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1 8. 낮게 나는 독수리 =========================
네세라는 접은 부채를 움켜쥐었다. 가슴 깊숙이에서 우러나오는 혐오감이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달려갈 듯한 기세였다. 스란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네세라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만두면 소녀를 희롱하는 기사의 뺨이라도 올려붙일 것 같았으므로. 네세라는 스란의 걱정처럼 섣부르지 않았다. 뾰족한 눈초리로 스란을 흘겼다.
“이럴 땐 어쩌죠?”
“어쩌다니요?”
“백화 기사단은 저런 일을 방지하지 위한 곳이잖아요. 행동 지침 같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스란의 말문이 막혔다. 지침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스란과 이에샤는 여성이 괴롭힘당하는 꼴을 보면, 달려들어 싸웠을 따름이었다. 이에샤는 감봉권을 지녔다. 둥글게 둥글게 넘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스란은 핏대를 세울 때가 잦았다.
백화 기사가 된 날, 이에샤가 우리의 일이 무언지 아느냐 물었다. 스란은 “예비 강간범 놈들과 결투를 벌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하고 답했었다. 진심이었다. 모르는 여자를 가로막고 어디로 가느냐, 길을 가르쳐 주겠다, 시간 있면 이야기 좀 나누자 들러붙는 놈들은 잠재적 강간범과 다름없었다. 청하지 않은 호의를 베풀며 보상을 바라는 짓에서부터 폭거 아닌가. 수틀리면 어찌할지 몰랐다. 스란은 그렇게 믿었으므로, 눈에 걸리는 제국 기사들과 격렬하게 다투어 왔다.
제 생각이 극단적인 줄은 알았다. 네세라 같은 아가씨에게 털어놓아 보아야 이해받지 못하리라. 네세라의 서슬이 예사롭지 않기는 했지만 귀족 여자였다. 농민 소녀보다야 귀족―적어도 준귀족―인 기사의 손을 들어 줄 것이 뻔했다. 스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해진 지침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죠. 송악궁은 조금만 직진하시면 나올 겁니다. 저는 일을 해야겠으니…….”
“여기서 지켜보겠어요.”
“예?”
“말했잖아요, 나도 백화 기사가 되고 싶다고. 실무를 견학할 기회는 흔치 않으니 보게 해 줘요. 지침이 없단 소리가 신경 쓰이기도 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십시오.” 하고 말았다. 자신은 네세라에게 무례를 저지른 뒤였다. 계속해서 귀족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경을 칠지도 몰랐다. 이오르가 스란을 아낀다 해도 세상 모르고 설칠 수야 없었다.
스란은 걸음나비를 넓게 했다. 기사와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말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공방이었다. 주방에는 이미 들렀어요. 안내해 주시지 않아도 돼요. 그럼 궐문까지 바래다주마.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내가 뭐 안 좋은 일이라도 할까 봐? 왜 그렇게 거부하지? 지금 기사를 못 믿겠다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나리. 하지만 정말로 괜찮아요. 폐를 끼치지 않아도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짜증이 치밀었다. 소녀는 싫다는 소리조차 못 하고 발만 굴렀다. 손이라도 붙잡힐까 봐 전전긍긍하는 속내가 훤했다.
스란은 암무단원이 되기 전에 비슷한 광경을 자주 보았다. 식당을 겸하는 여관에서 일했으므로. 부유한 상인이 여급의 등을 감싸 안으며 “내가 혹 안 좋게라도 할까 봐?” 하고 지껄이고는 했었다. 상대방이 돈이 많다는 이유로도 여자는 움츠러들었다. 지금은 신분마저 달랐다. 소녀가 물리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스란이 다가섰다. 기사가 눈썹을 세웠다. 코트를 걸치지 않는다고 해도, 에브라힐에서 트라우저를 입는 여자는 한 부류뿐이었다. 스란은 키도 기사와 같았다. 백화 기사단에 사내처럼 우락부락한 계집이 있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스란이 소녀의 어깨를 잡았다. 자기 뒤로 끌어당겼다.
“싫다고 하지 않소.”
“알지 못하면 빠져, 여기사! 싫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한 적 없다.”
“태도를 보면 모르나? 눈깔이 삐었소?”
“뭐라고, 이 계집……!”
