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5 7. 리타 밸리의 별 =========================
(연참 1/2)
페리튼 자작가의 마차가 달렸다. 네세라와 이에샤, 아리타를 실은 채였다. 네세라의 하인은 마부도 겸하는 모양이었다. 밖에서 말채찍을 휘둘렀다. 향한 곳은 수도 변두리였다. 땅이 포장되지 않았다. 차체가 덜커덩거렸다. 네세라는 “내가 자주 찾는 의료원이에요.” 하고 말했다.
건물 한 채가 우뚝했다. 이에샤는 입을 헤벌렸다. 의료원? 멍청히 중얼거렸다. 폐가가 아니라? 네세라는 거리낌없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로 들어갔다. 이에샤는 망설였다. 이내 아리타를 추슬러 따랐다.
뜻밖이었다. 안쪽은 깔끔했다. 실내 장식이 세련되기까지 했다. 더 놀라운 점이 있었다. 중년 여인이 달려 나왔다. 네세라를 부둥켜안았다.
“오랜만이에요, 샐먼 선생!”
“네세라 아가씨는 볼 때마다 아름다워지시는군요.”
의료원에서 선생이라 불릴 사람은 정해졌다. 여자 의사라니. 이에샤는 직감했다. 이곳은 황실의 인허를 받은 시설이 아니리라. 무면허 의사가 꾸리는 불법 의료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샐먼이 이에샤와 아리타 쪽을 보았다. 낯에 놀라움이 떠오르더니, 무시무시한 빛이 번졌다. 아리타에게 다가들었다. 좀 봅시다! 팔뚝을 쥐었다. 진료실인 듯한 방으로 잡아끌었다. 네세라가 뒤쫓았다. 이에샤도 움직이려 했다. 네세라의 고개가 홱 돌았다.
“백화 기사단장님은 섬세함이 부족하시니 여기서 기다리시죠.”
뼈가 있는 말이 날아들었다. 아리타는 이에샤가 쇠사슬을 끊어 버리자 바짝 얼어붙었다. 이에샤는 낙담했다.
대합실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졌다. 긴 의자에 앉았다. 진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반 시간쯤 흐르고, 세 여자가 나왔다. 아리타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긴소매 안쪽으로 붕대를 감은 팔목이 보였다. 샐먼이 혀를 찼다.
“아가씨는 어디서 이런 처자들만 귀신같이 주워 오십니까? 이게 몇 번째예요?”
“선생이 다 받아주니 내가 계속 이러죠. 남의사는 믿을 수가 없잖아요.”
네세라가 야멸차게 내뱉었다. 이에샤는 ‘남의사’라는 단어로부터 짙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 의심이 많으셔서야. 의사를 안 믿으면 누굴 믿겠다고요.”
“샐먼 선생은 믿어요. 봐요, 보통 남편한테 학대당한 여자는 안 보이는 곳에 상처가 생기게 마련이잖아요? 그런 사람이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한다니, 그거 나는 정말 저질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고 네세라는 이에샤에게 다가왔다. 빙그레 웃었다. 생김새가 요염하니 입꼬리만 끌어올려도 아리따웠다. 밀레나의 맑고 무구한 인상과는 달랐다. 이에샤는 ‘예쁜 사람이네.’ 정도로만 생각했다. 네세라를 겉도 속도 육욕적이리라 여기고 수작질하는 남자가 숱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아리타는 와들와들 떨기만 했다. 드레스를 입은 네세라는 물론, 이에샤도 예사 분이 아닌 성싶었다. 키가 크고 살결이 고왔다. 좋은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었다. 귀족과 눈도 마주쳐 본 적 없는 아리타로서는 숨이 막혔다.
흠흠! 샐먼이 헛기침했다.
“보니까 몸이 피죽도 못 받아들이도록 상했어요. 한쪽 귀는 거의 안 들리는 거 같고―그 못된 자식이 뺨을 얼마나 때린 건지. 무릎이나 발목 관절도 덜렁덜렁하고. 눈도 많이 나빠진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 손은 또 멀쩡하네. 제가 네세라 아가씨 불쌍한 여인네 데려오는 데엔 익숙해졌지만 이런 심한 경우는 처음 봤습니다. 거기, 그러니까, 뉘시냐…….”
“앨저 백작 이에샤.”
“어디 영애가 아니고 백작님이셨습니까? 백작님이 설명을 좀 해 보셔요. 아가씨는 아무것도 모른다시고, 이 처자도 말할 정신이 아니어 보이고.”
샐먼은 이에샤의 신분을 듣고도 스스럼없었다. 그리해도 괜찮으리라 믿는 듯했다. 이에샤는 샐먼의 태도를 개의치 않았으나, 처음 만난 자신을 신뢰하는 건 신기했다. 샐먼이 이에샤의 속을 읽은 양 키드득거렸다.
