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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74화 (74/164)

00074 7. 리타 밸리의 별 =========================

루시온은 백화 기사단에도 선발 시험을 만들겠다고 했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일은 지금도 돌아갔다. 그래도 사람은 많을수록 좋았다. 스란처럼 검을 다루는 여자가 들어온다면 바랄 게 없었다. 사무는 미엘라만으로 족했다. 순찰이 버거웠다. 에브라힐 궁전을 걸어서 돌아보려면 일주일이 걸린다는 말조차 있었으니.

문득 궁금해졌다. 스란이 검을 잡은 까닭이. 어린 이에샤의 곁에는 셈브리온밖에 없었다. 셈브리온이 줄 수 있는 것은 검술뿐이었다. 스란은 누구에게, 어쩌다 검을 배웠을까? 미엘라는 동부에 가족이 있다고 했다. 백작가에서 일하다가 황궁의 하녀로 옮겼다고. 스란은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 이따금 암무 시절의 일화를 들려 줄 따름이었다.

역마차 정거장에 다다랐다. 시간표를 살펴보았다. 때를 잘 맞춘 편이었다. 10분 뒤에 떠나는 역마차가 있었다. 세리올 거리에서 내려, 조금만 기다리면 수도 북단 시장으로 가는 마차가 올 성했다. 저잣거리 뒤쪽에는 골목이 나게 마련이었다. 넉넉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평민이 모여 살기에 알맞았다. 피올라나 세톨트에 견주지는 못해도, 연립 주택과 작은 독챗집이 늘어서고는 했다.

마차 삯을 치렀다. 이륜마차에 올랐다. 또각, 또각,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에샤는 흔들리는 차체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았다. 바쁜 하루가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움직이는 동안에라도 쉬어야지 싶었다. 스치는 바람이 부드러웠다. 미지근한 공기에서 여름이 느껴졌다. 나무마다 신록이 우거졌다. 땅바닥에서 수영(樹影)이 춤췄다.

이토록 좋은 날에도 슬픔은 도사렸다. 아리타 말고도 숱한 이가 괴로워하리라. 그중 많은 수는 여자일 테고. 백화 기사로 일하면서 이에샤는 여자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알았다. 완력의 모자름은 치명적이었다―엘테르트는 받아들이지 못하겠지만. 완력과 무력은 권력으로 이어졌다. 하나 사람이란 집단적이어서, 힘을 갖추었더라도 같은 집단의 대부분이 그렇지 못하다면 권력을 쥘 수 없었다.

그 불공평을 깨야 했다. 이에샤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제가 강한데도 남자에게 짓눌리다니 싫었다. 슈리의 하소연에 마음이 동한 데에는 아리타에게 동질감을 느낀 까닭도 있었다. 예술에 관심이 없어, 여자 예술가가 남자의 이름을 빌리는 일이 흔할 줄은 몰랐다. 합의했더라도 그는 가로채인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여자가 성과를 빼앗기며 살았을까. 이에샤가 옐윈에게 당한 것처럼. 겔모어 평원 전투에 뛰어든 이들이 역사서에서 지워진 것처럼.

상념에 잠긴 사이 세리올 역마차 정거장에 다다랐다.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북단 시장’ 푯말을 단 쪽으로 옮겨 탔다. 세리올은 북쪽 깊숙한 거리였다. 시장까지 멀지 않았다. 반 시간이 걸리기 전에 기즈 부부의 집을 찾을 수 있을 성싶었다. 또다시 눈을 감았다.

볕이 따끈따끈했다. 졸음이 밀려왔다. 머릿속이 흐려졌다. 이에샤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용쓰지 않았다. 도착하면 깨어날 터였다. 잠기운에 자신을 맡겼다.

「네가 왜 나쁜 년이냐고? 못돼 처먹게 굴지 않으면 주변에서는 널 찍어 누르고 욕보이고 힘자랑하려고 난리일 테니까. 너처럼 외톨이인 계집애가 성깔머리라도 독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어.」

「이지를 갖추고 자비를 베푸십시오. 나는 앨저 경이 그런 기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국 기사 대부분이 실패했지만, 새로운 기사인 당신만은.」

「그대는 시류를 몰라. 까막눈이 따로 없어. 100년 전 사람도 그대보다는 야무지지 않을까? 사람이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알아야 제 앞가림하고 살 수가 있지.」

“……아가씨! 일어나십쇼, 아가씨!”

마부가 소리쳤다. 이에샤는 눈을 깜빡거렸다. 마부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귀티가 흐르는 여인에게―왜 역마차 따위를 탔는지는 모르겠지만―굽실거렸다. “어서 내리십쇼. 모시겠습니다.” 하며 난간에 달린 간이 문을 열었다. 이에샤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떨어진 곳에 사람으로 북적이는 저자가 보였다. 북단 시장이었다.

