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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80화 (80/164)

00080 8. 낮게 나는 독수리 =========================

이에샤는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멀건 표정을 지었다. 일하게 될 사무실이라니? 여기가? 페리튼 영애의? 생각을 짜 맞추었다. 스란, 미엘라 때와 다르게 귀족 중에서 백화 기사를 뽑는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엘테르트가 중부의 귀족 집안들에 공문을 돌린다 했다.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도 덧붙였다. 백화 기사단은 ‘몸가짐이 얌전치 못한 계집 집단’쯤으로 받아들여졌다. 부인이나 딸을 내줄 남자가 있을 턱이 없었다.

의사 샐먼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페리튼 자작은 몸져누운 지 오래되었다고. 네세라가 가주와 다름없었다. 이에샤는 네세라의 말뜻을 이해했다.

“백화 기사단에 들어오겠단 말인가요, 지금?”

“어머! 기쁘지 않으세요? 여기에 저 말고 다른 자원자가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데요. 미안해요,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랍니다.”

네세라에게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다른 이가 한다면 속이 뒤집힐 법한 소리를 산뜻하게도 뱉는 재주가. 화내기가 어려웠다. 이에샤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페리튼 영애. 진심이에요? 진짜 백화 기사가 될 셈이에요?”

“일손, 부족하지 않아요? 사람이 늘어난다면 반길 일이잖습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도 뭣합니다만, 제정신이 아니군요.”

“앨저 경.”

네세라가 머리를 기울였다. 이에샤를 올려다보았다. 아몬드 모양 눈이 사로잡힐 만큼 아리따웠다. 이에샤는 움찔했다. 네세라는 엘로나나 밀레나처럼 눈부신 용모를 지니지는 않았으나, 관능적이었다. 이러한 미인을 마주해 보지 못한 이에샤로서는 부담스러웠다.

“말씀 잘하셨어요. 저는 살면서 제정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별로 없답니다.”

알 성싶었다. 남자에게 적개심을 불태우는 여자가 세간에 고이 비치겠는가. 뱃속에 깔렸던 거부감이 날아갔다. 제정신 취급을 받아 보지 못한 것은 이에샤도 매한가지였다. 네세라의 다짐이 굳세다면, 반길 만한 일이었다. 알드릭 기즈를 고발하면서 만난 네세라는 이에샤와 통하는 구석이 있었으니.

이에샤가 브링어라는 말을 듣고 기뻐해 주기도 했다. “여자 브링어? 그것 봐요! 여자도 할 수 있다니까!” 하며. 인상적이었다. 달신교에 헌금과 헌물도 많이 한다고 들었다. 네세라가 백화 기사단에 들어오면 달신교와의 관계에도 도움되리라.

“오늘은 정말로 구경만 하러 왔을 뿐이에요. 아직 백화 기사가 어떻게 선발되는지도 모르고, 소문만 들었지 정식 공문은 못 받았으니까요.”

“아마 며칠 내로 나갈 겁니다.”

“자신은 있어요. 설마하니 검술을 요구하겠어요? 그랬다간 아무도 못 뽑힐 테니까.”

네세라의 말대로였다. 백화 기사에게 검술을 바란다면, 뽑을 사람이 바닥나리라. 이에샤는 서글퍼졌다. 여자가 검을 쥔다고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싫었다. 이에샤도 동류라고는 스란밖에 몰랐다. 하지만 세상은 넓었다. 다른 여자 검사도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네세라 같은 귀족 영애가 있는 것처럼.

네세라가 스란의 의자에 앉았다. 드레스 차림으로 허름한 나무의자에 앉으니 묘했다.

“전 백화 기사단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흥미를 가졌답니다. 들어오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는데, 이제야 기회가 오네요.”

“정말이에요?”

이에샤는 미엘라를 힐끗했다. 미엘라도 놀란 눈치였다. 연초에, 백화 기사단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미엘라 또한 백화 기사가 되기 전까지는 ‘여자 기사라니 좀 그렇지 않나?’ 하고 생각했었다.

“전 열아홉 살부터 달신교 구민 활동을 도왔어요. 다양한 여자를 상대해 봤죠. 남편이나 부친한테 착취당하는 사람, 겁간으로 원치 않는 아이를 가진 사람,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 그렇게 따지면 제가 여러분보다 선배일걸요?”

