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0 7. 리타 밸리의 별 =========================
뱃속이 답답하든 말든, 마차는 달렸다. 풍경이 고만고만한 속도로 흘러갔다. 에브라힐 궁전이 보였다. 종탑과 본궁의 지붕이 구름을 찔렀다. 워, 워어.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이에샤는 차체의 난간을 붙들었다. 훌쩍 뛰어내렸다. 마부는 매일같이 보아도 탄성이 나오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다.
이에샤는 경비병을 지나쳤다. 궁내로 접어들었다. 석곡궁을 향하지 않았다. 엘테르트부터 찾을 셈이었다. 이른 시각이니, 개인 사무실에 있으리라. 호랑가시궁으로 떠나기 전에 만나야 했다. 엘테르트는 에브라힐에서 가장 바쁜 사람에 들었다. 다른 곳에서 일을 볼지도 몰랐다. 이에샤는 사무실이 정답이기를 바라며, 송악궁으로 향했다.
송악궁에는 고위 관리의 사무실·휴게실이 모였다. 가 본 적은 없었다. 어디에 자리했는지만 알았다. 이동 마차를 잡아탔다. “송악궁으로.” 하고 댔다. 마부가 이에샤를 힐끗했다. 시선의 뜻은 빤했다. 백화 기사단장이 관료를 유혹해, 자리를 지킨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므로. 이에샤가 송악궁을 피해 다닌 원인이었다.
마차가 멎었다. 송악궁 정문에 다다랐다. 안쪽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기사단장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안경을 낀 관리가 가로막았다. 기사와 문관은 사이가 나빴다. 체사로 에버렛이 근위 기사단장이 되며 나아졌지만, 기사를 작위 가진 불량배로 보는 관리는 여전했다. 송악궁 관리자에게는 백화 기사단도 다르지 않은 성싶었다. 제국 기사와 문관―양쪽에서 치이는 처지. 이에샤는 싫증을 느꼈다.
“멘델린 남작을 만나러 왔습니다.”
“소공작께선 아침에는 손님을 받지 않으십니다.”
남작으로 일컬었건만 소공작으로 고쳐 답하다니. ‘네까짓 게 만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절이었다. 업신여기는 티가 뚜렷했다. 이에샤는 삐딱이 섰다. 팔짱을 끼었다. 관리를 흘겨보았다. 관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급한 일이에요. 정 어렵다면 멘델린 경한테 말을 전하겠어요? 앨저가 왔다고.”
“소공작께서는 이미 일정이 빡빡하셔서,”
“건방지게 굴지 마.”
이에샤가 씹어뱉었다. 관리는 움찔했다. 별궁 로비를 지키는 자라면 시종과 진배없었다. 속한 부처에서는 바닥을 기었다. 한 기사단의 으뜸을 짓밟을 깜냥이 못 되었다. 이에샤는 지금보다 나쁜 인상을 쌓기 싫어, 굽혀 주었을 따름이었다. 드러내 놓고 무시당하고도 참을 만큼 너그럽지는 않았다.
“갈래는 다를지언정 내가 그대보다 높다. 하극상으로 처분하기 전에 멘델린 경이 어디에 계시는지나 말해. 아니면 그대의 상관을 찾아가길 바라나?”
“…….”
“나는 백화 기사단장이고 앨저 백작이다. 멘델린 남작 개인의 일정이 어떻든지 간에, 급한 용무를 가지고도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어. 여기서 더 나를 모욕한다면 결투를 신청하겠다.”
스트레스가 아슬아슬했다. 호감을 품은 남자에게 이복동생과 비교당하고, 싸우고,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귀부인으로서 모욕적이었다. 인간적으로도 화가 났다.
이에샤는 웃음이 적었다. 무뚝뚝한 여자가 그릇되었다면, 귀부인의 소양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과 통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대화하기 어려운 상대로 평하기까지 했다. 귀부인으로도 지인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뿌리쳐 버린 셈이었다. 악의가 없었더라도.
