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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79화 (79/164)

00079 8. 낮게 나는 독수리 =========================

알드릭 기즈의 재판이 끝났다.

결과는 내다본 대로였다. 재판정은 달신교를 등에 업은 아리타의 손을 들어 주었다. 가진 것 없었던 알드릭은 순식간에 끝장났다. 경비대에 붙들렸을 때, 알디온 후작가에 편지를 보내기는 했다. 밀레나는 답하지 않았다. 평민 사기꾼 따위가 어찌되든 알 바 아니었다.

‘리타 밸리의 별’ 사건은 밀레나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찧고 까부는 이들이야 있었다. 밀레나를 시샘하는 여자 몇과 밀레나에게 거절당한 남자 몇. 그러나 무슨 일을 겪었든 밀레나는 아름다웠다. 상냥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흐름을 잡아낼 줄 알았다. 사교계에서 밀레나의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바보스럽기마저 했다. 세상일이 이다지 쉬워도 되는가. 사람들은 밀레나의 손짓 한 번, 웃음 한 조각에 매달렸다. 옛날에는 남의 마음이 멀게만 느껴졌다. 얻지 못하여 애가 탔었다. 이제는 알았다. 아름다우면 그만이었다. 여자는 미모와 교태로운 몸가짐만으로 누구라도 발아래에 둘 수 있었다. 아등바등할 필요라고는 없었다.

그보다 밀레나의 속을 찌르는 일이 있었다.

“이에샤 언니.”

중얼거려 보았다. 밀레나의 이복언니는 사사건건 밀레나를 방해했다. 다져 놓은 자리를 아슬아슬하게 만든 적도 여러 번이었다. 기사 작위를 받은 일, 신년맞이 무도회에서 파트너를 빼앗아 간 일……. 이번 사건도 이에샤가 들춰냈다고 들었다.

밀레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탁자에 유리잔이 놓였다. 백포도주가 찼다. 술에는 약했지만, 취하는 느낌은 싫어하지 않았다. 불쾌할 때는 샴페인이나 포도주 한두 잔을 마셔 주면 좋았다. 손을 뻗었다. 유리잔의 몸통을 만지작거렸다. 손잡이를 잡아 들었다. 입술로 가져갔다.

“왜 부득부득 훼방을 놓을까?”

등불을 켜지 않은 방에 고운 목소리가 울렸다. 생각을 정리하고자, 소리 내어 혼잣말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샤는 예쁜 얼굴을 타고났다. 예쁜 옷을 입고 예쁜 낯빛을 띠면 떠받듦 받을 터였다. 왜 여기저기 헤집어 대는 걸까? 삶이란 타협의 연속이었다. 밀레나는 따분하고 고달픈 신부 수업을 받으며 참아 왔다. 노력이라고는 하지 않고, 세상에 불평만 터뜨리는 이에샤가 괴상망측했다.

밀레나는 참말로 이에샤와 잘 지내고 싶었다. 피가 반뿐이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동기였다. 같은 여자이기도 했다. 어려움을 나누고, 믿고 기대며 살 수도 있었다. 밀레나의 호의를 물리친 쪽은 이에샤였다. 이에샤가―셀더리의 닦달대로―숙녀로서 사교계에 데뷔하여 밀레나와 함께했다면 큰 인기를 누렸을 것이 뻔했다. 왜 기사로서 고생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엘테르트 님은 또 왜?”

멘델린 소공작도 백화 기사단을 도왔다 하였다.

기억하기로 엘테르트와 이에샤의 사이는 험악했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에게 적개심을 보였다. 이에샤 또한 엘테르트가 멘델린 공작가의 사람임을 듣고도 으르렁거렸다. 하나 언제부터인지, 둘이 깊은 관계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백화 기사단장이 주제넘게 멘델린 소공작을 유혹했다는 추문이 많았다. 밀레나는 이에샤가 그럴 사람이 못 된다는 걸 알았다. 언니가 남자를 꾀어낸다?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난날을 돌이켰다. 데뷔 무도회를 치르고 오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때는 밀레나에게 끌리는 사람, 밀레나의 출신을 문제 삼는 사람이 반반이었다. 일부러 밀레나를 초대해서 망신 주려 드는 노부인도 있었다. 그날도 보수적인 귀족들이 밀레나를 세워 두고, 제 어미를 닮아 눈매가 음탕하다며 쑥덕거렸다.

그러던 차 파티장에 나타난 엘테르트를 잊지 못했다. 엘테르트가 들어서자마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모두가 점잔을 빼기 시작했다. 밀레나는 사교 모임에서 그토록 고아스러운 이야기만 오가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뭇사람이 엘테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악심을 감추려고 용썼다.

소문이 틀리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델페레타 최고의 남자였다. 엘테르트만 손에 넣는다면, 사생아라는 낙인도 문제되지 않으리라. 밀레나는 그 순간부터 엘테르트를 ‘연모’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멘델린과 사업을 같이해서 다행이었다.

“왜 언니를?”

포도주가 동났다. 거듭 고개를 기울였다. 엘테르트도 이에샤도 염문이 돌 만한 성미가 아니었다. 둘이 정답다 한다면, 정말로 걸리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밀레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엘테르트는 상냥했다. 위압적이지 않았다. 육욕을 다스릴 줄 알았다. 형편없는 남자들과는 달랐다. 탐이 났다. 제 옆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엘테르트 멘델린을 거머쥐는 것이야말로 델페레타의 귀공녀로서 가장 큰 성공일 테니.