“네세라 아가씨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시지. 백작님도 좋은 분이 틀림없어요.”
“선생, 그거 은근슬쩍 자기 칭찬이잖아요?”
이에샤는 당혹했다. 샐먼과 네세라의 정다운 분위기가 어색했다. 백화 기사단 사무실과는 조금 달랐다. 더욱 끈끈하고, 역경을 함께 헤쳤다는 동지애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낯설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입을 뗐다. 네세라와 샐먼이야 어찌되었건 아리타에게는 설명이 필요했다.
“나는 달신교의 슈리 하급 사제한테서 부탁을 받았어요.”
세 번째 되풀이하는 이야기였다―라제카에게 한 번, 미엘라에게 한 번. 따분히 늘어놓았다. 중간부터 아리타가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낌과 이에샤의 목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말을 마쳤다. 아리타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되었다. 샐먼은 헛숨을 터뜨려 댔다. 네세라로 말하자면, 양산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자기 목에 걸린 목걸이를 거칠게 끌러 냈다.
“내가 그딴 개새끼한테 돈을 주고 물건을 샀다니!”
“음, 조금 진정하시죠. 아리타가 영애한테까지 겁먹겠어요.”
“이래서 남자는 안 된다니까요! 그것들은 세상에 해악만 끼쳐!”
“……제발 진정해요.”
이에샤는 네세라 같은 귀공녀를 처음 보았다. 아는 귀족 여자라고 해 보아야 밀레나와 셀더리, 알디온 저택을 찾던 몇몇이 다였으나, 네세라처럼 솔직하고―과격하고―시원시원하고―막가고―남자를 꺼리는―혐오하는―사람은 없었다.
네세라가 양산을 주워 들었다. 분을 참지 못하고 씨근덕댔다. 서슬이 시퍼렜다.
“좋아요, 이렇게 하지요.”
“예?”
“이 사람은 페리튼에서 책임지고 보호하겠어요. 앨저 경이 기즈를 고발하면 나도 증인으로 서죠. 필요하다면 밖에 있는 하인까지 더할게요. 우리도 그 족쇄를 본 사람들이니까.”
이에샤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네세라의 제안이 달갑기는 했다. 슈리가 편지를 무시당한 일과 ‘리타 밸리의 별’이라는 글귀의 뜻을 진술해도, 폭력까지는 목도하지 못했다. 증언할 수 없었다. 이에샤가 재판정에 선다고 먹혀들지도 몰랐다. 네세라가 뒷받침해 준다면 승소에 가까워지리라.
네세라 쪽에서 먼저 나서다니 놀라웠다. 귀찮은 사건이었다. 알디온 후작가와 사교계의 꽃인 밀레나를 적으로 돌리게 될 터였다. 이에샤야 바라는 바라손 쳐도, 네세라에게는 득될 게 없었다.
“아니, 괜찮겠어요?”
“뭐가요?”
“밀레나―내 동생이랑 아버지 그 작자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말 한 번 잘했어요, 앨저 경.”
네세라의 인상이 구겨졌다. 얼굴은 고운데, 낯빛은 맹수 같았다. 이에샤는 찔끔했다. 기세에 밀려 버렸다.
“알디온 측에서도 리타 밸리 시리즈의 더러운 속사정이야 몰랐겠죠. 하지만 알고도 자기 체면을 위해 그 무뢰한을 두둔하려 한다? 그건 제 손으로 명예를 진흙탕에 처박는 짓이나 마찬가지예요. 만일 그런 졸자들이라면 두려워할 것도 없답니다.”
“그 집안이 졸렬한 건 맞지만.”
“부디 알디온에서도 적극적으로 기즈를 지탄해 준다면 좋겠군요!”
‘그럴 일은 없을 텐데.’ 하면서도 고개를 주억였다.
아, 맞아! 네세라가 늑씨를 냈다. 무언가를 떠올린 모양새였다. 이에샤는 어리둥절했다. 집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라도 지났는가 싶었다.
“경비대에 신고부터 해야겠어요. 그 집 꼴을 보고 기즈가 도망치면 안 되잖아요.”
“아, 정말 그렇네요. 심판을 받게 하려면 붙잡아 둬야죠.”
“제가 시내로 돌아가 말하고 오겠습니다. 오래는 안 걸릴 거예요.”
네세라가 잰걸음으로 떠났다. 이에샤는 눈만 멀뚱멀뚱했다. 이상한 아가씨였다. 황궁에서도 백화 기사단에 호의적인 여자는 만났지만, 구경거리에 호기심이 동했을 따름이었다. 네세라처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독특하시죠? 샐먼이 중얼거렸다. 이에샤는 샐먼과 아리타 쪽을 돌아보았다.