기사가 손을 추켜올렸다. 휘두를 속셈은 없었다. 시늉으로 겁주려 했을 따름이었다. 하나 스란은 가만있지 않았다. 기사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아귀힘을 주었다. 어지간한 남자보다 크고, 근육질인 스란은 완력도 어마어마했다. 기사가 통성을 삼켰다. 몸을 뒤틀었다. 팔이 꺾어질 것만 같았다.
“결투를 원한다면 받아주지. 어설프게 덥비는 척일랑 집어치우고 검을 뽑지그래?”
“큭! 놔!”
스란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눈앞의 기사는 6 기사단의 휘장을 달았다. 제국 기사 중에서도 밑바닥. 스란은 황제와 이에샤도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처음부터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기사도 스란과 자신의 격차를 느낀 모양이었다.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때였다. 짝! 손뼉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스란은 고개를 돌렸다. 네세라가 꼿꼿이 섰다. 박수한 손을 맞잡은 채였다. 기사도 네세라 쪽을 향했다.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요요한 여인이 보였다. 입을 헤벌렸다. 스란의 손을 뿌리쳐 냈다. 치욕스러웠다.
“귀, 귀녀께서는 누구신지?”
“페리튼 자작의 장녀예요. 에브라힐의 과순(戈盾)이라는 제국 기사의 일면, 잘 보았습니다.”
“여, 영애! 지금 건……!”
“제가 경의 성함을 모를 때 물러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알게 된다면, 후후, 여러분은 여자란 입이 가볍고 수다스럽다고들 여기잖아요?”
말속이 깊었다. 소문나고 싶지 않다면 꺼져라. 삼삼하게 생긴 아가씨가 성깔은 보통이 아닌 성싶었다. 이를 악물었다. 스란과 농민 소녀를 노려보았다. 몸을 돌렸다.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제에 양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스란은 ‘오리걸음.’ 하고 생각했다.
휴우. 네세라가 한숨지었다. 스란은 움찔했다. 네세라로부터 맞서기 어려운 분위기가 풍겨 나왔으므로. 네세라는 터무니없다는 눈빛을 띠었다.
“지나치게 주먹구구식이잖아요.”
“그게 무슨?”
“저 얼간이야 스란 경보다 약했으니 이런 방법이 통했다손 쳐도 2 기사단이나 근위 기사를 상대로도 괜찮겠어요? 지켜야 할 여자를 지키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경이 다치잖아요.”
스란에게는 대꾸할 말이 궁색했다. 네세라가 옳았다. 어찌된 실력인지 근위 기사를 상대로도 날아다니는 이에샤와 달리, 스란은 의료원으로 간 날도 많았다. 악에 받쳐서 상대방도 상처 입혀 놓기는 했지만 분했다. 스란의 자존심과 경쟁심은 하늘을 찔렀다. 다른 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를 턱이 없었다.
“그리고!”
“또 뭡니까.”
“그렇게 무작정 시비 걸면서 여자애를 잡아당기면 어떡해요. 가뜩이나 겁먹었을 텐데 놀라잖아요.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온건하게 끼어들어서 도와주러 온 사람이라는 걸 알리고, 남기사를 지져 먹든 볶아 먹든 해야죠!”
“……읏…….”
소녀를 힐끗했다. 눈이 마주쳤다. 소녀가 고개를 설레설레했다. 저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당혹감을 지우지는 못했다. 네세라의 말대로 스란 때문에 놀랐던 듯했다.
네세라가 소녀에게 다가갔다. 빙그레 웃었다. 블라우스를 살살 두드렸다. 주름을 펴 주었다. 귀족이 평민의 지저분한 몸에 닿다니. 드문 일이었다. 소녀의 낯에 황송스러운 빛이 번졌다.
“괜찮니?”
“아, 예! 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바래다주고 싶은데 우리가 짬이 없단다. 혼자 궐문까지 갈 수 있을까?”
“물론이에요! 아가씨 같은 분께서 저 같은 것한테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가 보렴. 남자 조심하고.”
소녀가 광주리를 끌어안았다. 꾸벅, 허리 굽혀 절했다. 잰걸음으로 떠나갔다. 스란은 입술을 옥깨물었다. 네세라는 소녀의 뒷모습이 사라지고서야 스란을 보았다. 이야기를 마저 할 셈이었다. 하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얼굴 가득 당황이 떠올랐다. 두어 발짝 뒷걸음질쳤다. 고개를 수그렸다. 스란은 어리둥절해졌다. 뒤를 돌아보았다.
