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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59화 (59/164)

00059 7. 리타 밸리의 별 =========================

* * *

밀레나는 기름하고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하녀가 드레스 자락을 펼쳤다. 풍성히 다듬어 주었다. 붉은 치마에 하얀색 보디가 고혹적이었다. 오늘은 앞머리를 넘겨, 이마를 드러냈다. 빛나는 금발을 땋아 뒤통수로 틀었다. 옆머리는 구불구불하게 말았다. 명화 속 미인처럼 창백한 아름다움이 뿜어 나왔다.

귀족이어서 천운이었다. 낮은 지체로 태어났다면 어떻게 한 번 해 보려는 남자가 줄지었을 것이다. 오스터는 귀족 사회에서도 부유한 축에 들었다. 셀더리 또한 명망 있는 집안의 고명딸이었다. 외가에서는 사생아였던 밀레나를 수치로 여겼으나, 요즈음 외조부로부터 안부 편지가 날아들었다. 누구도 밀레나를 업신여길 수 없었다.

밀레나는 제 미모를 좋아했다. 다툼이 벌어졌을 때 끼어들어서 울먹이면, 사람들은 봄눈처럼 누그러졌다. 떼쓰는 아이에게 “그러지 마.” 하고 어르면 아이도 잠잠해졌다. 요정이라도 본 양 밀레나를 쫓아다녔다. 아름다운 여자는 평온을 불러왔다. 밀레나가 생긋생긋 웃기만 한다면 모두가 평화로웠다.

얼굴 근육이 땅긴다고 느끼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는 모르는 남자의 구애를 상냥히 거절하는 게 힘들었다. ‘알디온 영애는 아름답고 정숙하다.’ 하는 시선에 응하는 일이 버거웠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살면서 이토록 편안하기는 처음이었다. 힘이 넘쳤다. 세상이 반짝반짝해 보였다. 등을 밟히며 코르셋을 졸라도 견딜 만했다. 채소를 손바닥만큼만 먹어도 배불렀다. 춤출 때 팔다리가 무겁지 않았다. 원래도 깨끗했던 살갗이 기름칠한 듯이 매끄러워졌다. 머리카락이 굵어져, 어떤 모양을 내든 화려했다. 뭇사람이 밀레나의 손짓 한 번에 자지러지라 웃었다. 온 사교계가 밀레나를 두고 들썩였다.

행복했다. 예뻐서 다행이었다. 남의 선망을 사고, 대가로 눈요기를 베푸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리타 밸리의, 별.”

밀레나의 손끝에서 희멀건 반지가 굴렀다. 은으로 된 밴드에 자그만 다이아몬드가 조르르했다.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안쪽에 깨알 같은 글씨로 ‘리타 밸리의 별’이라고 음각되었다. 고운 목소리로 따라 읽었다.

세공사 알드릭은 넋을 놓았다. 밀레나 같은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제국 전체를 사랑에 빠뜨렸다는 엘로나 알타로샤 황녀도―만나 보지는 못했지만―밀레나에 뒤처질 것 같았다. 밀레나의 겉모습은 감히, 신이 빚었다 할 만했다. 알드릭은 밀레나의 발치에 엎드리고 싶다는 충동마저 느꼈다.

“이건 무슨 뜻이야?”

“아, 예. 그건 제 작품마다 들어가는 각인입죠. 별 뜻은 없습니다. 죽은 딸아이 이름이 에노미아(델페레타어로 별을 뜻함)였던지라…….”

“딸이 죽었다고? 슬펐겠네. 아비가 이리 자신을 기리는 줄 안다면 황혼 속에서도 평안할 거야.”

“아름다운 영애께서 마음결마저 고우시군요. 그 반지가 마음에 드십니까?”

밀레나는 “응.” 하며 웃었다. 알드릭이 펼쳐 놓은 상자에 손짓했다. 하녀가 상자를 잡았다. 공손히 밀레나 앞에 내놓았다. 은과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들이 들었는데, 하나같이 청아한 맛이 있었다. 밀레나는 손가락을 띄운 채 상자 위를 훑었다. 목걸이 한 개를 집었다. 은줄이 두 가닥으로 꼬인 모양의 테두리가 사파이어를 감쌌다. 테두리에도 글귀가 쓰였다. 리타 밸리의 별.

