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0 7. 리타 밸리의 별 =========================
사제를 이끌었다. 한 발자국 앞장섰다. 오가는 사람과 스치지 않도록 방향을 잡으며 나아갔다. 황궁에서 귀부인을 안내하며 익은 버릇이었다. 사제는 숙녀 대접이 처음이었다. 황송해하며 뒤쫓았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까닭을 물으려다가, 앞서 알아야 할 것을 깨달았다.
“사제님 이름을 못 들었군요. 가르쳐 주겠어요?”
“아, 이름. 슈리라고 해요. 서품을 받은 지 5년밖에 안 돼서 얼굴을 보일 수 없는 점 죄송합니다.”
“꽤 늦게 사제가 됐나 보네요.”
드러난 입매와 목소리로 헤아려, 슈리는 이십 대 후반쯤 된 성싶었다. 도서관에서 읽은 달신교 교의학 책을 떠올렸다. 달신의 딸은 서품을 받고 10년간 얼굴을 가려야 했다. 생김새의 미추로 사람을 따지는 세속적 면모를 버리기 위함이라고. 하급 사제 대부분이 열일고여덟 살에 임명받는 걸 생각하면, 슈리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달신교 교리에는 생소한 조목이 많았다. 달신이 해신에게서 태어난 해신의 보좌일 뿐이라는 상식부터가 달랐다. 달신은 해신과 함께하면서 해신의 권능이 미치지 못하는 일을 돌보며, 둘은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이에샤는 독서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나 라제카가 골라 준 책―‘멍청한 남자들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달신 이야기’―은 재미있었다.
“저는 원래 고향에서, 서부 시골 출신이거든요, 그곳 작은 사원에서 수행했는데 서품을 받기 전에 어머니가 급병에 걸리셨어요. 몇 년은 어머니 간병 때문에 수행을 멈췄죠. 수도로 올라와서 남은 기간을 채우고 대사원에서 서품을 받은 거예요.”
“모친은 쾌차했나요?”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오래 버티셨죠.”
“저런. 세상사 어디나 비슷하네요.”
이에샤와 슈리는 태연했다. 다섯 해가 넘은 일이었다. 이에샤는 몰랐지만, 슈리 어머니의 졸년은 8년 전이었다. 에이릴리와 비슷했다. 두 사람 다 슬픔은 무뎌졌다. 모친상을 어머니가 맞은 죽음보다 자신이 겪은 사고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뒤처리할 일이 많았으니까.
카페테리아에 다다랐다. 점심때가 끝나 가는 무렵이었다. 한산했다. 시끄럽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뭐 먹을래요? 이에샤의 물음에 슈리는 손사래를 쳤다. 입맛이 없었다. 이에샤는 “그럼 자리잡고 있으세요.” 하고 말하고, 음식 진열대로 다가갔다. 남은 음식은 많지 않았다.
슈리는 밥값을 치르고 온 이에샤를 보고 아연해졌다. 샌드위치 두 개, 굵은 소시지, 매시트포테이토, 곡물 수프, 사과 파이 세 조각. 진열대를 싹쓸이한 모양이었다.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고급 바지를 입은 여자와 달신교 사제는 가뜩이나 튀었다. 둘이서 산더미만 한 음식을 먹으려 하니 이상하리라. 기실은 이에샤 혼자의 몫이기까지 했다.
“그, 그걸 다 드시려고요?”
“먹을 수 있어요. 평소에는 더 먹어요.”
“기사단장님은 살이 안 찌는 체질이신가 봐요…….”
“앨저 경. 먹는 만큼 움직일 뿐이에요.”
이에샤는―호칭을 바로잡은 뒤―샌드위치를 들고 베어 물었다. 격식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코스 요리를 고상하게 깨작이는 방법이라면 배웠으나, 카페테리아에서 귀족 티를 내 봐야 우스웠다. 슈리는 상상과 다른 백화 기사단장의 모습에 놀랐다.
“예의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내가 배가 고파서, 먹으면서 듣겠어요. 얘기해 봐요.”