“낮게 나는 독수리를 뵙습니다.”
“멘델린 경.”
엘테르트가 부드러운 낯빛을 지었다. 오랜만이군. 스란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세라는 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했다. 백화 기사단 사무실에서만 엘테르트를 보아 온 스란으로서는 몰랐으나, ‘멘델린’이란 여간한 이름이 아니었다. 네세라는 사교 모임을 즐기지 않았다. 엘테르트 또한 먼발치에서만 보았다. 하지만 들은 바는 많았다. 차기 황제의 사촌이자 맹우. 델페레타 제일의 신랑감. 권력이나 결혼에 관심 없는 네세라라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리라.
“그대는 분명, 페리튼 가문의 여식이군요.”
“예? 저를 아십니까?”
“5년 전 발도어 가문의 파티에서 한 번 인사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엘테르트는 태연스레 말했다. 네세라는 눈을 크게 떴다. 엘테르트와 인사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언제, 어느 가문의 파티였는지까지는 감감했다. 엘테르트가 기억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애써 턱을 들었다. 남자 앞에서 기가 죽다니 싫었다.
“죄송합니다. 그리 오래된 일까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제가 페리튼의 네세라는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멘델린 소공작께 드릴 말씀이 있었죠.”
“음?”
“알드릭 기즈의 재판 과정에서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원고 측의 증인으로 섰던 이로서 감사를 표합니다. 덕분에 한 여자의 인생이 빛을 찾았습니다.”
엘테르트는 생경해졌다. 저에게 이토록 사무적으로 구는 여자는 드물었다. 이에샤와 만난 무렵이 떠올랐다. 그때도 낯설었었지. 이에샤를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네세라 페리튼에게도 호감이 갔다.
“금방은 대단하더군요. 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스란 경이 빨랐고, 영애께서 그 무뢰한을 어찌 몰아낼까 궁금하여 지켜보았습니다. 우아한 기지가 넘치는 것이 실로 재녀이더이다.”
“감사합니다. 외람되지만 소공작, 저를 ‘재인’이라 불러 주시겠어요?”
네세라는 겸손을 떨지 않았다. 네세라에게는 신조가 있었다. 안 그래도 대접받는 남자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말자. 여인에게는 상냥하지만, 사내에게는 도도하기 그지없는 이가 네세라였다. 앞에 둔 사람이 엘테르트라고 달라지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눈을 치떴다. 의아쩍게 물어보았다.
“그건 무슨 까닭입니까?”
“남자가 재주 있으면 아, 저 남자 ‘재주 있다’. 여자가 재주 있으면 아, 저 ‘여자’ 재주 있다. 저는 그런 오만한 칭찬이 싫습니다. 소공작께서 오만방자하다는 뜻은 아니오니 오해 말아 주시길. 계집이 유난이라 생각하시더라도 청을 들어 주십시오.”
날렵한 적갈색 눈에 총기가 서렸다. 라제카 공주를 볼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계집의 유난이라. 입속말해 보았다. 네세라는 한 수 접으며, 모양새만이라도 내 달라고 부탁하는 듯했다. 하지만 반대였다. ‘너 따위가 내 깊은 뜻을 알 리 없으니 시키는 대로 흉내라도 내라.’ 하는 뜻이야말로 진짜였다. 엘테르트는 꿰뚫을 수 있었다. 하하! 맑은 웃음소리가 올랐다. 네세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군요. 페리튼 영애께서는 자기 소신과 처세가 확실한 재인이십니다.”
“아, 가, 감사합니다.”
“왜 놀라십니까?”
“이리 선선히 받아들여 주시는 신사분은 처음이라서…….”
엘테르트의 눈매가 휘었다. 미소하는 얼굴이 사교계의 내로라하는 아가씨들보다 아름다웠다.
“일전에도 나에게 자신을 특이한 여자 취급하지 말라던 사람이 있어서 영애의 뜻도 알아들었습니다.”
스란은 이에샤를 떠올렸다. 엘테르트가 가리키는 사람이 이에샤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맞았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제가 검을 잡는다 하여 이상하고 괴상한 사람 취급하지 말라던 말을 돌이켰다. 여자이면서 검을 잡는 것이 아니었다. 검을 잡은 사람이 여자였을 따름이었다.
“페리튼 영애는 내 존경하는 여인과 닮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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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