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9 7. 리타 밸리의 별 =========================
“빌어처먹을 집구석!”
이에샤는 사납게 씹어뱉었다.
브링을 드러낸 일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오스터와 밀레나는 입다물 터였다. 이에샤가 불세출의 검사라고 밝혀, 알디온에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괜찮았다. 브링을 숨길 생각이 사라지기도 했다. 따져 보면 우스웠다. 백화 기사단장도 세간의 눈총을 받고 구경거리 취급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진면목이라도 내보이는 편이 나았다. 남자 평기사들도 행동을 조심하게 되리라.
엘테르트처럼 되고 싶었다. 선망이란 덧없었다. 처음부터 가진 바가 달랐다. 출발선이 달랐다. 엘테르트의 기대에 부응하기는 힘들었다. 더는 폭력적인 인간이 될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기로 했다. 사방에서 짓밟으려 드는데, 그만두라고 외쳐 보았자였다. 엘테르트는 선량했으나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했다. 이에샤는 패려궂던 저를 되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옛날로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말로 타이를 때와 힘으로 짓누를 때를 가릴 셈이었다. 엘테르트가 그만큼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두 사람의 사이도 거기까지일 따름이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연정을 품은 남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샤의 삶을 주물러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으로. 방향을 새로 잡자. 여자가 브링어인 게 뭐? 어린애가 브링어인 게 뭐?’
보이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다.
셈브리온이 왜 “여자는 무리야.” 하고 말하는지는 몰랐다. 셈브리온에게는 절박하리만치 이에샤를 감추려는 면이 있었다. 여자를 얕잡아서는 아닌 성싶었다. 과거에 무언가 일을 겪은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에게도 보여 주기로 했다. 당신의 제자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성큼성큼 걸었다. 궁리를 짜냈다. 자신을 알리려면 어찌해야 할까? 근위 기사단장에게 결투를 걸어 볼까 싶기도 했다. 고개를 털었다. 체사로는 셈브리온의 친구였다. 이에샤에게 기사가 될 길을 열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2 기사단장, 아니지. 제일 싹수없는 건 3 기사단장이지.’
제3 기사단장을 떠올렸다.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부터 이에샤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남자였다. 한심한 작자여도 브링어였다. 표적으로 손색 없었다.
어리석은 일을 꾀하는 듯 보이겠지만, 이에샤의 머리는 차가웠다. 델페레타의 브링어는 다른 브링어와 싸울 일이 없었다. 기사끼리 싸워서 무엇하겠는가? 외국의 브링어와 겨룰 일도 드물었다.
이에샤는 달랐다. 제국 근위 기사단장을 넘어서는 괴물과 맞붙어 온 터였다. 세밀함은 떨어졌으나, 브링을 활용하는 방법과 상대하는 방법에 통달했다. 3 기사단장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온 에브라힐을 놀래어 주리라. 이를 갈아붙였다.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지났다. 한시바삐 이 징그러운 저택에서 떠나고 싶었다. 쇠막대를 아치형으로 세운 대문에 다다랐다.
“제발 들여보내 주세요!”
“아 글쎄, 안 된다니까 왜 이럽니까! 점잖아야 하실 분이!”
‘……뭐야?’
고개를 갸우뚱했다. 문지기가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바깥에 선 이가 문살을 붙잡았다. 덜컹덜컹 흔들어 댔다. 애처로운 몸짓이었다.
“제발요. 정말 중요하고 급한 일이에요. 부탁합니다, 제발!”
“사제님. 이러지 마십쇼, 진짜. 약속이고 연락이고 뭣도 없이 어떻게 들어오시겠단 겁니까? 막말로 당신이 진짜 사제인지, 사제복 입은 사기꾼일지 누가 압니까?”
“해와 달에 맹세코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요. 이 댁 아가씨를 만나야만 한다고요!”
이에샤는 불청객을 뜯어보았다. 검은 튜닉에 군청색 망토를 두른 여자였다. 망토 아랫단에 깨알 같은 비즈들이 박혔다. 별하늘처럼 예뻤다. 튜닉의 가슴께에는 달신교 심벌―초승달에 끼인 보름달, 그 가운데에 금을 그어 반달로 나눈 무늬―이 은실로 수놓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후드를 눌러쓴 채였다. 목소리로 미루어 젊은 사람 같았다.
루시온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돌이켰다. 달신교에서 백화 기사단을 뒷받침해 주도록 교섭 중이라고 했다. 사제 한 명이 교단을 움직이지야 못하더라도, 도와줘서 나쁠 일은 없으리라.