열아홉이라면 지금 이에샤와 같은 나이였다. 네세라는 4년째 여성에 이바지하며 살아온 것이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에샤는 ‘여자를 지키는 여자’란 자신이 처음일 줄 알았다. 조금 부끄러워졌다. 네세라는 그치지 않고 말했다.

“저한테는 백화 기사단에 들어와서 꼭 하고 싶은 일도 있어요. 음, 이 얘기는 나중에 진짜 기사로 선발되면 꺼내 놓죠.”

“지금 말씀하셔도 되는데요. 무슨 일이길래?”

“어머, 앨저 경. 처음부터 밑천을 드러낼 수야 없죠. 여자는 입을 단속해야 하는 법이에요. 쓸데없기 짝이 없는 이치죠.”

‘별로 단속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이에샤는 질린 낯을 했다. 네세라의 말씨는 걸걸하지는 않았으나, 거침없었다. 용병에게 쌍욕을 배운 저라면 더하게 보이리라. 처음으로 주눅이 들었다. 기사단 입단 시험을 지켜보았던 엘테르트와 루시온을 떠올리자 참담하기까지 했다.

“표정이 왜 그러시죠? 앨저 경.”

“아뇨, 아무것도. 페리튼 영애는 참 당당하시구나 싶어서요.”

미엘라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붕붕 끄덕거렸다. 네세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별종이라는 소리를 에둘러 할 거 없어요. 검으로 무쇠를 끊는 경께 그런 소리 들으니 기분이 색다르네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또 할 말이, 아.”

“왜 그래요?”

이에샤가 출입문을 쳐다보았다. 인기척이 들려왔다. 시더라면 부엌이나 세탁실에서 일하는 중일 터였다. 사무실에 나타날 사람은 정해졌다. 미엘라와 네세라도 눈길을 돌렸다. 문고리를 잡은 스란이, 네세라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놀란 듯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사단 손님입니까?”

“취직 희망자.”

“예?”

이에샤는 우스개를 던져 보았다. 문제는, 이에샤의 농담이란 셈브리온에게밖에 통하지 않았다. 퉁명한 표정과 말투. 다른 사람에게 들어 먹힐 리가 없었다. 스란은 당혹했다. 이에샤는 제 실패를 알아차렸다. 서둘러 설명했다.

“페리튼 자작 영애. 방문객이야, 오늘은. 백화 기사단 선발 시험이 정해지면 응시하고 싶으시대.”

“취직 희망자라는 게 그 뜻이었습니까. 세상에 여기 들어오고 싶어 하시는 분도 다 있군요.”

괴이한 낯빛을 짓고 말았다. 스란이야말로 떼를 부려 황제의 개인 조직에서 백화 기사단으로 옮긴 터였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했다. 스란은 이에샤의 속도 모르고 고민에 빠졌다. 네세라가 자기 의자를 차지한 까닭이었다.

“그럼 전 순찰이나 다녀오겠습니다.”

비켜 달라고 청하기는 그만두었다. 뒤돌아섰다. 네세라가 눈을 깜빡했다. “아하.” 하고 중얼거렸다. 앉은 자리가 스란의 몫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구두 굽으로 양탄자를 눌렀다. 나비가 날갯짓하듯 일어섰다. 스란이 멈칫했다. 순찰을 나갈지, 사무실에 남을지 갈등하는 것 같았다.

네세라는 생긋이 웃었다.

“제가 에브라힐은 거의 찾지 않아서 그러는데, 길 안내 좀 해 주겠어요?”

“……어디로 말입니까?”

“송악궁으로 부탁해요. 아버지 친구를 뵈기로 했거든요.”

본디의 목적을 알렸다. 이에샤와 미엘라를 돌아보았다. 장갑 낀 손을 흔들었다. 사뿐사뿐 나가 버렸다. 스란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이에샤를 향했다. 이에샤가 고개를 끄떡했다. ‘안내해 드려.’ 하는 뜻을 담아서. 스란은 한숨을 푹 쉬었다. 네세라의 뒤를 따랐다.

미엘라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화려하신 아가씨네요.”

“나쁜 사람은 아니야.”

“예, 그런 거 같아요. 백화 기사단의 취지도 이해해 주시는 듯하고.”