“정말 예쁘다. 모두 마음에 들어.”

“아가씨 같은 분께서 저처럼 하잘것없는 세공사의 물건을 마음에 들어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영광입니다.”

“무슨 소리야. 당신의 작품은 훌륭해. 값을 치르라 이를 테니, 집사에게 받아 가렴.”

“가, 감사합니다!”

귀걸이 뒷면에까지 세 줄로 나누어, ‘리타 밸리의 별’을 새겨 두었다. 귀걸이는 손톱만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였다. 딸 사랑이 지극한 모양이었다.

알드릭 기즈는 제가 말한 대로 이름 없었다. 밥벌이나 하고 살까 싶었다. 밀레나는 어느 무도회에서 변변찮은 남작의 딸이 찬 목걸이로 알드릭을 알았다. 세공사가 누구인지 물어, 저택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알드릭의 솜씨는 훌륭했다. 어째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나 궁금할 정도였다.

밀레나가 알드릭의 장신구로 꾸민다면, 알드릭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세공사가 되리라. 앞날이 훤했다. 모든 일이 쉬웠다. 영예는 항상 손 닿는 곳에 있었다.

“내가 이, 리타 밸리의 별 시리즈를 사람들에게 알려 줄게.”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정말로 평생의 은혜라 생각하겠습니다.”

“뭘. 좋은 물건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라야지. 앞으로도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줘.”

문 쪽으로 턱짓했다. 알드릭은 그가 나가라는 뜻임을 알아들었다. 장신구가 든 상자만 빼고 짐을 챙겼다. 허리를 수그려 보였다. 밀레나는 잔잔한 미소로 알드릭을 배웅했다.

“리타 밸리의 별이라…….”

“아가씨, 그 문구가 마음에 드셨나요?”

“낭만적이잖니. 제 모든 작품에 죽은 딸의 이름을 새긴다는 게.”

리타 밸리는 무엇일까. 알드릭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딸과 관련된 낱말일 성싶었다. 밀레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알드릭의 장신구는 마음에 쏙 들었다. 자신이 만들어 낼 유행에 어울렸다. 옛적에 엘로나가 했던 것처럼.

* * *

「할 얘기가 있으니 들러라.」

이에샤의 기분은 곤두박질쳤다. 오스터는 편지지조차 쓰지 않았다. 자투리 종이에 명령을 적었을 따름이었다. 봉투가 몇 배는 값질 성싶었다. 알디온의 문장으로 봉랍하였으니까. 받자마자 열이 뻗쳤는데, 뜯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셈브리온이 대섰다. 몸을 기울였다.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아 왔다. 숨결이 옆얼굴을 간질였다. 이에샤는 주먹을 쥐었다. 셈브리온의 코를 때려서 밀었다. 아, 왜! 셈브리온은 콧잔등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며칠 전부터 이에샤가 스킨십을 뿌리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제 쪽에서 치댔으면서, 닿기만 해도 짜증을 부렸다.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양.

“아침부터 아버지 편지 받아서 짜증난 건 알겠는데, 이-샤. 너무하잖아.”

“뭐가 너무해. 아무리 스승이라도 다 큰 처녀한테 그렇게 붙으면 못 써.”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평생 세비랑 툭탁대고 살래―하던 게 어디의 누구셨더라?”

이에샤는 움찔했다. 받아칠 말이 궁색했다. 지난달까지 셈브리온의 어깨에 기대거나, 팔짱을 끼기도 했으므로.

누군가가 가까워지면 생각이 엘테르트에게로 튀었다. 상대방의 모습이 엘테르트로 덧씌워졌다. 엘테르트라면 어떨까 상상하게 되었다. 죽을 맛이었다. 셈브리온과 장난치기도 께름칙했다. 엘테르트는 부모 앞에서조차 흐트러지지 않을 듯 보였다. 제가 처지는 것 같았다.

엘테르트를 연모하느냐? 물음 받는다면 그 자리에서 침을 뱉을 수도 있었다. 어림도 없었다. 어쨌거나 그 남자는 잘생긴데다 상냥했고, 똑똑했다. 이에샤에게 모자란 참을성과 온화함을 갖추었다. 이에샤는 깔끔히 받아들였다. 저는 엘테르트에게 끌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네 아빠는 왜 부르는 거래?”

