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1 7. 리타 밸리의 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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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타의 아버지―리처드는 솜씨 좋은 귀금속 세공사였다. 서부의 대도시에서 공예방을 꾸릴 정도였다. 그러나 일에 파묻힌 탓일까? 아리타가 세 살배기일 적에 시력이 나빠졌다. 리처드는 집과 공예방을 정리했다. 아내와 딸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갔다. 산골에 터를 잡았다. 시끄러운 도시에 질려서라고 했지만, 초라해진 자신을 숨기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미련이란 떨쳐 내기 힘들었다. 리처드는 아리타에게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리타의 재능은 훌륭했다. 아버지가 시범조차 못 하고 설명만 늘어놓아도, 곧잘 알아들었다. 습작품마다 나름의 맛이 있었다. 리처드는 아리타가 초야에 묻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런 남자와 결혼해서 세공을 그만두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는 아리타에게 튼튼한 옷을 입혔다. 산기슭 마을로 나갔다. 잡화상에 아리타의 공예품을 보여 주었다. 장수는 어린 계집애가 만든 허섭스레기를 살 돈이 있겠냐며 손사래 쳤다. 리처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칭얼거리는 딸을 추슬렀다. 소도시를 향했다.
그곳의 공예방에서도 아리타는 업신여김당했다. 변변찮은 계집애 따위를 도제로 받아 달라니요? 여기가 보육원인 줄 압니까? 리처드는 꿋꿋이 버텼다. 본인부터가 괜찮은 세공사였다. 아리타의 작품이 정교하다는 것쯤은 침침한 눈으로도 알 수 있었다. 대도시로 방향을 잡았다. 마차를 타고 하루 꼬박 달렸다.
그곳의 보석상은 리처드를 알았다. 리처드는 자기 이름을 대 보았다. 이 물건을 사 줄 수 있겠소? 보석상은 웃으며 물었다. 실력이 이리 멀쩡한데 왜 은퇴했느냐고.
비로소 리처드는 좌절했다. 세간의 눈이 실력보다 누가 세공했느냐에 따라 갈리는 데 환멸을 느낀 듯했다. 반대로 아리타는 희망에 찼다. 아버지의 이름을 빌리면 저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인 체한다면. 연륜 깊은 어른과 치기만만한 어린아이의 차이였다.
리처드는 아리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아리타는 열네 살 무렵부터 리처드로서 작품을 냈다. 나쁘지 않았다. 고정적으로 납품하는 가게도 생겼다. 죽마고우이자, 사제님이 될 슈리에게만 제 이름으로 쇠붙이를 만들어 주고는 했다. 그것이 아리타의 낙이었다. 소탈하지만 행복했다. 열여덟 살이 되어서는 손수 장신구를 팔러 다녔다. 도시 구경이 재미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단골 보석상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서글서글하고 어리숙한 사람이었다. 돌봐 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수줍음을 타는 모습이 귀여웠다. 세공사 동지이기도 했다. 아리타는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졌다.
이상한 점이 있기는 했다. 알드릭은 한 번도 아리타에게 작품을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 쑥스럽다기에 그러려니 했다. 사랑이 아리타의 눈을 흐렸다.
리처드는 길길이 뛰었다.
「아비는 네가 세공으로 밥벌이했으면 해서 내보낸 거지, 웬 머저리나 만나고 다니라고 한 게 아니다!」
아리타는 모질게 뻗댔다. 아버지와 갈라설 다짐마저 했다. 아리타에게 알드릭은 놓쳐서는 안 될 운명처럼 느껴졌다. 믿고 기대며 잘 살 자신이 있었다. 결국은 1년 뒤, 아리타와 알드릭은 도망쳤다. 슈리는 넋을 놓은 리처드에게 아리타의 행선지가 적힌 편지를 보여 주지 못했다.
사랑과 우정이 세상의 전부 같았던 시절이었다.
“후우…….”
눈이 침침했다. 손톱만 한 은붙이에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하던 차였다. 요즈음 알드릭이 물고 오는 일감이 산더미 같았다. 진종일 세공 도구를 붙잡아도 모자랐다. 알드릭은 네년이 굼떠서 주문량에 맞추기가 어렵다고 신경질을 냈다. 아리타는 잠잘 시간도 아껴 가며 작업실에 틀어박혀야 했다.