이에샤는 비로소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미엘라가 서류 뭉치를 가져다놓은 채였다. 양이 많지는 않았다. 하나 사무에 서투른 이에샤로서는 보기만 해도 답답했다. 생각이 네세라에 미쳤다. 살림을 꾸려 나가는 처지라니, 서류 작업에도 익숙할지 몰랐다. 미엘라와 달리 귀족이기도 했다. 기사단장으로서의 일을 맡겨도 좋으리라. 이에샤는 네세라가 백화 기사단에 들어와 주기를 마음 깊이 바랐다.

이동 마차가 잡히지 않았다. 스란은 불편스레 네세라를 이끌었다. 네세라는 걸음이 느렸다. 어쩔 수 없었다.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었으므로. 스란은 평소보다 두 배쯤 더디게 걸었다. 백화 기사로 일하며 길 안내라면 여러 번 맡았다. 하지만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네세라의 걸음새는 한들한들했다. 부잣집 고양이 같은 몸가짐을 보며, 스란은 한숨지었다. 귀족 여자란 불편했다. 숟가락보다 무거운 물건은 들어 본 적도 없을 성싶은 귀공녀가, 왜 백화 기사단에 들어오겠다는 걸까. 철모르는 호기심이리라.

“내가 마음에 안 드는가 봐요?”

“예?”

“아까부터 힐끔힐끔 노려보잖아요. 모르고 있었어요?”

“아.”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세라의 말대로 몰랐다. 암무 시절에는 어둠 속에서 황제를 지켜보거나 단순한 심부름만 했기에, 감정을 추스르기가 쉬웠다. 백화 기사가 되고 달라졌다. 이에샤와 검을 부딪치고 미엘라를 집에 들이며.

알 것 같았다. 자신은 귀족 영애가 백화 기사의 자리를 넘보는 일이 싫었다. 이에샤와 미엘라의 치열함이 욕보는 듯했다.

“스란 경이라고 했죠? 내 어디가 그렇게 못마땅한 걸까요?”

“딱히 못마땅한 게 아닙니다. 전 그냥.”

“그냥?”

“귀녀께서 장난으로 백화 기사를 목표하신다면 불쾌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스란은 귀족에게도 거리낌없었다. 미엘라는 스란이 이에샤에게 툭툭 말할 때마다 질겁했으나, 무작정 내뱉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신임을 받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네세라는 그러한 속사정을 몰랐다. 하지만 스란의 태도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평민이었던 당신 눈에 내가 철부지 아가씨로 보이는 거 알아요.”

“……죄송합니다. 그런 생각을 안 했다고는 못하겠습니다.”

“솔직해서 좋네요. 이따 앨저 경한테 가서 물어보세요, 내가 보이는 거처럼 유들유들한 사람인가.”

스란은 고개를 기울였다. 네세라는 어느 모로 보나 어여쁘고 사치스러운 아가씨 같았다. 남자가 모든 일을 해결해 주리라 믿는. 네세라의 입담을 들은 적 없는 스란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네세라는 빙그레 웃었다. 기사단에 들어가면 동료가 될 사람이었다. 얼굴 붉히며 싸워서 좋을 게 없었다.

입다물고 걷던 차였다.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네세라보다 스란이 빨랐다. 십여 미터 떨어진 앞쪽을 노려보았다. 덩치 큰 남자가 삐딱이 섰다. 곁에서 초라한 옷차림의 소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옆구리에 광주리를 낀 채였다. 농가의 딸인 듯싶었다.

남자의 허리에는 장검이 걸렸다. 네세라가 날카롭게 말했다.

“저거, 남기사죠?”

“남, 기사?”

“딱 봐도 서른은 돼 보이는데 저렇게 작은 여자애를? 미친놈 아니야?”

스란은 멍하니 뒤를 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을 뒤덮은 무시무시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스란 24살, 네세라 23살입니다. 이번 챕터는 엘테르트의 이야기이지만 스란이랑 네세라도 많이 내보내고 싶네요.

관련 없는 소리지만 스란의 키는 엘테르트나 루시온과 비슷합니다...이에샤는 초반에 정확히 170cm라는 언급이 나왔는데, 스란은 180대입니다. 작가가 키 큰 여자 캐릭터를 아주많이 좋아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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