“아가씨는 백작님처럼 작위를 이으신 분은 아니지만 집안을 다스리는 여주인이나 다름없으시죠. 자작님이 오래전에 몸져누우셨거든요.”
“그 얘긴 왜?”
“그러니 저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실 수가 있다고요. 이 의료원도 아가씨가 지어 주신 겁니다.”
놀랐다. 귀공녀가―불법이라고는 해도―의료원을 세우다니. 고상한 취미로, 해신교의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여자는 드물지 않았다. 덕성스러운 신붓감으로 결혼 시장에서 가치가 올라가기도 했다. 하지만 네세라는 사원에 인정받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어려운 사람을 돌보겠다는 포부와도 달라 보였다. 이에샤는 네세라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 냈다.
“페리튼 영애는 달신교 신도인가?”
“뭐, 딱 보면 알 만하죠? 아가씨는 남자를 워낙 싫어하셔서 여자 백성만 구민한다는 달신교 방침을 쌍수 들고 지지하십니다.”
우연이 대단했다. 네세라 페리튼은 슈리에게 리타 밸리의 별 시리즈를 알렸던 사람이었다.
그때, 듣기만 하던 아리타가 끼어들었다. 모깃소리로 웅얼거렸다.
“슈리는 지금 어디 있나요?”
“그야 사원에 있겠죠. 알드릭 기즈를 재판정에 세우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증인으로 나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마, 말씀 낮추세요! 나리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저기, 제 남편을 고발하시려는 건가요? 그, 정말, 정말 그러실 건가요?”
이에샤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리타의 반응이 께름했다. 저를 학대한 알드릭을 심판대에 올리겠다는데,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다. 꼴좋다고 웃어도 모자랄 마당 아닌가. 아리타는 안절부절못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백작님. 저희 부부 문제, 그냥 덮어 주시면 안 될까요…….”
이에샤는 눈을 홉떴다. 존대는 아리타가 불편해했으므로 말을 낮추었다.
“왜?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아?”
“미워도 복수하고 싶지는 않아요. 보, 보장이 없잖아요. 만약 잘 안 되면 전 더 큰 보복을 당할지도 몰라요. 차라리 도망가는 게 나아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숨어 사는 게. 저는 무서워요.”
“사람이 막막해도 싸워야 할 때가 있잖아. 피하기만 하면 뭣도 안 돼.”
답답했다. 이해하기 힘들었다. 노력하면 알드릭과 이혼할 수 있었다. 배상금을 받거나 감옥에 처넣을 수도 있었다. 무얼 망설이는지 몰랐다. 이에샤가 오스터나 밀레나에게 그렇게 앙갚음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터였다.
“하지만, 저는. 그냥 그한테서 도망칠 수만 있어도 족해요.”
“아리타. 당신한테는 남편을 응징할 권리가,”
“백작님.”
말허리가 잘렸다. 샐먼이었다. 이에샤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샐먼이 엄격한 눈빛을 띠었다. 네세라와 비슷한 위압감이 풍겨 나왔다. 이에샤는 움찔했다. 샐먼은 아리타의 어깨를 잡았다.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사람이 무언가 일을 할 때는 기운이 필요한 법입니다.”
“선생, 시간을 끌면 알디온 후작가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줄지도 몰라.”
“그게 당사자의 괴로움보다 중요합니까?”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제가 무얼 잘못했는지는 몰랐지만, 실수한 성싶었다. 재판이 그르쳐졌을 때 제삼자인 이에샤보다야 아리타가 겪을 곤욕이 크기는 하리라.
덤벼들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었다. 꾸물거려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숨통을 틔운 사람에게 더 힘내도록 다그쳐도 될까? 이에샤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행동하지 않으면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친절하시군요. 아리타에게 행동할 각오를 세울 시간을 주시면 됩니다.”
자신은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이 흘러넘쳤다. 샐먼은 미안스럽게 웃었다. 어려 보이는 백작님에게 너무했나 싶었다.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을 때였다.
아리타가 샐먼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에샤 앞으로 다가갔다. 이에샤가 얼굴을 들었다. 아리타의 몸이 숙어졌다.
“제가 겁쟁이라서 죄송합니다.”
“아니, 저기,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그리고 정말로 감사드려요. 족쇄가 끊어졌을 때 제 마음이 얼마나 벅찼는지 모르실 거예요.”
예상치 못한 소리였다. 입술을 깨물었다.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살갗이 따끈따끈했다. 입매가 근질거렸다. 평민의 감사 인사 따위 부질없었다. 성공하려면 귀족 사회에서 인정받아야 했다. 그런데도 기뻤다. 자기 힘으로 누군가를 구해 냈다는 사실이 퍽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