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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66화 (66/164)

00066 7. 리타 밸리의 별 =========================

목소리가 휘늘어졌다. 고달픔을 넘어서 아프게 들리기까지 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를 물끄러미 보았다. 속눈썹이 떨렸다. 입을 꽉 다물어, 아랫입술이 허예졌다. 미끈한 얼굴을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손끝이 움찔거렸다.

엘테르트는 마른세수했다. 한숨이 흘러넘쳤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웠다. 숨결이 이에샤의 이마까지 닿았다. 이에샤는 제 실수를 깨달았다. 시더가 옳았다. 카드의 답장을 길고 부드럽게 썼어야 했다. 엘테르트가 움직이지 않는 쇠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카드를 두고 갔음을 알았어야 했다.

“……미안합니다. 오늘 일이 너무 바빴던지라 못난 모습을 보이는군요. 올해는 정말이지 첫 달부터 쉴 새 없이 일이 터져서.”

“제가 멘델린 경을 더 힘들게 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엘테르트는 곧바로 답했다. 루시온은 네 참을성에 끝은 있느냐고 물었지만, 엘테르트도 한계였다. 하나 이에샤와의 다툼은 자기 잘못에서 비롯했다. 이에샤 탓이 아니었다. 책임을 미루기는 싫었다. 화났을 이에샤의 마음에 짐까지 지우고 싶지 않았다.

“단지, 앨저 경. 내게는 당신이 다른 많은 사람과 달라서 힘이 듭니다.”

“네?”

이에샤는 화들짝했다. 엘테르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엘테르트의 말이 심장을 움킨 것만 같았다. 주먹을 그러쥐었다. 손톱으로 손바닥을 긁었다. 평상심을 지키려 애썼다. 엘테르트는―이에샤의 노력은 꿈에도 모르고―눈썹을 내려뜨렸다. 이에샤와 시선을 맞추었다.

머리가 코앞이었다. 신년맞이 무도회 날, 이에샤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던 향유 냄새가 되살아났다. 흠칫해서 뒷걸음질쳤다. 이에샤는 벌어진 사이에 아쉬움을 느꼈다. 엘테르트가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동안 내가 말했을 때 경처럼 화내고 불쾌감을 드러내고,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난 내가 대단히 똑똑하고 올바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아, 그, 그런 의미였습니까?”

“누군가에게 노여움을 사고 미움받는 게 이토록 속 쓰린 일인지도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정말로, 나는 그날 앨저 경이 왜 그다지 격렬하게 화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에 따라 화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했나, 그 정도 생각뿐이었습니다.”

이에샤는 언짢아하지 않았다. 엘테르트를 쫓아내고 스스로도 후회했었다. 사교성을 꼬집힌 것도 싫었지만, 좋아하는 남자에게 밀레나 이야기를 들으니 화가 치밀었다. 엘테르트에게는 밝힐 수 없는 까닭이었다. 무어라 둘러대야 할까.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망설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미간을 비뚤어뜨릴 따름이었다. 슬퍼하는 모습조차 멋들어졌으나, 이에샤는 엘테르트가 어여쁘게 우느니 바보처럼 웃기를 바랐다. 남에게 그러한 생각을 품기는 처음이었다.

마음이란 간사했다. 관두었다 여겼을 때는 잠잠했다. 하지만 안쓰럽다고 느낀 순간 부풀어올랐다. 지난번처럼 “우리 만나지 말아요.” 하고 내칠 수도 없었다.

“그런 내 몰이해가,”

엘테르트가 팔을 뻗었다. 도드라진 손허리뼈가 이에샤의 뺨을 스쳤다. 이에샤는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온몸을 뻣뻣이 했다.

“얼마나 염치없고 못됐었나 알았습니다. 앨저 경을 만나지 못하는 동안.”

“아니에요. 난,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당신의 분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내가 잘못했고 당신은 화가 났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습니다. 악의가 없었으니 마음 풀라는 말은 오만이었어요.”