* * *

엘테르트는 기사단 입단 시험에 관여하지 않았다. 황실의 연례행사였다. 멘델린 소공작이 돌보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기사의 꼴도 보기 싫었다. 루시온이 마음을 써, 일을 도맡아 주었다. 엘테르트는 시험이 마무리되고 뒤처리만 맡으면 되었다.

지금에야 뽑힌 제국 기사 명단을 살피는 중이었다. 루시온의 투덜거림대로 이렇다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신상명세서를 넘겨 나갔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주춤했다. 한 장에서 멈추었다. 첫 줄에 쓰인 이름을 읽었다. 테세르 오르겔 후작 영식. 지난 시험 때 정체를 숨긴 브링어와 만나 일격에 당했던 남자였다. 검술 신동으로 알려진 것이 허명무실은 아닌 모양이었다. 합격자 가운데 성적이 좋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테세르 오르겔은 이에샤를 부정행위자로 몰아붙였다. 이에샤를 거꾸러뜨리려 들었다. 저에게는 기회가 남았으면서, 여자 몸으로 겨우겨우 그 자리에 선 이에샤를 짓뭉개려 했다. 이에샤가 황실 행사를 모욕했다고 알려졌다면 골치깨나 아팠으리라.

엘테르트는 고개를 털었다. 일하면서 이에샤 생각을 하다니. 이에샤와 함께 있으면 즐거운 까닭이었다.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턱을 매만졌다.

‘내가 루시온한테 충고 늘어놓을 처지가 아니었군.’

요즈음 이에샤 때문에 곤란했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고, 무얼 하는지 알고 싶고, 제가 추천한 책은 읽었는지 신경 쓰였다. 엘테르트에게는 이에샤처럼 깊이, 자주 얽힌 여자가 없었다. 관심이 쏠리는 것도 자연했다.

‘아버님께는 동생 같은 아가씨라고 설명했지만.’

조금 달랐다. 연모라고 부르기는 미묘했다. 하지만 동생을 보는 마음이냐 여자를 보는 마음이냐 한다면, 후자에 가까웠다. 엘테르트는―루시온이나 이에샤와 달리―고민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결과가 나오게 마련이었다.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깊어지면 깊어지는 대로, 흐려지면 흐려지는 대로 끝이 나리라.

신입 기사 관련 서류들을 밀어서 치워 버렸다. 이마를 감싸쥐었다. 이에샤의 상이 머릿속에 어른어른, 떠나려 하지 않았다. 겨울철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의 모습이 그려졌다. 제국 기사를 압도하던 검술. 유연하면서도 패기만만하던 움직임.

그날 엘테르트는 노여워했다. 실력 차이가 뚜렷한데도, 폭력을 거두지 않는 이에샤의 짓거리에 대경실색했다. 혐오감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알았다. 이에샤에게는 루시온의 흥미를 붙잡을 수단이 그뿐이었다.

이에샤가 백화 기사로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저는 그동안 미지근한 물속에 잠겨 살아왔다고. 엘테르트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해결책들이, 누군가에게는 발버둥쳐도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역경을 벗어나려면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조차도 하지 못하여 짓눌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민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남성과 여성의 격차를 메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에샤가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될까.

엘테르트는 얼굴을 탁상에 처박았다. ‘또, 또, 또.’ 하고 생각했다. 의식이 야릇한 쪽으로 튀어 대서 문제였다. 책상 한구석에 놓인 서류를 끌어왔다. 억지로라도 집중해야 했다. 잿빛 머리카락 아가씨를 몰아냈다. 정신 차리자!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보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이에샤는 괜찮을지 몰라도, 엘테르트 자신이 바빴다.

일에 파묻히다 보면 지나가겠지. 엘테르트는 마음을 가벼이 먹었다. 반쯤 쓰인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큰 글씨로 제목이 적힌 채였다.

「귀족 내 백화 기사 선발에 관한 안내 공문」

미엘라는 우왕좌왕했다. 이른 아침―기사단장인 이에샤가 출근하기도 전부터 찾아온 손님 탓이었다. 붉은 바탕에 보라색 포인트가 들어간 드레스를 입은 미인은, 미엘라를 보자마자 “숨은 공로자!” 하고 외쳤다. 얼떨떨했다. 무슨 뜻인가요? 조심조심 물어보았다. 듣자 하니 ‘리타 밸리의 별’ 사건에서 사제를 증인으로 내세우도록 조언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페리튼 자작 영애 네세라는 호들갑을 떨며 백화 기사단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실내 장식이 휑뎅그렁하다느니. 양탄자 색깔이 촌스러운 게 남자가 골랐을 거라느니―총무부에서 꾸몄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미엘라는 이상한 아가씨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스란을 두고 일찍 나온 날 찾아올 게 무언가.

네세라가 오고 조금 뒤, 이에샤도 출근했다. 이에샤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페리튼 영애?”

“재판이 끝나고 일주일 만이지요? 앨저 경! 잘 지내셨나요?”

“아, 예. 잘 지냈습니다만……. 영애가 왜 여기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살롱에라도 참가하러 온 걸까? 황궁에 들어왔으니, 네세라도 백화 기사가 살펴야 할 여인에 들었다. 이야기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들어 주어야 했다. 네세라는 방긋 웃었다. 짓는 낯꽃마다 고혹적이었다. 미엘라는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네세라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제가 일하게 될 사무실을 구경해 보고 싶어서요.”

============================ 작품 후기 ============================

새로운 챕터 시작합니다.

챕터 이름이 대놓고 말하고 있지요. 엘테르트가 고뇌하는 이야기입니다.

욕도 많이 먹고 실수도 많이 저지른 남주인공이지만 잘 키워 나가려고 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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