꿈을 꾸었다. 내용은 흐리멍덩했다. 꿈이라는 게 그런 법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땅에 내려섰다. 마부에게 까딱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성큼성큼 걸었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에샤를 힐끗거렸다. 도리 없었다. 짧은 머리카락에 사내애처럼 멀쑥한 키, 귀족적인 차림새. 시장 바닥에서 눈길을 사로잡을 만했다. 백화 기사단 정복만 아니었어도 덜했으리라. 오늘은 일부러 차려입었다. 알드릭을 압박하기 위하여.

기즈 가(家)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한 단독 주택 앞에 야유회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섰다. 하인까지 거느렸다. 길이 좁아서 마차는 두고 온 모양이었다. 여자의 목에서 ‘리타 밸리의 별’ 목걸이가 빛났다. 알드릭에게 물건을 사거나 주문하러 온 귀족이 틀림없었다.

여자가 이에샤를 돌아보았다. 고양이와 닮은 적갈색 눈이 커졌다.

“백화 기사?”

“저를 아십니까?”

이에샤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낯설었다. 황궁에서도 만난 적 없을 터였다. 스란이나 미엘라를 아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기사단 옷을 입었으니까. 귀찮은 티를 숨겼다. 약식으로 예를 갖추었다. 그녀도 더러운 거리에서 드레스를 펼치기는 꺼림칙했는지, 윗몸만 숙여 보였다.

“소문을 들었을 뿐이에요. 그런 코트에 바지를 입는 여자가 제국에 얼마나 있겠습니까?”

“아, 예. 바보같은 질문을 했군요. 백화 기사단장 앨저 백작입니다. 귀녀는 이 집에 무슨 볼일이신지?”

“페리튼 자작가의 네세라예요. 앨저 경도 기즈의 세공품을 구하러 온 게 아니신가요?”

이에샤는 멈칫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네세라는 도도하고 사나운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몸가짐은 점잖았다. 이에샤도 꺼림 없이 대했다. 얼굴만 보아서는 신나게 아랫것을 매질할 생김인데, 하인이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이에샤를 째렸다. 아가씨를 지키겠다는 뜻이 뚜렷했다. 이에샤는 ‘편견이란.’ 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페리튼 영애와는 좀 다른 목적으로 왔습니다. 세공품이 아니라 기즈와 그 아내한테 볼일이 있어서요.”

“아내요?”

네세라가 눈썹을 치켰다. 터무니없어하는 반응이었다. 이에샤는 어리둥절해졌다.

“이상하군요. 이 집에 아내는 살지 않을 텐데.”

“예?”

“딸이 죽고 아내도 집을 나갔다고 들었습니다만. 앨저 경께서 무언가 잘못 알고 오신 게 아닌지요?”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대꾸하려다가 주춤했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리타가 집을 나갔다면 슈리의 편지가 무시당한 것도 당연했다. 알드릭도 세공사라고 하지 않았는가? 리타 밸리의 별 시리즈가 정말로 알드릭의 작품이고, 글귀 또한 아내와 딸을 그리워하는 의미일지도 몰랐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심하자면 끝도 없었다.

“죄송하지만 페리튼 영애, 오늘은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백화 기사로서 기즈 부부에게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요.”

“경, 요즘 기즈의 세공품 인기를 몰라서 이러시나요? 예약이 꽉 차서 직접 발걸음한 처지예요. 저희 막내가 다음 파티 때 꼭 리타 밸리의 별을 차고 나가야겠다고 사흘째 밥을 굶는답니다.”

“급한 일입니다.”

“저도 급해요.”

네세라가 턱을 쳐들었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고혹적이었다. 밀레나만은 못해도 미인이었다. 이에샤는 사람이 예쁘면 무슨 말을 해도 호소력이 생기는구나, 깨달았다―제가 엘테르트에게 약한 것도 자연한 일이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네세라 페리튼은 물러날 셈이 없어 보였다.

“그럼 함께 들어가서 순서대로 용무를 보도록 하죠. 문을 두드리겠습니다.”

“어머! 그런 일은 제 하인에게 맡기시죠. 귀하신 분께서 어쩜.”

“괜찮습니다. 별일도 아니고.”

초인종은 보이지 않았다. 평민의 집이었다. 이상할 것 없었다. 무쇠로 된 문고리를 쥐었다. 텅텅! 문짝에 부딪쳤다.

잠잠했다. 몇 번을 노크해도 마찬가지였다. 네세라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없나 보네요. 주말이니 집에서는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기야 요즘 수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일 테니까요.”

