이도록.”

“아뇨, 전혀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늘 백화 기사로서 소임을 다하느라 고생하네.”

스란의 낯빛이 멍해졌다. 엘테르트는 더 말하지 않았다. 고개를 까딱했다. 몸을 돌렸다. 스란과 네세라가 지나온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에브라힐 궁전은 드넓었지만, 스란은 엘테르트가 석곡궁으로 가는 듯하다고 느꼈다.

이에샤는 연무장에 있었다. 서류 처리를 마쳤다. 오전 수련을 나온 터였다.

브링을 다루는 솜씨가 늘었다. 셈브리온에게는 미치지 못했으나 조바심치지 않기로 했다. 셈브리온은 제국 기사의 꼭대기인 체사로보다도 몇 수 위였다. 몰랐다뿐이지, 세계에서 손꼽는 강자가 틀림없었다. 그러한 이가 이에샤의 재능을 저보다 낫다 하였다. 언젠가는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당장 이에샤의 목표는 체사로를 앞지르는 것이었다. 지금도 겨룰 수야 있겠지만, 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체사로가 근위 기사단장 자리에 오른 까닭에는 됨됨이와 근면도 있었다. 실력으로만 따지면 2 기사단장이 나았다. 이에샤는 3 기사단장에게는 승리를 장담했다. 2 기사단장을 상대로는 아리송했다. 열 번 싸워 반은 질 성싶었다―셈브리온에게는 열에 일고여덟을 패했다. 갈 길이 멀었다.

검을 늘어뜨렸다.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적을 그려 보았다. 쉬는 날에는 셈브리온과 대련할 수 있었지만, 출근해서는 상대가 없었다. 스란으로는 모자랐다. 제국 기사단장들이 탐났다. 셈브리온이 아닌 브링어의 검술이 궁금했다. 3 기사단장에게 장갑을 던질 때만이 기다려졌다. 몸이 달았다.

반짝. 눈꺼풀에 덮였던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연무장 어귀에서 기척이 났으므로. 시선을 돌려 보았다.

“어머, 멘델린 경? 무슨 일로 왔어요?”

“……읏.”

엘테르트는 흠칫했다. 사방에 자욱한 이에샤의 브링이 느껴졌다. 손가락이 바들거렸다. 한숨이 넘쳐흘렀다. 이에샤가 저에게 브링을 쏘아 보내지 않을 줄 알면서도,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났다. 왼쪽 옆구리가 뜨끔거렸다. 이에샤와의 사이가 부드러워졌으니 괜찮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수련 중에 만나기는 일렀던 성싶었다.

“왜 그래요? 아.”

이에샤는 엘테르트가 브링어에게 죽을 뻔했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얼굴색이 심상치 않았다. 브링을 느낀다 말해도 추상적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땀방울이 돋은 이마라도 훔쳐 주고 싶었다.

“미, 미안합니다. 오늘이라면 괜찮을 줄 알아서 온 건데. 아니, 그러니까, 나, 나는…….”

엘테르트가 횡설수설했다.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듯싶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엘테르트에 관하여 알려 준 이가 본인이 아니라, 루시온이라는 게 생각났다.

“황태자 전하께 들었어요. 브링, 무―싫어한다면서요? 대놓고 말씀하신 건 아니고 살짝 귀띔만 해 주신 거니 나중에 뭐라 하지는 마시고요.”

이에샤는 ‘무서워한다.’ 하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표현을 고쳤다. 제국 기사를 비롯해, 남자란 하잘것없는 데에도 자존심을 세워 댔다. 엘테르트는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기분마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후우! 엘테르트가 숨결을 가라앉혔다. 입술을 깨물었다. 두어 발짝 뒷걸음질쳤다.

“죄송합니다. 여기, 의 공기가 갑갑해서. 앨저 경, 수련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자리를 옮길 수 있겠습니까?”

이에샤는 “알았어요.” 하고 답했다. 검을 허리 옆쪽에 매달려 했다. 문뜩 그만두었다. 허리띠를 앞으로 돌렸다. 검을 사선으로 걸고, 되돌렸다. 시커멓고 날카로운 롱소드가 등 뒤로 숨었다. 엘테르트는 눈에 띄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에샤가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돌포장에서 오솔길로 내디뎠다. 엘테르트는 움찔했으나 몸을 빼지는 않았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건물로 들어서는 샛문에 다다랐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미 안다니 털어놓는 거지만, 나는 브링어가 무섭습니다.”

“어어.”

“왜 그럽니까?”

“아니, 당신 입으로 무섭다고 할 줄은 몰랐어요. 뜻밖이네요.”

엘테르트는 의아해졌다. 이에샤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조금 뒤, 어째서인지 깨달았다. 약한 꼴을 들켜서 부끄럽기는 했다.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 아니겠습니다. 내가 브링어를 싫어한다고 말하면 앨저 경한테도 실례이고.”

