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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64화 (64/164)

00064 7. 리타 밸리의 별 =========================

루시온은 “웬 헛소리야?” 하고 내뱉을 뻔했다. 소리를 눌러 삼켰다. 이에샤의 태도는 예사로웠다. 익살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말뜻을 따져 봐야 할 성싶었다. 두 사람은 멈추지 않고, 천천한 속도로 걸었다. 루시온이 잠잠해지자 이에샤도 이야기를 그쳤다. 제 입으로 엘테르트에게 미움받노라 말하니 울적해진 탓이었다.

연모를 접은 일과 별개로, 엘테르트는 좋은 사람이었다. 엘테르트처럼 곧으면서 부드러운 사상가는 드물었다. 꿈꾸는 세상이 사는 동안 도래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렇더라도 뜻이 이어지도록 힘쓰겠다 하였다.

이에샤는 지금만으로도 벅찼다. 나중을 내다볼 여력이 없었다. 이에샤 앨저가 기사로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후 세계도 전생도 믿지 않았다. 후계자를 기르기도 싫었다. 자기 자신만이 이에샤가 부둥킬 수 있는 범위였다.

엘테르트에게는 이에샤가 가지지 못한 것이 많았다. 좋아하기 시작한 까닭은 선망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대에게 질시 당하니, 서글펐다.

이에샤가 엘테르트를 떠올리는 동안 루시온은 생각을 마쳤다.

“나는 앨저 경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데.”

“예? 무슨 말씀이신지.”

“에르디가 그대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는 여자는 없어. 고모님을 빼면 앨저 경이 에르디랑 가장 가까운 여자일걸.”

“설마요.”

이에샤는 믿지 않았다. 자신이 엘테르트에게 유별한 여자이기는 할 터였다. 유별하게 꺼리는 여자. 시더와 스란과 미엘라, 밀레나와 베빈도, 엘테르트가 초면부터 야멸차게 군 사람은 없었다. 이에샤만이 마구간지기 취급당했다.

“멘델린 경이 처음에 저한테 뭐라고 했는데요. 아직도 기억합니다. 꼴이 볼만해서 마구간지기인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놈이? 정말?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 아니고? 진짜로?”

“전하께는 제 눈이 멘델린 경과 딴 남자를 구분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십니까?”

그런다면 장님이나 다름없었다.

루시온은 언젠가,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천둥벌거숭이라고 불렀던 일을 기억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수도사 같은 녀석을 열받게 할 수 있는지 궁금했었다. 이에샤의 말은 진담인 듯했다. 남의 면전에 대고 모욕을 주는 엘테르트라니.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 혹시. 루시온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엘테르트가 사람을 덮어놓고 싫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마 그때도 바지 차림에 머리도 짧아서 그러셨겠죠. 저도 제 첫인상이 어떨지 정도는 압니다.”

“아니, 멘델린 소공작은 그딴 이유로 사람을 천대하지 않는다. 그것만은 내 명예를 걸고 장담하지.”

“이벨리오노 전하!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에샤는 두 손을 내저었다. 황태자의 명예까지 끌고 올 만한 건은 아니었다. 그날 오스터의 서재 앞에서, 밀레나와 선 이에샤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저도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밀레나에 댈 바는 못 되었다. 깔보일 만했다.

“아니야. 난 내 신하이자 종형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말해야겠어. 엘테르트는 그대가 바지를 입는 여자라서 꺼린 게 아니라, 으음…….”

루시온은 고민했다. 엘테르트가 전 근위 기사단장에게 죽을 뻔했던 사건은 밝힐 수 없었다. 엘테르트의 응어리이자 치부였으므로. 또한 생뚱스럽게 들릴지도 몰랐다. 이에샤가 실력 있는 검사이기는 했지만, 젊다 못해 어린 여자가 아닌가.

“뜬금없지만 앨저 경, 브링어는 은연중에도 티가 난다는 거 알아?”

“예, 예?!”

“뭘 그렇게 놀라?”

“아, 아니요. 아닙니다. 아, 그, 갑자기 브링어 얘기는 무슨 연유로?”

루시온이 수상쩍다는 눈빛을 띠었다. 이에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다. 브링어라는 사실을 들킨 걸까?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루시온이 끊었던 말을 이었다.

“뭔가가 있나 봐. 분위기 같은 게. 브링에 큰 상처를 입었다 살아난 사람은 느낄 수 있다고 해. 왜, 브링이란 남의 몸에 쌓인 특유한 기운이잖아? 그게 자기 몸에 닿았던 이질감을 기억하는 거지.”

“그, 그렇습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보통은 브링으로 공격당하면 죽으니까.”