“무슨 일이냐?”
“아, 크, 큰아가씨! 여기 이분이 자꾸만 밀레나 아가씨를 만나야 한다고 떼를 쓰지 뭡니까. 지금 돌아가십니까? 문을 열면 저 사제님 밀고 들어올까 무섭습니다.”
문지기는 진땀을 뺐다. 골칫덩이 이에샤 때문에 수상한 여자를 들여, 혼쭐이 날까 두려웠다. 사제가 이에샤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밀레나 알디온 영애신가요?”
얼굴 가득 화색이 번졌다. 문살을 움켰다. 이에샤에게 가까워지려는 양 다가붙었다. 틈새로 들어와질 리도 없건만.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살다 살다 밀레나로 오인당하게 될 줄이야. 사제는 밀레나를 보러 왔다면서, 생김새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제의 입술이 떨어졌다. 이에샤는 손사랫짓했다. 말머리를 가로막았다. 장광설이 쏟아지리라는 예감이 들었으므로.
“앨저 백작 이에샤요. 알디온과는 상관없소. 달신의 사제가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이, 에샤?”
사제는 낙담했다. 이윽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에샤의 차림새를 살폈다. 상앗빛 코트는 보이지 않았다. 흰 바지만으로도 충분했다. 요즈음 달신 대사원에는, 황태자로부터 백화 기사단의 행보가 전해졌다. 그녀는 대사제를 보조하는 몸이었다. 백화 기사단장의 이름과 내력쯤은 꿰었다.
달신교는 폐쇄적이었다. 서품을 받고 10년도 되지 않은 사제가 사원 밖으로 나오기는 어려웠다. 또 언제 외출 허락을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저택에 들어가기는 그른 듯싶었다. 알디온 후작의 다른 딸에게라도 매달려야 했다.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백화 기사단장님! 제발 도와주세요! 아리타, 제 친구를 좀 구해 주세요!”
이에샤는 묘한 낯빛을 지었다. 어째서일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지난겨울, 어느 여자를 보던 때와 비슷했다. 남편에 관해서 털어놓지 못하고 망설이던 베빈이 떠올랐다.
문지기에게 손짓했다.
“열어.”
“네? 하지만 이에샤 아가씨.”
“이 집의 아랫것들은 정말이지 교육이 안 돼 있군. 나는 앨저 백작이다. 당장 이 문을 열어. 사제님은 내 알아서 모시고 다른 곳으로 갈 테니.”
문지기는 움찔 놀랐다. 이에샤의 서슬이 무시무시했다. 저보다 작은 여인인데, 맹수를 앞에 둔 것만 같았다. 떨리는 손길로 빗장을 잡아당겼다. 알디온 저택의 정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에샤가 문설주를 지나쳤다. 사제의 곁에 섰다. 양손을 가슴에 얹었다. 윗몸을 살짝 굽혔다. 성직자에게 갖추는 인사였다. 사제도 허둥지둥 손을 모았다. 고개를 숙이는 동작으로 답했다.
“갑시다.”
“예? 기, 기사단장님. 어디를요?”
“앨저 경으로 좋아요. 무슨 일인지 얘기부터 들어 봐야죠. 따라와요. 저 집에서 당신이 원하는 걸 얻기는 힘들 테니.”
엘테르트가 일러 주었다. 격식을 차리면 피해자의 입이 닫히는 법이라고. 이에샤는 저보다 신분이 낮은 사제에게 말을 높였다.
사제는 망설였다. 저택과 이에샤를 번갈아 보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속으로 기도문을 외웠다. 이에샤 쪽으로 발을 옮겨 놓았다. 이에샤는 미소했다. 사제를 에스코트하며 걸었다.
“얼마나 여유가 있죠?”
“네? 여유?”
“아까 시간이 없다고 말했잖아요.”
“아! 해, 해가 지기 전까지는 대사원으로 돌아가야 해요.”
정오가 지난 시각이었다. 피올라 거리까지 움직이기는 빠듯할 성했다.
가까이에 카페테리아가 있었다. 셈브리온은 즐겨 찾던 가게였지만, 이에샤는 가 본 적 없었다. 배가 고팠다. 뭐라도 채워 넣어야 머리가 돌아갈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차 타고 다니면서 폰으로 썼습니다...짧습니다...여행은 잘 즐기고 있습니다...내일이랑 모레는 정말로 쉬겠습니다...
슬슬 사건이 드러나기 시작하네요...초반에 뿌려둔 떡밥...잘 거두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