입안이 바싹거렸다. 침을 모으려고 애썼다. 물을 가져오고 싶었다. 제 편의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주먹을 그러쥐었다.
“기, 아니, 앨저 경. 알디온의 밀레나 아가씨께 제 말을 좀 전해 주세요. 그분이 꼭 알아야만 하는 얘기예요.”
이에샤는 대답을 삼갔다. 슈리의 사정을 밀레나에게 전할 마음은 없었다.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었고, 밀레나가 평민 여자를 굽어살필 만한 성미도 아니었다. 슈리가 해신교의 수녀라면 몰랐다. 달신교 사제 따위는 밀레나에게 도움되지 않았다. 동정은 해 줄지언정 제 몸은 사릴 터였다.
이에샤는 상냥히 웃었다.
“좋아요. 급한 일이라면 서둘러 동생한테 알려야죠. 이제 털어놔 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슈리가 머리를 굽실거렸다. 이마가 접시에 닿으려 했다. 이에샤는 사과 파이가 뭉개지기 전에, 손끝으로 슈리의 이마를 밀었다. 슈리는 머쓱히 후드를 끌어내렸다. 깊게 눌러썼다.
“앨저 경도 리타 밸리의 별이라는 장신구, 들어 보셨지요?”
이에샤는 ‘또 그거냐.’ 하고 생각했다. 나머지 샌드위치를 털어 넣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전 얼마 전 저희 사원에 헌물을 하러 오신 페리튼 자작 영애의 목걸이를 보고 알았어요. 자작 영애, 네세라 아가씨는 친절한 분이라서 그 목걸이에 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셨죠. 저, 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슈리의 어깨가 떨렸다. 더워 보이는 차림새이건만, 망토 섶을 여몄다. 이에샤는 소시지에 꽂힌 나무 막대기를 집어 들려다가 멈칫했다. 슈리는 긴 숨을 들이마셨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속삭이는 듯하면서도, 외침처럼 격렬하게 뱉어 냈다.
“그 목걸이의 장식은 제 고향 친구, 아리타가 만든 거예요!”
“예?”
“아리타는 9년 전에 결혼해서 수도로 올라간 친구예요. 한동안은 편지가 왔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소식이 끊겼죠. 저도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바빴고요. 상경해서는 사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걔를 찾아갈 수 없었어요. 그래도 분명 잘 살겠거니 했는데.”
이에샤는 자세를 고쳤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식욕이 가셨다. 밀레나가 가르쳤던, 리타 밸리의 별 시리즈 제작자를 기억해 내고자 했다. 한참 만에야 떠올랐다. ‘알드릭 기즈’라는 이름이었다.
“4년 전에 딱 한 번 대사원으로 편지가 왔어요. 딸이 열병으로 죽었다는 내용만 짧게 적혀 있었는데, 위문장을 보내도 답신이 오지 않았어요.”
슈리는 갈팡질팡했다.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다. 이에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여러 가지 실마리가 한군데로 모이는 것 같았다.
“리타 밸리는 아리타의 어릴 적 별명이에요. 시어칸 하롤 지방 에프너 산의 골짜기에 사는 아리타. ‘골짜기에 사는 아리타’를 애들이 리타 밸리라고 불렀죠.”
“리타 밸리의 별은?”
“아리타의 딸 이름이 에노미아였어요.”
리타 밸리의 별. 아리타의 에노미아. 아름다운 은 세공물에 새겨진 글귀는 그러한 뜻을 담았다.
아리타는 옛날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 수도에서 공예방이 딸린 보석상을 차리겠노라 큰소리치고는 했다. 슈리는 페리튼 자작 영애의 목걸이를 보고, 아리타가 성공한 줄 알았다. 아리타의 작품을 선보여 주었다는 밀레나에게 감사했다.
세공사의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아리타 기즈. 그게 제 친구의 결혼 뒤 이름이에요.”
이에샤는 슈리가 말하고 싶은 바를 꿰뚫어보았다. 눈을 치켜떴다. 날카롭게 물어보았다.
“남편이 아내의 작품을 도둑질해서 판다?”
