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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61화 (61/164)

00061 7. 리타 밸리의 별 =========================

스란과 미엘라는 상관을 지켜보았다. 여느 날보다 늦는다 싶더니, 왜인지 심사가 꼬였다. 책상에 앉자마자 시더를 들볶았다. 차에 우유가 많이 들어갔네, 온도가 낮네. 미엘라에게는 공문을 복잡하게 쓴다고 짜증냈다―이에샤는 아직도 궁중어에 서툴렀다. 스란에게는 수련할 때 대련을 벌이자 했다. 분풀이 당할 미래가 훤했기에, 스란은 거절했다.

이에샤가 부하에게 깽판을 놓기는 처음이었다. 석곡궁 사람들은 지겨워하면서도 걱정했다. 시더와 미엘라가 따르던 하녀장도, 스란의 암무 선배도 이에샤보다 지독했었다. 참을 만했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미엘라가 눈짓을 보냈다. 스란 경이 물어봐 줘요. 스란은 모르는 체했다. 놀란 토끼처럼 움츠러들지 않는다뿐이지, 스란 또한 평민이었었다. 화난 귀족은 껄끄러웠다.

“내 얼굴 뚫어지겠다. 할 말 있으면 해.”

이에샤가 서류를 보면서 내뱉었다. 두 사람은 움찔했다. 고개도 들지 않고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눈길이 따가우면 피부로 와 닿는 법이라지만, 이에샤는 너무했다. 은신과 추적에 일가견이 있는 스란도 이에샤처럼 날카롭지는 못했다.

“아뇨. 그냥 앨저 경의 기분이 별로 같으시길래 쳐다봤을 뿐입니다.”

“기분……. 좋지는 않아.”

“엄청 나빠 보입니다.”

미엘라가 딸꾹질했다. 스란은 한 번 말을 꺼내면 막가는 면이 있었다.

이에샤가 얼굴을 들었다. 스란과 미엘라를 번갈아 보았다. 스란은 무표정했다. 미엘라는 왕방울만 한 눈을 굴려 댔다. 둘에게서 공통적으로 흘러나오는 감정은 불만이었다. 이에샤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미안, 스란 경. 올센 경도. 괜히 성질 부려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런 건 아니고.”

있었다. 퍽 큰 일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눈에 뜨이지도 말라고 쏘아붙이고 온 참이었다. 엘테르트는 받아들이지 못한 태도였다. 무릅쓰고 만나러 와 주었으면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달 동안 모르는 사이처럼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그만한 시간이면 감정을 정리할 자신이 있었다.

첫사랑이었다. 스승 말고는 처음으로 가까워진 남자. 자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루시온부터 만났더라면 달랐을까? 상상하다 보니 다행스러웠다. 소공작만으로도 골치 아팠다. 상대가 황태자였다면 ‘세상이 나한테 왜 이럴까?’ 하고 고뇌했을 것이다.

옛날에는 슬플 때, 셈브리온만을 찾았다. 지금은 라제카나 루시온의 얼굴도 떠올랐다. 대인 관계가 넓어졌다는 증이리라. 그것 하나만큼은 좋았다.

답답했다. 검이 그리웠다.

“……스란 경. 진짜 대련하지 않을래? 이번에는 성깔 부리려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신청하는 거야.”

“음.”

스란은 갈등했다. 이에샤는 화를 추스른 듯했다. 방금보다 여유가 있어 보였다. 스란의 고개가 세로로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대련한 날이 지난달 중순이었다. 한 번 이기지를 못했으니, 재도전을 벼르던 차였다. 잘되었다.

“좋습니다.”

“잠깐만요, 두 분! 지금은 수련 시간 아닌데요! 애, 앨저 경은 보셔야 할 문건이 아직도,”

“올센 경.”

이에샤가 말허리를 잘랐다. 미엘라는 찔끔 입다물었다. 겁먹은 모습이었다. 이에샤는 한숨지었다. 미엘라에게는 저보다 엘테르트가 쉬운 성싶었다. 엘테르트의 말마따나 상냥해져야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필요성과 실천은 나란하지 않았다. 당장에도 성가신 일이 많았다. 몸가짐을 고치겠답시고 긴장하기는 싫었다.

“미안해. 오후 수련을 사무로 돌릴 테니까 이해해 줘.”