“무섭다는 말은 뭐 좋은 말인가…….”

“그것도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나 자신이 한심합니다.”

이에샤는 당황했다. 거듭해서 사과해 오니 딱했다. 죽다 살아났다지 않았는가. 자신이 괴롭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손사래를 쳤다.

“사과하지 말아요. 브링에 당했었다면서요. 무서울 만도 하죠.”

“오늘은 앨저 경한테 멋있게 보이고 싶었는데, 처음부터 글러 먹었군요.”

“네?”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엘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엘테르트는 어리둥절했다. 무구한 낯빛만 띠었다. 이에샤의 뺨이 달아오르자, “아!” 하고 소리질렀다. 말이 헛나왔다. 아니, 지나치게 제대로 나왔다. 속내를 생짜로 끄집어내 버렸다. 브링이 충격이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아니! 앨저 경한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고 싶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쭉 고민하던 말을 하려고 마음먹고 왔으니까.”

“그, 그래요. 멘델린 경 의외로 사람 놀래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제발 잊어 주십시오.”

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에샤도 따끈따끈한 얼굴을 내렸다. 입을 다물었다. 이내 “푸훗!” 하고 웃어 버렸다. 빈틈없던 몸가짐이 흐트러지다니. 친근감이 들었다. 귀엽기도 했다.

실내 복도로 접어들었다. 두 사람은 신호를 주고받지 않고도 사무실 쪽으로 향해 갔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찾아오셨는데요?”

“음.”

엘테르트는 고심했다. 늘어놓을 이야기는, 이에샤로서는 생뚱할지도 모르는 내용이었다. 하나 전하고 싶었다. 낱말을 골랐다. 실수하지 않도록. 이에샤가 문고리를 쥐었다. 비틀어 밀었다. 사무실은 빈 채였다. 미엘라는 시더에게 간 성싶었다. 잘되었다.

“앨저 경한테 사과, 그리고,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엘테르트는 응접 소파에 앉았다. 자세를 반듯하게 했다. 손깍지를 끼었다. 허벅지 위로 얹었다. 이에샤도 자기 자리에 엉덩이를 내렸다. 고개를 기울였다. 엘테르트의 잘못을 떠올려 보았지만, 짚이는 일이 없었다. 엘테르트가 말을 이었다.

“내 그동안 백화 기사단에 지나친 간섭을 했다고 깨달았습니다. 여성 기사단의 특수성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 방침을 강요해 왔습니다. 사죄드립니다.”

“멘델린 경? 갑자기 무슨…….”

“한동안 계속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여인에게 사내와 같은 잣대를, 같은 조건을 들이밀어도 되는가.”

이에샤는 눈을 끔뻑했다. 엘테르트가 굽히고 드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꺼내는 말도 알쏭달쏭했다. 설명이 필요했다. 셋째 손끝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영문 모르게 뱃속이 근지러웠다. 견디기 어려웠다.

“죄송합니다만 멘델린 경, 저는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겠습니다.”

“뜬금없으리라는 거 압니다. 단지, 기억합니까? 내가 옛날에 앨저 경을 보기만 해도 눈살 찌푸리던 거.”

“그걸 까먹으면 인간적으로 문제 있는 거죠. 뭐, 제가 브링어라서 그런 거였잖아요?”

엘테르트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면 이로울지도 몰랐다. 괴로운 기억 때문에 거리꼈을 뿐이라고. 다른 이유라고는 없었다고. 이에샤의 심기도 불편해지지 않으리라. 마음을 가다듬었다. 해이해져서는 안 되었다.

“아뇨. 기사로 입궁한 당신이 남자들을 무력으로 굴복시켰기 때문입니다.”

“…….”

“난 앨저 경을 힘자랑하는 무뢰배와 같이 보았습니다. 경의 해결 방식을 혐오했습니다.”

빛깔 엷은 금발이 아래로 드리워졌다. 이에샤는 숙어진 머리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해하지 못했다. 엘테르트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제 성정은 폭력적이었다. 문젯거리를 힘으로 눌러 덮으려 들었다. 얼마 전에도 브링으로 오스터 알디온을 을러멨었다. 엘테르트에 견주면 자신은 짐승과 같았다. 그렇더라도 ‘혐오’라는 적나라한 표현에 가슴 아팠다. 서글펐다.

“멘델린 경, 그, 제가 막돼먹은 인간인 건 스스로도 알거든요. 사과할 필요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 작품 후기 ============================

지난편에서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존경하는 여인'으로 표현한 부분에 대하여 덧붙입니다. 작가는 남녀 성차별에 반대하지만, 생물학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엘테르트는 '여자이지만 존경한다'가 아니라 '존경하는 (여자)사람'이라는 뜻으로 이에샤를 여인으로 지칭했으며, 재인/재녀, 기사/여기사 등과는 맥락이 다르다는 걸 알아 주세요. 전달력이 미흡해서 죄송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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