이에샤는 눈치가 좋았다. 엘테르트가 겪었을 일을 헤아렸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멘델린의 후계자이니 해치려는 자가 있었을 법도 했다. 궁금증이 풀렸다. 돌이켜보면 사이가 누그러진 때도 브링을 들킨 뒤였다. 그전까지는 엘테르트 스스로도 이에샤가 싫은 까닭을 몰랐으리라.

“난 앨저 경이 언젠가 브링어가 될 재목이라고 생각해.”

“그, 그럴 리가요.”

“생각해 본 적 없지? 지금껏 여자 브링어는 없었고, 그대는 나이도 어리니까. 하지만 그동안 본 무위만으로도 알 수 있어. 그대는 틀림없는 천재야. 벌써 경지에 오르기 직전일지도 모르지.”

브링은 뛰어난 전사의 몸에 쌓이는 힘이었다. 그를 다룰 수 있느냐, 없느냐로 브링어가 판가름났다. 루시온은 이에샤도 약간의 브링을 품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엘테르트가 무서워했을 만도 했다.

이에샤는 심란해졌다. 경지를 앞둔 정도가 아니라 4년 전에 다다랐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가슴이 뜨끔뜨끔했다.

“지금 에르디는 경을 싫어하지 않아. 오히려 좋아하고 아끼는 편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나한테 그대를 화나게 했는데 화해할 방법이 없겠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단 말이지.”

놀랐다. 엘테르트가 그렇게까지 애쓴 줄은 몰랐다. 도리 없이 설레었다. 엘테르트에게 미움받는 게 아니라고 깨닫자, 어깨마저 가벼워진 듯했다.

루시온은 쓴웃음을 흘렸다. 이에샤를 보노라면 명백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제 사촌형을 좋아한다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루시온과 이에샤가 어울리지 않는 만큼, 이에샤와 엘테르트도 어울리지 않았다. 실연 동지라고 불러도 맞으리라.

“에르디뿐 아니라 나도 앨저 경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바지를 입는다고 잘못됐다 생각지 않아.”

봄바람이 이에샤의 단발을 헝클어뜨렸다.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을 눌러 주려다가, 멈칫했다. 가까워지면 위험한 사이인데도 만져 보고 싶어지니 곤란했다.

“어떤 옷을 걸치더라도.”

갈 곳 잃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대는 아름답고 멋져.”

이에샤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뒤로한 종탑에서 종이 울렸다. 루시온은 한숨지었다. 예상보다 시간이 흘러 버렸다. 정말로 돌아가 봐야 했다. 호랑가시궁 쪽으로 고갯짓했다.

“이만 갈게. 수고해.”

“……전하를 배웅합니다.”

이에샤가 오른손을 왼가슴에 얹었다. 허리를 숙였다. 루시온의 뒷모습이 멀어져 갔다.

저도 돌아가기로 했다. 순찰은 마쳤다. 석곡궁에서 사무를 보다가 점심밥을 먹고, 오후 일을 준비해야 했다. 엘테르트가 짜 놓은 일과표는 능률적이었다. 아직까지도 백화 기사단은 거기에 따랐다.

동쪽으로 향할수록 남자가 줄어들었다. 오가는 사람에는 하녀가 많았다. 시녀로 일하는 귀부인과 귀공녀도 심심찮았다. 방문객도 몇 명. 이러니저러니 해도 눈이 즐거웠다. 유행을 좇는 차림새뿐이었으나, 저마다 맵시가 달랐다. 이에샤는 몸치장과 거리가 멀었다. 에브라힐의 여자들로 대리 만족을 했다.

예쁜 옷은 좋았다. 에이릴리가 살았을 적에는 이에샤도 드레스를 입었다. 긴 머리채를 말거나, 땋았었다. 싫어서 바지를 입는 게 아니었다. 편하기는 했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며 걷던 차였다. 다리가 조금씩 더뎌졌다. 앞쪽에서 걸어오는 사람 때문이었다. 이맛살을 구겼다. 흰색에 연노랑을 배색한 드레스를 입고, 프릴 달린 양산을 든 밀레나가 멈추어 섰다. 밀레나의 낯에 반가움이 번졌다.

“언니! 오랜만이야. 여기서 이렇게 만나네. 오늘 궁에서 있는 모임에 참석했거든.”

“안녕.”

이에샤는 짤막이 인사했다. 악담이 치밀었으나 뱉지는 못했다.

밀레나의 인상이 달라졌다. 생김새는 비슷했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긋나긋한 자태는 오간 데 없었다. 어깨와 등허리를 폈다. 피부가 탄력적으로 보였다. 머리 모양도 청초함을 벗어던지고, 화려하게 틀어 올렸다. 입매가 뚜렷해졌다. 드레스 스타일은 변함없었다. 그런데도 몸태가 돋보였다.

밀레나의 용모에 처음으로 순수하게 감탄했다. 지난달보다 아름다워졌다. 딴사람 같지는 않았다.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났다는 느낌이었다. 목소리마저 커졌다.