알드릭은 형편없는 남자였다. 세공사라는 낱말을 붙여 주기도 무엇했다. 갓 들어온 도제처럼 엉성한 물건밖에 만들지 못했다. 아리타는 속았음을 알아차리고도, 알드릭을 두둔했다. 사람이 부끄러우면 거짓말할 수도 있는 법이라고. 그러지 않으면 아버지를 저버리면서까지 알드릭과 도망한 제가 바보같았으니까.
알드릭이 공예품을 자기 것으로 팔겠다고 했을 때도 받아들였다. 원래도 막후에서 일하던 터였다. 남편의 이름을 뒤집어쓴다고 무어가 달라질까 싶었다. 어찌됐든 부부가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아리타는 참았다. 알드릭이 “네년 실력이 모자라니 우리가 가난뱅이 신세인 거다!” 하고 욕해도. 세공 좀 한다고 으스대는 거냐며 주먹을 휘둘러도. 아이가 태어난 까닭이었다. 딸을 위해서라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아리타의 천사는 두 돌 만에 하늘로 돌아갔다. 에노미아가 살았더라면 아리타는 고분고분했을 것이다. 아니, 열 오른 에노미아 옆에서 알드릭이 쿨쿨 자지만 않았어도. 아리타는 쌓인 미움을 터뜨렸다. 세공을 그만두겠노라 선언했다.
알드릭은 아리타를 모질게 때렸다. 터진 고막이 아물고, 아리타는 집 안에 갇혔다. 죄수에게나 채울 법한 무쇠 족쇄로 발목이 묶였다. 알드릭이 없을 때 아리타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침실과 작업실뿐이었다.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슈리가 수도로 올라왔으나, 사원에 매인 몸이었다. 불러들이기 어려웠다. 처한 상황만이라도 알리고 싶었다. 아리타는 아침 식사 중에 수프 그릇을 엎었다. 뜨거운 국물이 손―기즈 부부의 밥줄로 쏟아졌다. 알드릭은 아리타를 의료원에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리타는 소맷자락에 은반지 한 개를 숨겼다.
대합실에서 알드릭은 심드렁했다. 아리타를 걱정하기는커녕,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아리타는 모르는 여자아이에게 반지를 쥐여 주었다. “돈 대신 달신교 대사원의 슈리 사제한테 아줌마 편지를 좀 부쳐 줘.” 하면서. 그 자리에서 긴 글을 쓸 수는 없었다. 허겁지겁 에노미아가 죽었다는 내용만을 적었다.
그날부터 아리타의 작품에 ‘리타 밸리의 별’이라는 글귀가 들어갔다. 알드릭이 무슨 뜻이냐고 캐묻기는 했다. 아리타는 에노미아를 기리는 것뿐이라고 둘러댔다.
…….
4년이 흘렀다. 슈리의 답장도, 구원도 오지 않았다. 아리타는 체념했다. 발목을 옥조이는 족쇄에도 익숙해졌다. 이제는 습관적으로 은붙이에 글귀를 새길 따름이었다.
* * *
새로운 주일이 밝았다.
이에샤는 계획을 곱씹었다. 라제카 공주에게 슈리의 사정을 전할 셈이었다. 신년맞이 무도회를 돌이켜보았다. 엘테르트는 베빈과 렌디드 자작을 이혼시켰었다. 같은 수가 통한다면 쉬웠다. 아리타 또한 알드릭 기즈로부터 빼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엘테르트나 루시온은 물론, 이오르 황제에게도 충언을 올리는 라제카라면 알지 않을까.
에브라힐 동쪽으로 접어들었다. 익숙한 길을 밟았다. 십여 분 뒤 석곡궁이 나타났다. 사무실에 얼굴을 비치고, 서향궁으로 움직일 요량이었다. 아침부터 어린 공주를 찾다니 무엄스러웠다. 라제카가 활발한 탓이었다. 피크닉을 나가거나 다른 별궁에 놀러 가기 전에 만나야 했다.
