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58화 (58/164)

00058 7. 리타 밸리의 별 =========================

(연참 2/2)

이에샤가 엘테르트의 표정을 뜯어보았다. 참말인지 확인하는 듯싶었다. 엘테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지간히도 신뢰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테르트가 화나지 않았음을 알자, 이에샤의 낯빛이 밝아졌다.

‘너는 괜찮다’. 그러한 답을 얻은 것 같았다. 셈브리온과 제 삶을 위해 킬타로스를 죽인 일은 이에샤의 가슴속에 엉겨붙었다. 밤잠을 깨우는 날도 있었다. 괜한 피를 흘렸나. 다른 방법을 찾아볼 노력도 하지 않고 힘으로 깨부숴 버렸나. 이러다 폭력에 젖어들지 않을까. 불안스러웠다. 엘테르트가 보장해 주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엘테르트는 부드러운 눈빛을 띠었다. 이에샤의 오해가 터무니없기는 했으나 흐뭇하기도 했다.

“그자를 죽인 일로 내가 화낼 줄 알았습니까?”

“그야 멘델린 경, 싫어한댔잖아요. 그런 짓.”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으으음.”

이에샤는 고민에 잠겼다. 킬타로스는 죽어도 쌌다. 델페레타의 국모를 해치려 한 죄만으로도 극형감이었다. 전에는 이에샤의 목을 조르기까지 했다―엘테르트에게 밝힐 수는 없었지만. 동료였다는 셈브리온조차 “다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죽여라.” 하고 말하지 않았는가.

소탈해도 귀족이었다. 이에샤에게 평민의 목숨이란 하잘것없었다. 외국에서 굴러먹던 용병이라면 더더욱.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죽이기를 망설였다.

“사람을 죽인 게 잘못이라기보다.”

“잘못이라기보다?”

“멘델린 경의 방식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엘테르트의 바람은 뚜렷했다. 사람의 괴로움이 천금같기를. 해코지하지 않고, 빼앗으려 들지 않는 사회를 꿈꾸었다. 타고난 바로 기득권이 결정되지 않았으면 했다. 이루지 못할 낙원일 뿐이더라도, 지향해 마땅한 세상으로 믿었다. 공감받자 이에샤에게 더없는 친밀감이 솟았다.

“공주님이 말씀하시더군요.”

“공주님께서? 뭐라고……?”

“근위 기사 리토스 경이 앨저 경의 공을 가로챘다고. 황후 마마를 찾아낸 것도 브링 덕택이었습니까?”

옐윈이 화두에 오르자 이에샤는 울적해졌다. 고개를 주억였다. 엘테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다고 여기기는 했다. 성수가 마력과 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건만, 성수의 샘을 의심하다니 부자연스러웠다. 이에샤의 브링 쪽이 설득력 있었다.

“앨저 경이 브링어라는 정체를 감추는 건 이해합니다. 나도 그게 낫다 생각하고요. 하지만 밝히는 편이 유리해질 날도 올 겁니다.”

“그때 가서 리토스 경의 거짓을 고발하라고요? 뭐가 달라지기나 하겠어요?”

“해 봐야 알 일이죠. 저는 폭력만큼이나 착취를 싫어합니다. 반드시 설욕하십시오.”

“자기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 말아요.”

투덜거리면서도 이에샤는 싫지 않은 눈치였다.

엘테르트는 조끼 안쪽을 뒤적였다. 선물을 꺼내도 될 성싶었다. 스카프 상자를 끄집어냈다. 이에샤가 의아한 눈길을 보내 왔다. 탁! 책상에 내려놓았다. 진녹색 몸체와 은빛 리본이 고아히 어울렸다.

“약속한 선물입니다. 내기, 그래요. 내기라고 치죠. 내기는 앨저 경이 이겼습니다.”

“어어, 정말이에요?”

“솔직히 센트라는 나이가 많아서 감각이 예스러운 편입니다. 세 번이나 돌려보내고 고른 디자인이니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이에샤는 조심조심 리본의 매듭을 만졌다. 보드라웠다. 스카프를 좋아하지도, 디자이너의 이름값에 매달리지도 않았지만 선물은 오래간만이었다. 어린애처럼 가슴이 뛰었다. 리본을 잡아당겼다. 사르륵 풀리는 느낌이 좋았다.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노란 벨벳으로 포장재가 들어찼다. 한가운데에 천이 개켜졌다. 집어 들어 보았다. 스카프가 펼쳐져 내렸다. 재질이 무엇인지 반투명했다. 너머가 비쳐 보였다. 금실로 물결무늬 테두리가 들어갔다. 한쪽 귀퉁이에는 화려한 히터 실드가 수놓였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꽃이나 새가 아니라 방패네요?”

“죄송합니다. 검을 부탁하기는 제가 싫었습니다.”

“아니에요, 이것도 마음에 들어요. 천이 엄청 얇다…….”

엘테르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석곡궁 정원에는 나무가 적었으나 멀찌감치 숲이 보였다. 앙상하던 몰골이 거짓말처럼 푸르렀다. 엿새 뒤면 5월이었다. 땡볕이 부르트기 직전 알맞게 따뜻할 무렵. 이에샤를 만난 때가 한여름이었으니, 반년 넘게 알고 지낸 셈이었다.