엘테르트가 허리를 숙였다. 이에샤는 제 목께로 내려온 정수리를 응시했다. 엘테르트를 물리친 쪽은 자신이었다. 엘테르트가 도망친 게 아니었다. 왜 사과하는가? 알 수 없었다. 복잡했다. 이에샤는 그저 화가 풀렸다고 알리러 왔을 뿐이었다. 석곡궁으로 찾아와도 된다고 말하려 했다. 그다음 퇴궐해서 셈브리온과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눈시울이 아려 왔다. 지금껏 이에샤의 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준 사람은 없었다. 알디온 사람들은 미친 계집애의 패악으로 여겼다. 셈브리온은 어린 딸을 달래듯이 져 주려고만 했다. 이에샤가 느끼는 감정이야말로 중요하다고 말한 이는 처음이었다. 엘테르트가 얼굴을 들었다.

엘테르트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에샤는 자신도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 저는, 그렇게 화나지 않았어요. 사실 그날도 멘델린 경을 내쫓고 후회했어요. 별일도 아닌데 내가 심했다고.”

“화가 나면 그럴 수 있습니다.”

“제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한 거도 경이 미워서 한 말은 아니었어요. 그냥, 시간이 필요했어요.”

“내가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카드 답장. 화나서 그렇게 쓴 거 아니에요. 나한테 보내는 물건에 마법까지 쓰다니 너무 낭비라서, 정말 글자 그대로 부담스러워서. 평범한 종이라면 좋겠다는 뜻이었어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성의에 낭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손등으로 훔쳐 냈다. 잘 우는 여자로 비치기 싫었다. 셈브리온 앞이 아니라면 울 수 없었다. 엘테르트가 조끼 주머니에 꽂힌 손수건을 집었다.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는 거 아니에요.”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바보같잖아요. 약해 보이고. 여자니까 어쩔 수 없다는 소리나 듣고.”

엘테르트는 한숨지었다. 눈물이란 사람이 가슴을 쥐어짜, 마음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그를 빼앗는 것은 잘못되었다. 이에샤가 울먹이는 까닭은 몰랐다. 그렇더라도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않았으면 했다.

“당신에게 온갖 멍청한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브링어를 약하다고 비웃을 천치는 아닙니다. 눈물은 사람의 강약을 잴 척도가 못 됩니다.”

“제발 좀! 멘델린 경.”

이에샤는 손수건을 받아 들고 말았다. 촉촉한 눈가를 찍어 눌렀다. 엘테르트를 흘겨보았다.

“저랑 얘기할 때는 쉬운 말을 써 주세요.”

“앨저 경은 약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 될까요.”

“좋네요.”

얼굴 가득 말간 웃음을 떠올렸다. 기뻤다. 엘테르트와 나누는 대화가 즐거웠다.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비로소 시더가 가르친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 * *

엘테르트와 응어리를 풀고 열흘이 지났다.

이에샤의 일상은 잔잔했다. 화해한 뒤로도 엘테르트는 바빴다. 석곡궁에 들른 날은 하루뿐이었다. 이에샤는 일과 수련에 묻혀 살았다. 엘테르트를 남자로 보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은 변함없었다. 가까운 지인으로 족했다.

시더의 참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시더는 방정맞기는 해도, 입바른 소리를 잘했다. 동생을 셋이나 두어서라고 했다. 사람 챙기는 데에는 자신 있다고. 이에샤는 시더가 오 남매 중 장녀라는 사실을 알았다.

스란은 잠이 많은 모양이었다. 이에샤보다 한 시간은 일찍 나오던 미엘라가 늦기 시작했다. 스란이 깨워도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까닭이었다. 출근하면서 티격태격하는 둘을 구경하기도 재미있었다. 말다툼 속에서 사사로운 일화들이 튀어나오고는 했다.

황녀와 황자가 놀러 오기도 했다. 란델은 유순함이 지나쳤다. 하인을 부리기도 미안해했다. 이에샤에게 “어마마마를 지켜 줘서 고마워.” 하고 인사하고 싶었으나, 방해될까 머뭇거리던 차였다. 나리궁 시종장이 라제카를 불렀다. 라제카는 란델을 끌어냈다. 석곡궁으로 밀어넣었다. 란델은 신사답게 꽃 세 송이를 백화 기사단에 나눠주고 갔다.

오늘도 쌍둥이가 사무실에 쳐들어왔다. 스란, 미엘라, 시더는 도망쳐 버렸다.

“앨저 경은 우리 남매랑 잘 맞는 거 같아요. 오라버니도 신임하시지, 란델도 좋아하지. 라제카도 앨저 경이 좋고말고요.”