관리도 이에샤의 무용을 들어 보았다. 근위 기사를 여럿 꺾었다고. 다른 기사단장과 겨룬 적은 없었으나, 뒤지지 않을 실력자라고도 했다. 누군가는 감탄했고 누군가는 부풀려진 이야기로 여겼다. 관리는 후자였다. 하나 이에샤와 칼싸움을 벌일 엄두는 나지 않았다.
“4층 전체를 멘델린 소공작께서 쓰십니다. 사무실은 복도 끝이고 휴게실은 복도 오른쪽, 세 번째 객실입니다. 나머지 방은 잠겨 있을 겁니다.”
“그래.”
이에샤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알았다는 말 또한. 계단으로 걸어갔다. 관리가 이에샤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이에샤는 모르는 체했다. 저딴 하급 관리,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4층으로 올라왔다. 한 번 쉬지도 않았으나 숨결은 잔잔했다. 이에샤에게는 암발라 산의 꼭대기까지도 갈 자신이 있었다. 복도를 지났다. 객실이 많았다. 이 층을 엘테르트 혼자서 쓴다니, 멘델린이 대단하기는 했다. 관리가 일러 준 휴게실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사무실이 맞으리라.
똑똑! 손허리뼈로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기척이 났다. 이에샤는 심호흡을 했다. 아흐레 만에 만나는 터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9시까지 처리할 일이 있다 했는데 누가 왔느냐.”
흠칫했다. 엘테르트의 목소리는 부드러이 울리곤 했다. 낮으면서도 맑았다. 루시온이 청량한 호수 같다면, 엘테르트는 봄날의 숲이었다. 지금처럼 불쾌한 음색은 귀에 설었다. 아니, 들은 적이라면 있었다. 두 사람이 갓 만난 무렵에. 오래간만이라 기억이 늦었다.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엘테르트가 “들어와라.” 하고 말했다. 이에샤는 머뭇거리다가, 문고리를 비틀었다. 조심스럽게 밀었다.
“저예요.”
“……앨저, 경?”
“음, 오랜만이죠? 우린 만날 때마다 이 말부터 하는 거 같네요.”
엘테르트가 백화 기사단 일에서 물러선 뒤로 그러했다. “오래간만입니다.” 하는 인사를 들을 때마다 왜 한숨이 나왔는가. 이제는 알았다.
엘테르트는 변함없었다. 아름답고 우아했다. 서류를 쓰느라 구겨진 소매만이 평소와 달랐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돌아 나왔다. 이에샤에게로 다가들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
망했다.
후회가 치솟았다. 엘테르트는 기억보다 시시하기는커녕 멋들어졌다. 놀란 낯을 만져 보고 싶어졌다. 걱정기 어린 눈빛은 심장이 내려앉으리만치 갸륵했다. 이에샤는 제가 미모에 약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셈브리온도 훤칠하게 생긴 남자였지만,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아저씨 아닌가.
‘아니지.’
루시온을 보면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엘테르트라서. 끌리는 사람이니까. 이에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앨저 경? 일단 앉으십시오. 무슨 일인지 얘기를…….”
“멘델린 경.”
“예?”
“우리 당분간 만나지 말아요. 일이 있더라도 석곡궁으로 찾아오지 말아 주세요.”
엘테르트는 말을 잊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를 만나기보다, 달아나야 한다고 깨달았다. 마음이 식어 한순간의 변덕으로 지나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싫었다. 멘델린의 후계자를 상대로 애를 끓이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마주보자마자 엘테르트의 잘못을 용서하고 싶어지는 내심이 싫었다. 이에샤는 사과받기로 했다. 엘테르트는 사과하러 오지 않았다. 응어리를 풀기 전에 잊기부터 촉구하는 감정이라니.
알디온 부부가 그러했다. 오스터와 셀더리는 사랑했다. 사랑하여, 자기네가 함께해야 한다고 믿었다. 자연스레 저지른 잘못을 뭉갰다. 두 사람의 합리화 때문에 에이릴리가 불행해졌다. 이에샤는 이성이 굳어질 정도로 거센 감정을 혐오했다.