“어머! 이거 봐, 언니. 오늘 내 드레스랑 언니 제복 색깔이 비슷해.”

“그게 뭐 어쨌다고?”

“이러니까 정말 친한 자매 같잖아. 좋다. 언니, 왜 우리 집에 오지 않아? 아버지가 언니한테 초대장을 보냈다고 하셨는데.”

그게 어딜 봐서 초대장이냐. 이에샤는 이를 갈아붙였다. 부드럽게 속을 뒤집는 솜씨만큼은 여전했다.

밀레나가 찬 목걸이와 귀걸이에 눈이 갔다. 오밀조밀 세공한 은장식 사이로 루비가 끼워졌다. 세트를 이루는 모양새였다. 붉은 보석이 드레스의 따사로운 빛깔과 어울렸다. 이에샤는 지나다니던 여인들을 떠올렸다. 모두 밀레나와 비슷한 장신구를 둘렀었다.

밀레나도 이에샤의 시선을 느꼈다. 후후, 웃었다.

“리타 밸리의 별 시리즈라고 해.”

“뭐?”

“이 액세서리들 말이야.”

이에샤는 눈썹을 치켰다. 살펴보았을 따름이었다. 이름이 궁금하다거나,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밀레나는 이에샤의 짜증에도 아랑곳 않았다.

“알드릭 기즈라는 세공사의 작품인데, 모두 ‘리타 밸리의 별’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그래서 리타 밸리의 별 시리즈.”

“별로 알고 싶지 않아. 나 간다.”

“이거, 내가 사교계에 처음 선보인 거야.”

이에샤는 밀레나를 지나칠 셈이었다. 마주하자니 뒤숭숭했다. 급작스레 달라진 탓일까. 소름 끼치기까지 했다. 하나 멈칫했다. 귀족 여자 대부분이 쓰는 장신구가, 밀레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에샤는 밀레나에게 할 말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데?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언니는 에둘러 말하는 게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한 화법이라는 걸 몰라.”

“간다!”

이번에야말로 발을 떼었다. 성큼 내디디려는 순간이었다.

밀레나가 손을 뻗었다. 이에샤의 팔뚝을 움켰다. 이에샤에게는 하품이 나올 움직임이었으나, 피하지 못했다. 밀레나가 적극적으로 다가들기는 처음이었다. 붙잡힌 팔을 멍하니 보았다.

“요즈음 모두가 나를 사교계의 으뜸으로 쳐. 내 노력이 드디어 통했어.”

“놔!”

가녀린 몸을 뿌리쳐 냈다. 밀레나가 비틀거렸다. 두어 발짝 뒷걸음질쳤다. 콱 넘어지기를 바랐으나, 중심을 되찾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말간 얼굴로 이에샤를 보았다.

“……생각해 봐, 언니. 난 언니네 어머니 때문에 다섯 살까지 사생아로 살았어. 아버지께 복수할 속셈으로 6년이나 이혼 안 해 줬다는 거 알아. 참 독하시지.”

“뭐? 너 어디서 이상한 버섯이라도 주워 먹었니?”

이에샤는 노기를 억누르지 못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에이릴리를 손가락질하더라도, 알디온 일가만은 할 수 없었다. 밀레나는 움찔했다. 이에샤의 브링은 존재감이 강했다. 평범한 아가씨가 견딜 만한 서슬이 아니었다.

턱을 들어 올렸다. 떨렸지만 괜찮았다. 두렵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아. 5년 동안 사생아였어도, 그래서 죽었다 깨나도 부정한 계집애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더라도,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건 나야. 난 계속 아름다워질 거야. 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거야.”

“얘, 밀레. 재수없지만 머리가 돌지는 않았던 내 동생아! 너 진짜 미쳤구나? 장래 희망은 가정교사 앞에서 읊고 꺼져!”

이에샤는 매섭게 쏘아붙였다.

얼떨떨했다. 밀레나는 쓴소리를 들으면, 조용하게 울먹거리는 소녀였다. 이에샤와 에이릴리에게 미안해하고는 했다―믿지 않았지만. 에이릴리의 기일에는 꽃을 따다 주기도 했었다―눈앞에서 집어 던져 버렸지만. 이에샤는 밀레나 알디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쉬려고 했는데 왠지 쉬면 안 될 거 같아서 썼습니다...무슨 정신으로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술한 부분이 보여도 몸살 떨어지면 고칠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하루하루 멘탈이 갈갈갈갈 갈리는 기분입니다...제가 만든 캐릭터들 중에는 이실리아가 제일 공감이 갑니다...다들 건강 조심하세요...

작가 개인적인 취향으로 연애감정은 다들 담백하게 눈치채고 진행되고 정리되고 할 겁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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