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3 7. 리타 밸리의 별 =========================
(연참 2/2)
미엘라는 ‘듣겠습니다.’ 하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이에샤는 침을 삼켰다. 라제카에게 했던 하소연을 되풀이하려니, 목이 말랐다. 시더를 부를까도 싶었다. 그만두었다. 차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웠다.
십여 분이 걸렸다. 이야기를 마쳤다. 미엘라는 묵묵했다. 중간부터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이에샤의 입이 닫히고도 골몰스러웠다. 이에샤는 초조해졌다. 라제카 공주는 미엘라가 길을 일러 줄 것처럼 말했다. 기대해도 괜찮을까? 미엘라는 이에샤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평민 출신이기도 했다. 걱정되었다.
조금 뒤, 미엘라의 낯에 자신만만한 빛이 번졌다.
“공주님의 의도를 알겠어요. 역시나 공주님이네요. 적절한 방법을 찾아내셨어요.”
“그게 정말이야? 어서 말해 봐.”
“먼저 앨저 경.”
미엘라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싸구려 종이와 펜을 꺼냈다. 긴 설명을 시작하려는 모양새였다. 이에샤는 탁상을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잉크가 종잇장에 그림을 이루었다. 동그라미 주변을 둘러싼 빗금―해와 초승달이었다. 알기 쉬웠다. 미엘라는 해 그림 아래에 숫자를 적어 나갔다.
“교단에서 서품을 받은 사제의 증언이 몇몇 재판정에서 강력한 효력을 발휘한다는 걸 아세요? 때때로 다 나온 판결을 뒤집기도 할 정도래요.”
“으음, 전혀 몰라.”
“저도 자세한 까닭은 몰라요. 대충 읽어서……. 우선 해신교 같은 경우에는 재산법에 영향력을 가져요.”
1번 옆에 ‘재산’이라는 낱말이 쓰였다.
“해신은 황금의 신이잖아요. 소망을 권장하되 탐욕은 금하니까요, 남의 재물을 탐한―그러니까 도둑이나 사기꾼이요. 그런 죄를 물을 때 해신교 사제를 뒤에 업는다면 필승한다는 말까지 있대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성직자라고 다 깨끗하고 믿음직하다는 보장이 어디 있다고?”
“그래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죠.”
산뜻하게도 뱉었다. 매수된 해신교 사제가 거짓으로 판결을 이끌어 내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이에샤는 질린 눈빛을 띠었다. 미엘라는 때때로 신랄했다.
“두 번째는 마법법. 마법은 해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라고 하니까요. 마법 범죄 자체가 드물다 보니 유명무실하지만.”
“세 번째는?”
“그것도 친족법 쪽인데, 간음한 자를 처벌하고 이혼을 허락할 수 있어요. 결혼은 사원의 주관이니까.”
마지막으로 달 그림 아래에 몇 글자가 적혔다. ‘모두 다’.
“이 관습의 특이한 점은 해신교보다 달신교가 더 유리하다는 거예요.”
“내 입으로 말하기도 뭣하다만, 달신교 주제에?”
“신벌이 있잖아요.”
이에샤는 “아.” 하고 깨달은 소리를 냈다.
달신은 자식을 애지중지했다. 동시에 불신자에게 차가웠다. 달신의 사제를 겁간하려던 남자가 벼락에 맞은 일화는 유명했고, 흔했다. 떠돌며 수행하느라 굶주린 사제에게 물 한 방울 내주지 않은 영감은 다음날 곳간이 무너졌다 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달신 사제를 핍박하려는 멍청이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여신이라 속이 좁다.’ 하고 쑥덕댔으나, 달신교 사제들은 자부심을 품었다. 벌받을 짓을 삼가면 되는 일이 아닌가?
“양 교단 모두 정직을 미덕으로 삼잖아요. 달의 사제를 불신하는 건 그녀의 신실함을 욕보이는 것과 같아서, 증언을 무시한 재판장이 신벌을 받은 사례가 몇 있대요. 성불구자가 됐다나.”
“흥미롭네.”
“그렇죠?”
달신교는 폐쇄적이었다. 세상사와 얽히는 일이 적었다. 정재계에 끼어드는 해신교와는 달랐다. 의당 재판정과도 인연이 없었다. 달신교 사제가 증인으로 선 예는 희귀했지만, 선다면 판결을 쥐락펴락할 수가 있었다. 사제가 거짓을 고한다면 신벌은 그쪽으로 향했다. 신이 뒷받침하는 진술인 셈이었다.