“세비. 이 종이 쪼가리에서 내가 뭘 얼마나 알아내길 바라?”

“미안.”

셈브리온은 잽싸게 사과했다. 우스개를 부렸다가는 브링이 날아올 태세였다.

이에샤는 이맛살을 찌그렸다. 화가 치밀었다. 오스터 알디온은 어디까지 저를 얕잡을 셈일까? 이에샤는 알디온에서 벗어났다. 앨저의 이름을 달았다. 한 가문의 주인이니, 작위가 다르더라도 오스터와 대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명령조로 오라 가라 할 상대가 아니었다.

“갈 거야?”

“내가 미쳤어?”

셈브리온은 실웃음을 흘렸다. 그럴 줄 알았다. 자신도 이에샤가 가지 않기를 바랐다. 알디온 저택에서 받았던 눈총을 돌이켜보았다. 성깔머리가 죽어 다행이었다. 셈브리온 데힐은 힐가를 깔본 용병의 팔을 잘랐다가, 길드 지부장의 눈에 들어서 용병이 된 독종이었으므로.

“그래도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는 하네.”

“가지 마. 난 너 거기 갔다가 또 무슨 소리 들을까 겁난다.”

“알아, 알아. 나랑 연 다 끊어진 집구석인걸. 할 말 있으면 정식으로 초대장 보내라고 해. 물론 안 갈 거지만.”

이에샤는 오스터의 편지를 봉투째 벽난로로 던져 넣었다. 불을 지필 철이 아니었다. 종잇장은 검댕에 묻혀 버렸다. 어울리는 꼬락서니였다.

코트 매무시를 고쳤다. 여름에도 지금처럼 입어야 하나, 걱정스러웠다. 백화 기사단 정복은 겨울에 지었다. 옷감이 두툼했다. 무더위에 입었다가는 쪄 죽을 법했다. 멘델린 경한테 하복도 나오는지 물어보자. 그렇게 떠올렸다가 흠칫했다.

셈브리온은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제자의 모습에 한숨지었다.

“봄에는 사람이 미치는 법이라지만.”

“뭐라고?”

“아무 말도.”

이에샤는 셈브리온을 째려보았다.

집을 나섰다. 잘 다녀와아. 등뒤에서 느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셈브리온이 손을 흔들었다. 기척으로 알 수 있었다. 이에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피올라 거리를 나아갔다.

역마차 정거장에 다다랐다. 마부가 이에샤를 맞아들였다. 뭐하는 여자인지는 몰라도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거기다 바지 차림으로―황궁에 드나드는 손님이었다. 반말에도 익어 보였다. 예사롭지 않은 지체가 분명했다. 황실의 취향 특이하신 분 애인이라도 되는가. 마부의 머릿속에 지저분한 추측이 스쳤다. 이에샤로서는 알 도리 없었으나.

이에샤는 마차 뒷벽에 기대었다. 눈을 감았다. 엘테르트와 싸우고 열흘째. 만나지 못한 지는 아흐렛날. 5월의 상순도 반이 지나갔다. 엘테르트는 사과하러 온다던 말을 지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에샤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사랑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가망 없는 사람을 그리기도 싫었다. 이에샤는 몸도, 마음도 오롯이 다스릴 수 있는 편이 좋았다. 질척질척한 감정을 떨어내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했다.

‘찾아가 봐야지.’

기억이란 아름다워지게 마련이었다. 보지 못할수록 마음에 박차를 가했다. 정신없이 헤어진 사람이라면 더욱. 마주하면 상상보다 못한 꼴에, 시큰둥해질 것이 뻔했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뒤숭숭했다. 고달픈 하루가 되리라는 예감이 피어올랐다.

============================ 작품 후기 ============================

본가에 내려왔습니다...레시피는 같을 텐데 왜 내가 한 반찬이랑 어머니가 한 반찬은 맛이 다를까...고민한 날이었습니다...

소제목이 이제서야 등장하네요...이번 챕터의 키워드입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아라카즈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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