“아니에요.”

“네?”

이에샤의 미간이 죄어들었다. 미심스러웠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으므로―쩔그럭대는 쇳소리와 함께. 사람이 집 안을 오가는 중이었다. 분명했다.

‘한 명뿐이야. 부부 중 한쪽은 집을 비웠다.’

아리타는 갇혔을지도 모르는 처지였다. 나간 사람은 알드릭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샤는 커다랗게 외쳐 보았다.

“아리타! 안에 있습니까? 아리타 기즈!”

달라진 점은 없었다. 고요할 따름이었다. 네세라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듯, 입을 다물었다. 이에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에샤는 거듭 목청을 돋웠다.

“아리타! 슈리의 부탁으로 온 사람이에요!”

“……!”

그때, 이에샤의 감각에 반응이 잡혔다. 똑똑히 들었다. “사람 살려요!” 하는 소리가 났다. 더는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제 판단이 들어맞았다. 흥분과 걱정이 뒤엉킨 채 피어올랐다. 허리띠의 검을 끌러 냈다. 네세라가 “꺅!” 하며 뒷걸음질했다. 이에샤는 개의치 않았다. 검을 추어올렸다.

브링으로 벼린 칼날이 비스듬하게 움직였다. 네세라는 숨을 집어삼켰다. 두꺼운 나무문이 망치라도 때려 박은 양 터져 나갔다. 이에샤는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네세라가 뒤쫓아 왔다. 보기보다 겁이 없는 아가씨였다.

“세상에.”

탄식이 네세라의 입술을 비집었다. 이에샤도 아연실색했다. 작업실로 보이는 방에 여자가 주저앉았다. 비쩍 여윈데다 온몸에 멍자국이 가득했다. 한쪽 발목에는 시커먼 족쇄가 매달렸다. 쇠사슬이 침실로 이어졌다. 아리타는 겁을 집어먹었다. 문이 부서져서 놀란 모양이었다. 이마를 부여잡고 웅크렸다. 어깨가 버들거렸다.

이에샤는 조심조심 아리타에게 다가갔다. 아리타가 엉덩이걸음으로 달아나려 했다. 이에샤가 한 박자 빨랐다. 아리타의 팔목을 붙들었다. 아래로 끌어내렸다. 눈가가 팬 얼굴이 드러났다. 이에샤는 만들 수 있는 가장 상냥한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구하러 왔습니다. 당신 친구의 부탁으로.”

아리타가 머리를 들었다.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얽혔다. 이에샤의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화들짝 고개를 내렸다. 살이 빠져서 볼가진 눈망울에 물기가 어렸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귀, 귀족 나리. 죄송, 절을 못 올려서 소, 송구합니다. 이건, 저는, 제가 바라서 이런 꼴을 한 게 아닙니다. 용서해 주세요.”

“아리타? 왜 그래요?”

“……그, 그렇게 들여다보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이에샤는 얼떨떨해졌다. 구원이 왔다. 마음 놓고 기뻐해야 마땅했다. 아리타는 뺨을 시뻘겋게 붉히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때, ‘팍’하는 소리가 울렸다. 뒤쪽을 돌아보았다. 네세라가 들고 다니던 양산을 펼쳤다.

“페리튼 영애?”

“비켜 주시겠어요?”

싫다고 말하기 어려운 기세가 풍겨 나왔다. 이에샤는 자기도 모르게 물러섰다. 네세라가 아리타에게 다가갔다. 양산을 아리타의 곁에 놓았다. 볼품없이 마른 몸이 가려졌다.

“창피하게 하면 못 써요.”

“어, 음. 죄송합니다.”

이에샤는 머쓱히 사과했다. 아리타가 제 몰골을 감추고 싶어 할 줄은 몰랐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뿐인데, 왜 피해자가 부끄러워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리타는 네세라 덕분에 편해진 듯했다.

네세라가 한 손바닥으로 뺨을 감쌌다. 고민스럽게 중얼거렸다.

“이 족쇄부터 끊어야 하지 싶은데, 열쇠는 그 남자 손에 있을 테고. 경비대를 불러야 하나…….”

“아, 그런 거라면 제가 해결하죠.”

이에샤는 달갑게 끼어들었다. 방금의 실수를 바로잡을 길이 보였다. 검을 들어 올렸다. 네세라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하고 외치기도 전에, 새파란 빛이 번뜩였다. 파열음이 터졌다.

네세라와 아리타는 끊어진 쇠사슬을 멍하니 보았다. 이에샤가 검을 허리띠로 되돌렸다.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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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세라 페리튼 아가씨의 이름은 70화에 스치듯 나왔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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