“그, 그러시다면야. 알겠어요.”

“가자, 스란 경.”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장서 사무실을 나섰다. 이에샤와 스란은 각자 탈의실을 대신하는 객실로 들어갔다. 이에샤는 우아한 블라우스와 트라우저를 벗어 던졌다. 인견 셔츠를 걸쳤다. 가죽 바지에 다리를 꿰었다. 풀었던 허리띠를 찼다. 칼자루를 어루만졌다.

복도로 나왔다. 마찬가지로 옷을 갈아입은 스란이 기다렸다. 단검을 던져 올렸다, 받았다 하며 손장난하던 중이었다. 둘은 연무장에 다다르는 샛문으로 향했다. 오솔길을 내디뎠다. 나긋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걸으면서 이에샤는 야릇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팔다리가 머리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지 않고, 물살에 떠밀리는 듯싶었다. 근육에 감각이 없었다. 반면에 살갗은 주변의 모든 기척을 잡아냈다. 나뭇잎이 가지에서 끊어지는 소리마저 들렸다.

무슨 영문일까. 아흐레 동안 수련에 소홀하기는 했다. 엘테르트 탓으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사이 감이 무뎌졌다면 큰일이었다. 오늘부터 자신을 다그치겠노라 마음먹었다.

연무장은 깨끗했다. 쓰는 이가 둘뿐이었으므로 새것 같았다. 돌포장에 흠조차 가지 않았다. 이에샤는 깊숙한 쪽에 섰다. 검을 빼 들었다. 스란도 맞은편에 자리잡았다. 양손에 아밍 소드와 두 뼘 길이의 단검을 나누어 쥐었다.

“먼저 가도 되겠습니까?”

“새삼스레 묻지 않아도 돼.”

스란은 자존심이 셌다. 지기를 죽기보다 싫어했다. 황제에게 이에샤보다 믿음직스럽다 인정받겠다며, 백화 기사단으로 왔을 정도였다. 동시에 합리적이었다. 이에샤의 무위를 깨닫자 자기에게 유리한 조건을 찾아 헤맸다. 선공을 탐낸다든가. 이에샤가 “오늘은 한 손만 써서 상대할게.” 하여도 마다않았다. 이에샤는 스란의 약빠른 승부욕이 좋았다. 자신은 실력만으로 상대를 꺾어야 성에 찼지만,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는 방식도 멋졌다.

스란이 몸을 낮추었다.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상체를 틀었다. 비스듬하게 파고들었다. 이에샤의 옆구리를 노렸다. 키가 큰 덕분에 멀리에서도 공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에샤는 가만했다.

검을 들면 이에샤의 시계는 느려졌다. 움직임이 도막도막 나뉘어, 한 호흡에 한 개씩 펼쳐졌다. 물 흐르듯 검로에서 비켜났다. 스란은 이를 악물었다. 몇 번을 겪어 보아도 황당했다. 도대체 어찌된 반사 신경인지.

이에샤는 웃었다. 연무장으로 올 때의 먹먹함이 씻겨 나갔다. 여느 때와 같아졌다. 칼자루를 잡은 손에서부터 피가 끓어올랐다. 이에샤 앨저는 타고난 검술사였다. 검의 신이 있다면, 이에샤를 세상의 꼭대기에 세우려 했으리라. 검은색 롱소드가 뻗어 나갔다.

“큭!”

“난 스란 경이 짧은 칼을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키의 이점을 살리려면 장검이 나을 텐데.”

“……취향입니다.”

스란은 폭풍처럼 찔러 들어온 공격을 두 자루의 검으로 막아 냈다. 검신이 짧은 만큼 팔을 들어 올려야 했다. 이에샤는 오른발에 무게를 실었다. 그를 축 삼아, 왼다리를 뒤쪽으로 뺐다. 몸을 되돌리며 땅을 박찼다. 반동이 강했다. 이에샤는 자신의 팔다리를 완벽하게 가눌 수 있었다. 스란은 이에샤의 짐승 같이 유연한 몸놀림을 볼 때마다 궁금했다. 누구에게 ‘싸움’을 배운 걸까.

“경은 하반신을 더 단련해야겠어. 어차피 검은 가볍잖아? 버티는 힘은 다리에서 나온다고.”