“앨저 경께 도움을 청한 분이 수녀가 아니라 달신 사제라면 사실 입증은 따 놓은 당상이에요. 공주님 뜻은 그거겠죠.”
“올센 경은 어떻게 이런 정보를 다 알지?”
“책에서 봤어요.”
이에샤는 눈을 끔뻑였다. 자신은 책을 읽는다고 내용까지 읊지는 못했다. 신통스러웠다.
“읽은 책을 모두 기억하고 있나?”
“헤헤, 대충은요.”
미엘라는 쑥스럽게 웃었다. 이에샤는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였다.
기실 미엘라의 재능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살면서 보고 들은 지식이 머릿속에 고스란하여, 원할 때마다 꺼낼 수 있었으니. 미엘라는 빼어난 기억력을 지녔다. 덕분에 어린 공주가 시며 셈을 배울 때 도둑 공부도 해내게 되었다.
이에샤의 감각은 엇나간 구석이 있었다. 제가 아무리 복잡한 검로라도 한 번 보면 꿰뚫었으므로, 미엘라도 비슷하겠거니 여길 따름이었다. 남이 안다면 참으로 재수없어 하리라.
“제삼자에 의한 강제 이혼 조항으로 알드릭 기즈를 고발하고, 증인으로 그 사제님을 내세우세요. 모든 게 진실이라면 세공사를 구할 수 있어요.”
“모든 게 진실이라면…….”
이에샤는 나직이 되뇌었다. 라제카에게 큰소리치고 온 뒤였다. 하나 덜컥 겁이 났다. 슈리가 밀레나의 사주를 받은 사기꾼이라면? 기즈 부부의 관계에 문제가 없다면? 아리타가 멀쩡하다면? 자신이 틀렸다면 큰일이었다. 아무것도 벌이지 않은 지금 발을 빼야 옳은지도 몰랐다.
마음을 다잡았다. 슈리와 제 판단력을 믿기로 했다. 이 사건은 백화 기사단을 이롭게 할 것이다. 밀레나에게 한 방 먹일 수도 있었다. 이득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이었다.
“앨저 경?”
“올센 경.”
“왜 그러세요? 표정이 안 좋으셔요.”
“우선 경은 이 일을 모르는 거로 해 두자. 뭐가 삐끗했을 때 책임을 지더라도 나 혼자 질 수 있게.”
미엘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을 그르친다면 이에샤에게 방법을 일러 준 저도 무사하기 힘들었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에샤보다 라제카에게 걸고 부담을 무릅쓴 터였다. 이에샤가 마음을 써 줄 줄은 몰랐다.
“물론 잘 풀린다면 경의 기여를 밝힐 거야.”
“구,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저는 괜찮은데요. 앨저 경 혼자 하신 일로 하셔도, 어차피 전 그냥 하녀였던 계집애고.”
“난 비겁하게 남의 공로를 훔치지 않아.”
이에샤는 딱딱하게 못박았다. 목소리에 노기마저 배었다. 미엘라는 흠칫했다. 라제카와 엘테르트만이 아는 사실이었지만, 옐윈에게 공을 가로채인 일은 이에샤 속에 응어리로 남았다.
고개를 털었다. 지나간 일을 곱씹어 보았자였다. 옐윈 리토스에게는 차차 앙갚음해 줄 셈이었다. 지금은 미엘라와 이야기를 끝내야 했다.
“나도 귀족이긴 하지만 사실 귀족들에 대해 잘 몰라. 별로 곱게 자라지 못했거든.”
“예?”
“하지만 알디온 개자식들이,”
“예?!”
미엘라는 상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이에샤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체면치레에 죽고 사는 꼴은 많이 봤지. 다른 귀족이라고 다르지 않을걸? 그네들이 좋다고 사들였던 액세서리가 사실은 평민 여자 하나 착취해서 나온 거라고 하면 들고 일어날 게 뻔해.”
“그, 그건 그렇겠네요. 아무래도 사기당한 거니까.”
“일이 잘되면 공식적으로는 아니어도, 사교계에서 백화 기사단 이름이 단숨에 알려질 거야.”
그렇게 말하고 이에샤는 미소했다. 아직도 여자 기사를 망측하다 거리끼는 이가 많았다. 백화 기사는 여인을 보살펴야만 했다. 리타 밸리의 별 시리즈를 산 귀부인과 귀공녀에게 인상이 좋아진다면 다행이었다. 할 일이 늘어나고, 인정받을 기회도 따를 것이다.
“고마워. 공주님과 올센 경 덕분에 빛이 보여.”