석곡궁 앞에 다다랐다. 이에샤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훤칠한 금발 청년이 걸어왔다.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보고 부시게 웃었다.
“멘델린 경?”
“안녕하십니까, 앨저 경. 만나러 가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마주치는군요.”
“저를요? 무슨 일이죠?”
이에샤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엘테르트를 보니 기분이 좋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설레거나 가슴이 뛰지는 않았다. 마음은 순조롭게 잦아들어 갔다. 엘테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싱글벙글했다. 옆구리에 낀 책을 들어 올렸다. 표지를 이에샤에게 보여 주었다.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애 같았다. 이에샤는 고개를 기울였다.
“지난번 저한테 시황제에 관해서 물어보지 않았습니까? 도서관에 들른 김에 생각나서 아벨테오노 황제를 다룬 역사서나 한 권 빌려왔습니다. 쉬운 책입니다.”
“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라제카로부터 여자도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엘테르트에게도 아느냐 물었었다. 한 달이 되어 가는 일이었다. 기억해 주었다니. 이에샤 자신은 까맣게 잊고 지냈다.
이에샤의 궁금증은 시황제 관련이 아니라, 여성의 참전이 겔모어 전투 말고도 있었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엘테르트의 마음은 고마웠다. 엘테르트는 연애하지 않더라도 좋은 사람이었다.
“고마워요. 사무실로 들어가서 차라도, 아.”
“왜 그럽니까?”
“저, 제가 오늘은 볼일이 있다는 걸 깜빡했네요. 느긋하게 얘기할 시간이 안 돼요.”
라제카부터 보아야 했다. 엘테르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책만 전해 주고 갈 셈이었습니다. 오늘도 할 일이 많고, 앨저 경 일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
“……방해 아닌데요.”
“예? 뭐라고 했습니까?”
이에샤는 입술을 옥깨물었다. 호감정을 내보이기란 힘들었다. 엘테르트뿐 아니라 루시온이나 라제카, 시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살가운 말을 떠올리면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졌다. 셈브리온 앞에서는 갖은 소리를 할 수 있는데.
“방해 아니라고요. 멘델린 경이 찾아오는 거. 한 달에 몇 번 오지도 않으면서 뭐 그런 생각까지 해요?”
“아, 그, 그렇습니까. 난 앨저 경이 불편할 줄 알았습니다. 내가 경한테 실수를 너무 많이 저질렀다 보니.”
이해할 수 없었다. 엘테르트는 남이 잘못하더라도 사과하면 넘어가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나간 일로 전전긍긍했다. 다른 사람과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딴판이었다. 보통은 반대가 아닌가.
“다 사과했잖아요. 다음에 꼭 얘기 나눠요. 책은 잘 읽고 직접 반납할게요.”
“알겠습니다. 일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찾아오십시오. 앨저 경이 오면 무조건 안으로 모시라고 송악궁 관리자한테 말해 두었습니다.”
이에샤는 움찔했다. 특별하게 대접받는 것만 같았다. 기분이 야릇했다. 이에샤가 기사단장으로서 미숙하니 돕겠다는 뜻일 터였다. 제멋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머리가 한심스러웠다.
일순간 ‘리타 밸리의 별’의 진실을 털어놓아 볼까도 생각했다. 이에샤에게는 엘테르트만 한 상담자가 없었다―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누구든 보듬으려는 성정만 아니었다면. 엘테르트가 밀레나를 감쌌다가는 기분이 바닥에 처박힐 듯싶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지만 멘델린 경, 별달리 어려운 일은 없네요.”
짤막하게 대꾸했다. 윗몸을 숙여 인사했다. 석곡궁의 정문을 지나쳤다. 작약이 흐드러진 정원으로 들어섰다. 다리를 서둘렀다. 머릿속에는 슈리와 아리타의 일만이 가득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석곡궁 어귀를 바라다보았다.
============================ 작품 후기 ============================
새로운 챕터를 시작할 때...이야기의 순서나 복선 등을 읽는 분들이 재미있게끔 배치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전개가 난잡하지만...어쨌든 재미있으셨으면 좋겠어요...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