“아리타가 이름을 빌렸을 수도 있겠죠. 여자가 공예가 일을 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우니까. 그래서 확인해 보려고 아리타한테 질문하는 편지를 썼어요. 세 번이나.”
여성 예술가는 드물었다. 세간은 여자가 깊이 있는 심상 세계에 이르지 못한다고 믿었다. 장인들은 여자 제자를 받지 않았다. 조수 정도로 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자가 장인으로 인정받기란 까다로웠다. 몇몇 유명한 여성 예술가도 툭하면 깎아내려졌다. 작품의 내용에 따라서는 몸가짐을 의심받기도 했다.
“어떻게 됐죠?”
“두 번은 무시당했고 한 번은 되돌아왔답니다.”
기즈 부부는 큰돈을 벌었을 터였다. 이사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께름칙했다. 이전에도 연락이 끊겼었으나, 딸의 죽음은 알려 오지 않았는가? 수상스러웠다.
이에샤는 엄지손을 물었다.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알드릭의 이름으로 작품을 내보이는 일은 부부끼리 합의되었는가? 아리타는 슈리만 무시하는가? 다른 사람과는 연락을 주고받는가? 밀레나는 이 사실을 아는가?
“앨저 경! 저는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아리타의 모든 액세서리에 새겨져 있다는 리타 밸리의 별, 그 문구가 어쩌면, 죽은 에노미아를 기리는 게 아니라.”
“…….”
“아리타가 보내는 구조 요청은 아닐까 해서.”
슈리가 울상을 지었다. 이에샤는 손을 내저었다. 슈리를 달래려는 몸짓이었다.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무턱대고 뛰어들어서는 안 될 성싶었다. 에브라힐 궁전 밖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백화 기사로서의 명분이 없었다. 리타 밸리의 별 시리즈가 사교계를 휩쓴 탓도 컸다. 뒤가 구린 물건이라고 주장한다면 반향이 생기리라.
동시에,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밀레나의 명예에 오점이 될 것이다. 이에샤는 수프 그릇을 들었다. 국물을 두어 모금 들이켰다.
“슈리, 당신 말이 전부 진실이라고 내가 어떻게 믿죠? 정말로 그 액세서리가 당신 친구 작품이라면 의당 밀레나에게 전해야겠지만, 오해라면 곤란해져요.”
“달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요. 제가 어머니를 간병할 때 아리타가 위로차 보내 준 세공품이 있어요. 대사원 제 방에. 그걸 밀레나 아가씨께 보내 드리면 될까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밀레나가 안다면 곤란했다. 필사적으로 감추려 들 테니. 알디온이 모르게 폭로하고 아리타를 찾아내야만 했다. 이에샤는 렌디드 자작 사건을 돌이켰다. 부부의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제일 가능성 높은 건 감금이겠지.’
엘테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에샤가 복잡한 일을 상담할 만한 상대는 엘테르트뿐이었다. 그러나 내키지 않았다.
제국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감싸 주었다. 부정을 저질렀을지 모른다고 여기면서도. 불명예가 알려졌을 때, 남자보다 여자가 치명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자에게 진 남자’보다 ‘부도덕한 여자’ 쪽이 약자인 까닭이었다. 아리타를 구하더라도 밀레나 또한 도와주려 할 수 있었다. 그건 이에샤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누구랑 함께해야 하지. 나 혼자서는 무리야. 권력이 있고, 나를 도와줄 법하고, 내 사정도 헤아려 줄 만한…….’
이에샤는 마음을 굳혔다. 슈리를 곧게 쳐다보았다.
“좋아요, 슈리. 내 동생한테 알드릭 기즈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려 줄게요.”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단장님!”
이에샤는 속으로 슈리에게 사과했다. 이 일을 알게 될 사람은 밀레나가 아니었다. 델페레타에서 두 번째로 고귀한 여자였다.
============================ 작품 후기 ============================
여행이 끝났습니다. 내일 아침에 집으로 돌아가요!
폰으로 쓴 분량이 많아서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이호수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