“충고 감사합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에샤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남에게 타이른다기보다 혼잣말을 쏟아 내는 것만 같았다. 평소보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낯빛만은 잔잔했다. 나른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에샤는 오래간만에 평온을 누렸다. 머릿속에서 잡념이 날아갔다. 엘테르트도 떠오르지 않았다. 고양감이 이에샤를 감쌌다. 며칠을 쉬다시피 했건만, 상태가 좋았다.

‘아. 지금이라면.’

비로소 깨달았다. 그동안 지나치게 열심이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강박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매시간 곤두서서 지냈다. 엘테르트 때문에 어깻심이 풀려 버렸던 아흐레야말로 이에샤에게 모자랐던 조각이었다.

검을 일자로 그었다. 챙그랑! 파열음이 울렸다.

“어, 어떻게.”

스란은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부러진 아밍 소드를 내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단순한 베기로 철검이 동강나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이에샤 또한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였다.

성공이었다. 브링을 드러나지 않게 펼쳤다. 몇 달이나 제자리걸음만 하던 일을 이루어 냈다. 입술이 벌어졌다. 하하……. 메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웃음소리는 젖어들었다. 활기를 머금었다. 이에샤는 큰 소리로 파안했다. 이전보다 높은 경지로 접어든 것이다. 드디어!

“고마워, 스란 경! 덕분에 머릿속이 깨끗이 갰어.”

“앨저 경. 도대체, 당신은 무슨 힘을 감춘 겁니까?”

“글쎄?”

속가슴을 바로잡았다. 이에샤의 삶에서 가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사람도 아니었다. 검사의 정점. 그 목표만이 이에샤를 이끌 터였다. 이제는 엘테르트의 얼굴을 그려 보아도 무덤덤했다. 부질없이 느껴질 따름이었다. 검밖에 생각하지 않으리라.

이에샤의 첫사랑은 그렇게 지나갔다. 엘테르트 멘델린은 바라더라도 넘볼 수 없는 남자였다. 하나 검은 아니었다. 검술의 궁극은 이에샤를 기다렸다. 이에샤보다 더한 천재가 태어나지 않는 한, 거기에 다다를 수 있는 사람은 정해졌다.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포기해야지. 가질 수 있는 것만 보면 돼.’

괜찮았다. 슬프지 않았다. 이에샤의 웃음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엘테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배 속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방안을 서성거렸다. 책을 들었다가, 펼치지 못하고 덮기도 했다. 애가 끓었다.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이에샤가 눈에 밟혔다.

엘테르트는 친절하고 세심한 남자였다. 여자를 에스코트하는 데에도, 아이를 달래는 데에도 익었다. 남의 비위를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에샤가 어려웠다. 이에샤는 생각의 흐름이 뭇사람과 달랐다. 예민했다. 화를 참지 않았다. 이에샤만큼 엘테르트 멘델린을 면박한 사람도 드물 터였다.

그것은 괜찮았다. 이러한 사람이 있으면 저러한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멘델린의 주인은 누구라도 품어야만 했다. 엘테르트가 고민하는 까닭은, 이에샤의 아픈 곳을 후벼팠다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에샤는 도와준 여인이 저를 두려워할 때마다 아쉬워했다. 본인도 싹싹하지 못한 태도가 옹이였으리라. 제가 무심했다.

사과하고 싶었다. 이에샤에게는 무슨 행동을 해도 오답 같았다. 다가갈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밀레나 알디온이 편하기는 했다. 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극도로 살피는 아가씨였으므로. 밀레나는 모범적인 귀족 영애였지만, 이에샤에게도 독특한 재치가 있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꽤 좋아했다. 첫인상이 나빴던 만큼,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며 바뀌어 가는 모습이 고마웠다. 오래간만에 만났다고 반길 때는 귀엽기도 했다. 정이 들어 버렸다.

‘왜 그딴 헛소리를 지껄여서는…….’

============================ 작품 후기 ============================

이에샤는 하루 만에 검하고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짝짝짝

먼저 반한 사람이 꼭 지는 건 아니지요...이제 고뇌는 에르디의 턴...

사족이지만 이에샤처럼 저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근데 또 쉬자니 좀이 쑤셔서 쉴 수가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이네요...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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