“저, 정말 터뜨리실 건가요? 전 앨저 경이 잘못될까 봐 겁나요.”
“경이 길을 터 줬으니 기즈를 고발할 구실은 내가 찾을 거야. 물증이 없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죽도 밥도 안 돼.”
렌디드 자작 사건을 돌이켰다. 엘테르트가 돕지 않았더라면 베빈으로부터 사정을 듣지 못했으리라. 무도회 전에 베빈을 구슬렸어야 했다. 이에샤는 뭉그적대는 태도가 바보스럽다는 걸 알았다. 정의감 때문이 아니어도 좋았다. 밀레나를 공격하면서 사람도 구할 수 있다면 양득이 아니겠는가?
계획을 세웠다. 알드릭 기즈를 찾아가 볼 셈이었다. 짐작대로 아리타가 갇힌 채라면 집을 뒤지는 편이 빨랐다. 이에샤는 처음으로 제가 귀족이라서 잘되었다고 느꼈다.
* * *
「백화 기사단장, 앨저 경께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말씀하신 방법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달신의 신벌은 세간에 알려진 바처럼 마구 내려지는 게 아닙니다만, 다른 사제님께 물어보니 우리가 재판정에서 존중받는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이런 정보를 어찌 아셨을까요?
아리타는 분명 변을 당한 것입니다. 이 수도에서 리타 밸리라는 별명과 아리타의 딸 이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제가 나서야만 합니다. 각오를 굳혔습니다. 알드릭 기즈를 고발해 주십시오. 황명으로 부른다면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하급 사제라도 나가야만 합니다. 재판 참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와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는 아리타가 기즈를 소개시켜 줬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리타의 부모님께 지은 죄를 이제야 갚겠군요. 알아듣기 힘드실 말 죄송합니다.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리타와 알드릭이 사는 곳은 ―――――입니다.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좋겠네요. 행운을 빕니다.
달의 딸, 슈리」
델피르력 753년 5월 29일. 오월의 마지막 일요일. 이에샤는 편지를 갈무리했다. 필요한 것은 갖추었다. 백화 기사단 정복―평민에게는 위압적이리라. 검. 기즈 부부의 집 주소. 셈브리온이 싼 도시락.
셈브리온이 다가왔다. 이에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잿빛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쓴웃음이 나왔다. 제자는 나날이 세상에 부딪치려고 했다. 이번에는 백화 기사로서의 일도 아니고, 평민 여자 한 사람을 구하겠다고 나섰다. 셈브리온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난 이-샤가 정말 이런 귀찮은 일 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어.”
“세비는 기력이 딸리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기력이 딸리냐?”
“늙어서.”
이에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셈브리온의 손날이 지나갔다. 맞더라도 아프지는 않겠으나, 기분 문제였다. 셈브리온이 인상을 구겼다.
“됐다. 이왕 하겠다고 마음먹은 거 얼른 가기나 해.”
“화났어?”
“내 살다 살다 곱게 키운 딸이 법정 싸움을 하겠다고 설치는데 화가 안 나겠냐!”
“내가 하는 것도 아닌걸 뭐.”
이에샤는 어깨를 으쓱했다.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셈브리온의 속도 모르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걱정을 끼쳐 버려서 미안했다. 하지만 시작한 일을 그만두기는 싫었다. 셈브리온은 한숨을 쉬었다. 옛날의 이에샤라면 “안 돼.” 하고 막은 일을 고집하지 않았다. 기사가 되고 많이도 바뀌었다.
“……늦지 않게 들어와. 사람 조심하고.”
“세비는 가끔 내가 내년이면 성년이라는 걸 잊는 거 같아.”
이에샤의 대꾸는 명랑하기만 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바깥으로 나섰다. 편지에 쓰인 주소는 제법 떨어진 곳이었다. 역마차를 한 번 이상 갈아타야 했다. 서둘러야 할 성싶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머릿속으로는 앞으로의 일을 그렸다.
‘글피면 여름철 시험이구나.’
제국 기사단 입단 시험이 다가왔다. 이에샤와는 동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감개가 깊었다. 기사가 되고 반년이었다. 여러 사건을 겪었다. 백화 기사단도 조금씩 황궁에 녹아들어 갔다. 이번 일이 박차를 가해 주기를 바랐다.
‘우리 기사단도 빨리 등용문이 생기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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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쉬고 싶어서 두 편 써 왔습니다.
여독 때문인지 몸도 아프고 제 글에 자신도 없습니다...힘이 듭니다...내일 하루만 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