“앨저 경, 지지난 주 일은 내가 미안합니다. 그때 심하게 흥분했으니까 열흘을 기다리려 했습니다. 경이 이리 화내실 줄 알았다면 욕먹더라도 찾아가 용서를 빌걸 그랬군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멘델린 경이 그 정도로 미안해한다면 그 일은 됐어요. 용서할게요.”
“그럼 왜…….”
엘테르트는 당혹했다.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아까부터 이에샤가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이에샤의 어깨를 쥐었다. 흔들어, 고개를 들도록 했다. 짙푸른 눈동자에 안절부절못하는 남자가 비쳤다.
루시온에게 들었다. 이에샤가 밀레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우여곡절이 있느니만큼 미묘한 사이일 줄은 알았다. 하지만 밀레나는 만날 때마다 이에샤의 안부를 물었다. 엘테르트는 자매가 그럭저럭 지내리라 여겼다. 루시온은 헛똑똑이가 따로 없다는 듯, “너 바보냐?” 하고 내뱉었다―황태자고 사촌동생이고 연을 끊고 싶었었다.
“알디온 영애의 화제를 꺼내서 화가 났습니까?”
“그것도 있고.”
“비교당했다고 생각했습니까?”
“악의가 없었다는 건 압니다.”
이에샤가 엘테르트의 손을 쳐 냈다. 엘테르트는 제 무례를 알아차렸다. 이에샤에게는 염문에 주의하라고 해 놓고, 몸에 닿다니.
“그냥 멘델린 경, 내가 당신 보기가 싫어요. 불편합니다.”
“앨저 경.”
“한 달. 딱 한 달만 우리, 마주치지도 말고 지내요.”
미심스러웠다. 꼴도 보기 싫다면, 없는 사람인 셈 치자고 해야 마땅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무얼까. 엘테르트는 초조한 낯빛을 띠었다. 소파에 앉았으면 했다. 차라도 대접하며 까닭을 듣고 싶었다.
끝내 대꾸를 삼켰다. 이에샤로부터 한 발짝 물러났다.
“돌아가십시오.”
“멘델린 경.”
“다음에 다시 얘기합시다. 오늘은 앨저 경이 흥분한 것 같군요. 사과도, 그때 다시 하겠습니다.”
이에샤는 안타까운 눈길로 엘테르트를 보았다.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끌리게 되다니, 세상만사 모르는 법이었다.
엘테르트의 꿈이 눈부셔서였다. 타고난 조건으로 강자와 약자가 가름 나지 않고, 남자가 여자를 찍어 누르지 않고, 이에샤가 검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는 세상. 싸우는 일 없이 공부로써만 검술을 닦아도 좋았다.
스스로도 느끼는 문제로―이에샤는 마음을 준 이에게 집착했다. 셈브리온은 괜찮았다. 셈브리온도 저를 사랑하니, 독점욕을 내비칠 수 있었다. 엘테르트는 달랐다. 앨저 백작이 멘델린의 도련님을 욕심내서 무엇하겠는가.
“갈게요.”
“조심히,”
조심히 가십시오. 엘테르트는 그렇게 이에샤를 보내려 했다. 관성적이고 상투적인 인사말이었다. 혀가 구르지 않았다. 끊어진 말허리를 던져 버렸다. 다르게 바꾸었다.
“조만간 봅시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한숨이 넘쳐흘렀다. 앨저 백작이 아니라, 알디온 후작가의 사랑받는 여식이었다면 어땠을까. 부질없이 그려 보았다.
가지고 싶은 것에 손을 뻗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떨어진 날만큼이나 서글펐다.
============================ 작품 후기 ============================
@ㅁ@ 어제는 친구들을 만나서 노느라...늦었습니다...졸려 죽겠네요...무슨 정신으로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비축분 없는 하루살이 인생 아슬아슬...
선추코 감사합니다...!!!
오전 5시 30분, 독자님들의 오해를 산 대사를 수정했습니다. 화가 풀리지 않았을 줄 알았다->흥분이 가라앉지 않았을 줄 알았다... 엘테르트는 당일에 사과하려 했지만, 이에샤가 책상을 내려치고 축객령을 내렸을 만큼 거세게 흥분했기 때문에 열흘을 채우고 찾아가려 한 것이었습니다. 표현을 모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