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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78화 (78/164)

00078 외전 - 셈브리온 데힐 =========================

“금화 오백 개를 내겠소.”

델페레타의 국경선을 넘고 두 달.

작년까지 내 조국에는 제국 기사단이 주둔했다. 선민의식으로 뭉쳐, 집에 돌아가고만 싶어 하는 도련님들이었다. 쓸만한 놈이 있기는 했다. 한 명. 친구라 일컬어도 괜찮으리라―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나는 그에게서 제국어를 배웠다. 손짓 발짓을 더하면 의사소통은 될 정도였다. 델페레타로 온 까닭은 그것이 반이었다. 나머지 반은, 힐가가 좋아하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힐가는 비렁뱅이를 보면 가만두지 못하는 성미였다. 나라에서 빈민굴에 곡식을 푸는 이곳이 부러웠겠지.

부질없었다. 힐가는 황혼의 세계로 떠났다. 나는 도망자가 되었고. 동료들은 어찌 되었을까? 뭐, 죽지야 않았으리라. 제 앞가림은 하는 놈들이었다. 내가 사라졌다고 울 녀석도 없었다.

……돈이 모자랐다. 어느 땅이나 그러하듯이, 뜨내기를 보는 눈길은 차가웠다.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다. 델페레타는 평화로웠다. 내가 사람을 죽여 준다고 값을 치를 만한 ‘고객’이 없었다. 두 달간 비상금만 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웬 여자가 찾아왔다.

“금화 오백? 황족이라도 죽이길 바랍니까?”

“불경한 소리를 하는군. 나는 내 딸을 지켜 줄 사람을 찾고 있을 뿐이오.”

“딸? 얼마나 대단한 여식이길래 그 돈을 내놓습니까?”

“몇 년 뒤에는 백작이 될 아이라고만 해 두지.”

처음에는 백작 부인인가 싶었다. 하지만 여자는 백작의 아내가 아니라, 딸이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는 후작 부인이었다고. 에이릴리 앨저는 결혼하면서 상속권을 잃었다. 작위를 이을 수 없었다. 에이릴리가 죽으면 딸인 이에샤가 앨저 백작이 되게 되었다. 그러니까 에이릴리는 나를 만났을 때, 몇 년 내로 자신이 죽으리라 내다보았던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당연했다. 제국의 귀부인이 붉은 악몽이니, 용병 길드의 으뜸이니를 들어 보았을 턱이 없었다. 솜씨 좋은 용병을 찾아 헤매다가 중개인에게 내 소개를 받은 모양이었다. 사기당한 셈이었다. 제국말도 똑바로 못하는 나를 떠넘기면서 수수료는 두둑이 챙겼으리라. 나는 멍청하고 가엾은 귀부인에게 흥미를 느꼈다. 금화 오백 개면 몇 년은 버틸 돈이기도 했고. 제법 예쁘게 생겼기도 했고.

딸내미가 어디 까지지 않도록 지켜봐 주면 되는 거겠지. 그 정도 마음가짐이었다.

“싫어요, 엄마. 저거 무서워. 엄마아, 일어나 봐. 저게 노려봐.”

“…….”

“저거 눈도 시커멓고 무섭단 말이야. 일어나아.”

어린아이의 말이란 단순한 법이었다. 나라도 알아들을 만큼. 백작의 딸의 딸―앨저 소백작은 시건방진 계집애였다. 나를 ‘저거’라고 부르며, 병석에 누운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댔다. 애가 뭘 모르면 말을 좀 막 뱉을 수도 있지. 나는 웃어넘기기로 했다.

이에샤 앨저. 이름마저 까다로웠다. 내가 발음하면 웃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필이면 ‘에’가 들어갈 게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해질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이에샤에게 다가가 보려고 했다.

“이-샤.”

“흐앙!”

‘내가 뭘 했다고.’

“엄마! 엄마! 저거 쫓아내 줘!”

얼떨떨했다. 에이릴리―고용주는 잠에 빠져서 일어날 낌새가 없었다. 이에샤는 내가 숨만 내쉬어도 움찔거렸다. 나는 이에샤에게 가까이 가지도, 고용주의 침실에서 나가지도 못했다. 한 발자국이라도 떼어 놓으면 이에샤가 자지러질 기세였다.

점심때에 드러누워, 늦저녁에 일어난 고용주는 맥없이 말했다.

“내 딸이 당신을 특별히 싫어하는 건 아니오.”

“어떻게 하면 저걸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까?”

“저 애는 거의 모든 사람을 싫어해. 당신만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소.”