“영광입니다. 말주변도 없는데 공주님과 황자 저하께서 너그러이 들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난 앨저 경이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재밌어. 특히 그, 어릴 때 만난 용병 얘기가 좋아.”

란델이 뺨을 붉히며 말했다. 이에샤는 실웃음을 머금었다. 이에샤에게는 이야깃거리가 셈브리온뿐이었다. 황족에게 늘어놓기는 껄끄러웠다. 결과적으로 셈브리온은 ‘어린 시절 이에샤를 보살펴 주고 바람 같이 떠나간 추억의 용병 아저씨’가 되어 버렸다.

“나도 같이 생각해요. 흡인력이 있어요. 이제 보니 집안 내력일지도 모르겠네요.”

“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앨저 백작가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이에샤 하나였다. 방계 혈통마저 끊어졌다. 라제카가 알 만한 이가 없었다. 알디온도 마찬가지였다. 이에샤가 아버지와 닮은 곳이라고는 생김새뿐이었다.

라제카는 란델의 머리카락을 그러모았다. 세 가닥으로 나누어 땋으려 했다. 란델은 곤란한 낯으로도, 누나의 손장난을 받아 주었다. 작은 머리통이 까치집이 되었다. 라제카가 이에샤를 돌아보았다.

“그저께 앨저 경의 동생을 만났거든요.”

이에샤는 혀를 깨물 뻔했다. 인상이 구겨지지 않도록 애썼다. 엘테르트에게 당해 본 덕분일까?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라제카가 무구히 웃었다. 나쁜 뜻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어, 떻게 그 애를 만나셨습니까?”

“산책하다가 우연히요. 전혀 닮지 않아서 몰라봤는데, 알디온 영애라 소개하더군요. 앨저 경을 많이 걱정하더라고요.”

“…….”

“싹싹하고 재치 있는 귀공녀였답니다. 둘이 무척 친하다면서요? 서로 의지가 되는 자매라니, 라제카도 언니나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어요. 아! 어마마마께는 비밀이에요. 이런 철모르는 소리.”

이에샤는 말을 잊어버렸다. 밀레나가 황족에게 사기를 칠 줄은 몰랐다. 자매의 사이는 남남보다 나았던 적이 없었다. 밀레나는―입으로는―이에샤와 잘 지내고 싶다 했지만, 이에샤가 바라지 않았다. 미움을 억누르기 싫었다.

미워하는 데에도 힘이 필요하다, 무관심이 복수이다, 잊어야만 편해진다……. 누군가에게는 옳은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샤는 미움이야말로 원동력이 되는 사람이었다. 당한 만큼 갚아 주어야 웃을 수 있었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밀레나가 자신을 이용하는 걸 보아 넘길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네? 뭐가요?”

“제 동생이 감히 공주님께 거짓을 고해서 말입니다.”

이에샤는 라제카가 짧은 언구만으로 진실을 꿰뚫을 수 있다고 믿었다. 밀레나는 구슬리기 쉬운 꼬마로 본 모양이었으나. 알디온 후작가의 스캔들을 떠올리고, 딸들의 관계까지 알아차릴 법했다. 밀레나의 나긋한 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를 바랐다. 라제카가 방긋했다.

“라제카는 아직 무도회에 다닐 나이가 아니지만, 2년 뒤를 위해 늘 배우고 있죠.”

“예.”

“사교계의 아가씨들이 자기 자신과 가문을 포장해야만 짓밟히지 않는다는 생리쯤은 알아요. 지금 그 사회의 으뜸인 알디온 영애라면 혀가 대단히 매끄럽겠군요.”

============================ 작품 후기 ============================

엘테르트의 두뇌+루시온의 감각=라제카

라제카에게도 이런저런 결점이나 못하는 일이 있지만 여러모로 사기캐입니다...그렇다고 라제카가 엘테르트와 루시온보다 우수하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세심함은 엘테르트가 낫고 결단력은 루시온이 낫고 뭐 그렇죠...

캐릭터가 욕먹는 데에는 전혀 개의치 않지만, 독자님들이 충돌하시면 발 동동 구릅니다ㅠㅠ 의견을 나누시더라도 부드럽게 나눠 주세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롤링페이퍼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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