그렇게 까탈스러운 계집애라는 말은 없었잖아. 나는 금화를 떠올렸다. 돈을 받은 만큼은 일해야 했다. 연고도 없는 제국에서 귀족의 돈을 삼키고 튀기는 께름칙했으므로.

“이-샤.”

“저리 가!”

이에샤는 나를 무서워했다. 아니, 더러운 것이라도 보듯이 굴었다. 화는 나지 않았다. 백작이 되실 아가씨였다. 반말을 쓰든 욕을 하든 그러려니 했다. 지켜야 하는 대상이 요리조리 달아나니 골치 아플 뿐이었다.

“이-샤, 나랑 얘기 좀.”

“가! 아저씨 무서워! 싫어!”

젠장. 난 아직 서른 살도 안 됐다고. 이에샤는 엄마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나를 제 곁에서 쫓아내려고 했다. 화장실에 간 사이 문을 잠그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매일이 성가셨다. 숨지는 않으니 다행인가? 어린애는 앉아서 동화책이나 읽으면 좋을 텐데. 이러다가는 내가 이에샤를 쥐어박게 될 것만 같았다.

참자. 참자. 앨저 저택은 흉가나 다름없었지만, 벨체터의 야전 천막과 견주면 궁전 같았다. 식량도 넉넉했다. 이에샤가 마음을 열지 않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나는 이에샤와 친해지겠노라 약속하지는 않았으니까.

잘 참아 가던 어느 날이었다.

“뭐 하는 거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에샤의 등허리가 곤두섰다. 내 방―고용주가 내준―에 웬일로 숨어들었다 싶더니,

“아저씨.”

“손 떼!”

힐가의 검을 만지는 것이었다. 가만있을 수 없었다. 눈앞이 벌게지는 듯했다. 검은색 사브르는 힐가가 남긴 유품이었다. 벨체터의 동료들도 손대지 못하게 했었다. 나를 방해물 취급하는 계집애가 가지고 놀 물건이 아니었다. 이 외로운 땅에서, 내 하나뿐인 위안거리인데. 이에샤는 후다닥 도망쳤다. 쫓아가 화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피곤할 따름이었다.

그 뒤로 이에샤는 몹쓸 말을 재깔이지 않게 되었다―저거라든가 아저씨라든가. 눈치만 살폈다. 겁먹었는가. 아니면 미안해하는가. 짙푸른 눈동자가 구르는 꼴이 신경 쓰였다. 방에 들어와서 물건을 건드렸다고,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과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금화 오백 개를 일정히 나눈 날짜만큼 앨저에 들어앉았다가 떠나면 되는 터였다.

다만…….

“세비리온.”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이에샤는 이에샤대로 ‘셈브리온’을 발음하기 어려워했다. 제국인 귀에는 ‘스임브리온’을 단숨에 읊는 것처럼 들린다고 했다. 어린아이의 혀는 구르지 못할지도 몰랐다. 이에샤가 “세비리온.” 하고 되풀이했다. 내게 빵 한 쪽을 내밀었다.

“나 주는 거야?”

“끅!”

작은 입에서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무서운 주제에 왜 다가오는 거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손길에 뭉쳐진 더러운 빵을 받아 들었다. 좋든 싫든, 고용주의 따님이 주는 선물이었다. 나중에 안 보이는 곳에서 버릴 속셈이었다.

“안 먹어?”

“안 먹어.”

“내가 준 거라서 싫어?”

알면 묻지 마. 진심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이에샤는 움츠러들었다. 내 얼굴이 무서운가? 제법 미끈하게 생긴 편이라고 자신했는데 말이다. 고민 끝에 대답했다.

“이-샤가 준 거니까 보물로 삼을게.”

이에샤는 비로소 만족스러워했다. 고용주의 침대로 다가갔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든 엄마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꼬맹이가 청승맞았다. 낡은 드레스의 자락이 펼쳐진 모양새는 시들어 떨어진 꽃 같았다. 멀끔한 옷은 없는 걸까.

‘깨끗한 원피스 같은 건 은화 열 개 정도로 사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때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다음날, 내 발걸음은 저잣거리로 향했다. 제국어 실력이 쓸만해졌다. 서투르게나마 물건값을 깎을 수도 있었다. 금화 오백 개를 받은 처지에 어린애 치마 두고 흥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나는 이에샤의 치수를 몰랐다. 펑퍼짐한 블라우스와 멜빵 원피스를 한 벌씩 샀다. 어설픈 기분이 들었다. 여자 선물은 물론, 힐가에게도 무언가를 사다 준 적이 없었다. 건방진 계집애를 입히겠다고 돈을 쓰다니. 스스로가 낯설었다.

고용주는 한참 동안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으음, 이-샤의 옷이 다 해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굉장히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계십니다.”

“당신이 그런 신경을 쓸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아서 그러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나도 놀랐으니까.

고맙게 입히겠소. 고용주는 시장에서 사 온 옷을 받아들였다. 귀족이니 물리칠 것도 각오했는데, 괜찮은 성싶었다. 고개를 두리번두리번했다. 나는 황당해졌다. 방 안에 없는 애를 목만 빼서 찾는다고 나오겠는가? 한숨을 쉬었다.

“이-샤를 데려오겠습니다.”

“데힐 씨.”

“예?”

“에시아가 언제 사라졌지?”

이런 말 하기는 무엇했지만, 나의 고용주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루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는 사람이 멀쩡할까. 딸을 보는 눈도 흐리멍덩했다. 10분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나는 건성으로 말했다.

“애들이라는 게 원래 눈만 떼면 사라지지 않습니까.”

“음.”

“데려오겠습니다.”

이에샤나 찾으러 가고 싶었다. 새 옷차림이 궁금했다. 내가 고른 옷이 어울릴까? 이에샤는 예쁘장했다. 벨체터의 각다귀 같은 부랑아들과 비교하면 꽃다웠다. 병든 고용주를 마주하기보다야 이에샤를 돌보는 편이 즐거웠다.

우뚝, 다리를 멈추었다.

‘즐겁다고?’

나는 자신에게 소스라쳤다. 언제부터 품은 마음일까? 솜털 같고, 봄기운 같고, 꽃꿀 같았다. 내 가슴은 폐허와 다름없었다. 벨체터에서 심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나 델페레타의 공기는 발랄했다. 어린아이를 귀엽다고 여기게 되리만큼. 같은 하늘 아래인데 이 차이는 무언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샤.”

이름을 불러 보았다. ‘이으이샤’ 정도로 들리는 서투른 발음은 내가 이방인임을 나타냈다. 덜컥 겁이 치밀었다.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견뎌 낼 수 있을까? 외로움을. 그리움을. 공허함을.

이에샤는 뜰에 있었다. 관리하지 못해 잡풀이 우거진 가운데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들었다. 땅바닥에 낙서라도 하고 놀았는가.

“이-샤.”

“세비.”

이제는 ‘세비리온’도 아니고 ‘세비’냐. 제멋대로인 계집애. 나는 비척비척 이에샤에게로 다가갔다. 오늘도 이에샤는 남루한 드레스를 입었다. 헝클어진 머리채를 늘어뜨렸다. 모르기는 몰라도, 델페레타에서 에이릴리나 이에샤처럼 초라한 귀족도 없으리라. 나 같은 놈에게는 어울리는 고용주들일지도 몰랐다.

이에샤가 발치를 가리켰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숙였다. 이에샤가 그려 놓은 낙서를 보았다.

“……이게 뭐야?”

“세비리가 하던 거.”

“셈브리온이라니까. 잠깐만. 이거, 내가,”

수련하면서 펼쳤던 검로였다. 나는 내가 지켜야 하는 여자아이를 멍하니 보았다. 이에샤가 웃었다. 칭찬해 달라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알았다.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라치면 이에샤는 뒷걸음칠 터였다. 이에샤는 나에게 다가오면서도, 나를 짐승처럼 무서워했다. 첫 만남을 떠올리면 발전하기는 했나.

“이-샤. 내가 무섭냐?”

“세비리 귀신 같아.”

그럴 줄 알았다. 제국의 소백작과 벨체터의 용병은 물과 기름 같았다. 그렇더라도 이에샤는 나의 수련을 눈여겨볼 정도로는 마음을 열었다.

“그럼 나 떠날까?”

“…….”

그것 봐. 대답하지 못하잖아. 먹먹해졌다. 벨체터에서의 나를 잃어버리고, 델페레타에서의 내가 자리잡아 갔다. 이에샤가 그 척도처럼 느껴졌다.

나는 벨체터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워할 자격도 없다. 바보같은 선택을 했다. 조국의 내란을 부추긴 죄인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벨체터에서 내 자리는 지워져 가겠지.

하지만 제국에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리를 구부렸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에샤와 눈을 맞추었다. 이에샤는 흠칫하면서도, 내빼지는 않았다. 내가 지켜 주기로 하고 돈을 받은 아이였다. 나를 평화에 젖어들도록 하는.

이에샤가 무사히 자라기를 바랐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어머니는 망가져 버린 이에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에샤가 나에게 안정감을 안겨 주었듯이.

“이-샤. 너, 검 배워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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