“곧 더워질 때잖습니까. 목에 감을 때보다 코트에 달았을 때 예쁘도록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브로치는 가지고 있습니까?”

“집에 하나 있을 거예요. 좋네요! 안 그래도 목에 뭘 두르는 건 갑갑해서 싫거든요.”

“그래요? 그날 감기가 심하게 들었던 모양입니다.”

“네?”

이에샤가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 올해 들어 감기에 걸린 적은 없었다. 무슨 이야기인가 헤아려 보았다. 조금 지나, 엘테르트에게 감기 비슷한 이유로 스카프를 맸다고 둘러댄 일이 떠올랐다.

“음, 그랬죠. 목이 아주 맛이 갔었죠.”

“대답이 시원찮군요.”

“전 멘델린 경처럼 기억력이 좋지를 못해서 지나간 일은 가물가물하답니다.”

엘테르트는 픽 웃고 말았다. 아마도 이에샤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리라. ‘무슨 곡절로 목을 감추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눌렀다.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니 되었다. 주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샤는 스카프를 여기저기 들여다보았다. 들뜬 티가 역력했다.

“오늘 오신 건 이거 때문이었나요?”

“네, 뭐.”

“이제 가셔야겠네요.”

“조금만 더 땡땡이치게 해 주십시오. 사흘째 퇴궐을 못하고 있습니다.”

엘테르트가 우는소리를 했다. 백화 기사단을 핑계 삼지 말아요. 이에샤는 짐짓 뿌리쳤다. 정말로 쫓아낼 셈은 없었다.

스카프를 상자로 되돌렸다. 뚜껑을 닿았다. 리본도 매어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포기하고 상자만 갈무리했다. 한동안은 숨기는 편이 좋으리라. 미엘라가 눈치라도 채면 곤란했다.

“그러고 보니 앨저 경, 스란 경과 올센 경이 함께 산다 듣고 경악했다 하더군요.”

“올센 경이 말했나요? 생각보다 입이 가볍네요.”

“제가 먼저 앨저 경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봤습니다.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이에샤는 ‘왜?’ 하고 생각했으나 내비치지 않았다.

“듣자 하니 올센 경 말로는 앨저 경이 사람을 거절하는 편이라고 하던데.”

“그런 얘기까지 하다니, 실례잖습니까.”

“정말 미안합니다. 다만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경은 저한테만 차갑게 행동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교성을 문제 삼으려나 했더니 뜻밖의 물음을 받았다. 엘테르트 또한 제가 매몰차다고 느껴 온 모양이었다. 기분이 상했다. 얼마나 살갑게 굴기를 바라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는 누구를 거절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멘델린 경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누구한테나 저한테 하듯이 하십니까?”

“올센 경에게 물어보세요. 제가 멘델린 경하고 얘기할 때 특별히 박하게 구는지. 아니라고 할 겁니다.”

엘테르트는 안도했다. 이에샤에게 퍼부었던 막말이 줄곧 마음에 밟혔다. 사과했어도, 브링어라는 이유만으로 이에샤를 꺼린 일은 죽을 만큼 창피했다. 이에샤가 저에게만 쌀쌀맞은 게 아니라면 다행이었다.

안타깝기도 했다. 이에샤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찬바람 도는 태도만 고쳐도, 여러 사람이 모여들 법했다. 혼기가 지나기 전에 좋은 남자도 만나야 할 터였다.

“조금만 웃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웃어요?”

“미소 짓는 여인한테서 벽을 느낄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앨저 경도 좀 더 웃고, 태도를 누그러뜨린다면 좋을 겁니다. 알디온 영애처럼.”

쾅!

흠칫 놀랐다. 이에샤가 책상을 내리쳤으므로.

엘테르트의 걱정은 참되었다. 악의라고는 없었다. ‘밀레나 알디온’이 이에샤를 건드리는 옹이인 줄도 몰랐다. 이에샤는 엘테르트를 노려보았다. 밀레나가 사근사근히 굴어, 제 편으로 만든 사람에게 먹은 욕이 얼마던가? 웃음으로 환심을 사는 방식은 질색이었다.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드러내 놓는 편이 나았다.

“죄송하지만 멘델린 경.”

“앨저 경?”

“저는 웃고 싶을 때 아니면 안 웃습니다. 제 이복동생처럼 365일 생글거리면서 사는 거, 전 못 해요.”

엘테르트는 손사래를 쳤다. 자매를 비교할 뜻은 없었다. 이에샤에게 얌전한 몸가짐을 요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에샤는 지금도 성실하고 유능한 여인이었다. 가까이에 저와 다른 부류가 있으니, 참고해 보라는 권유일 따름이었다.

“앨저 경, 난 경을 화나게 하려고 한 말이,”

“됐습니다. 돌아가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노여움이 가라앉을 때쯤 제대로 사과하러 오겠습니다.”

엘테르트가 자리를 털었다. 이에샤는 “올 필요 없어요.” 하고 내뱉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실 후회하는 참이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와 밀레나의 사이를 몰랐다. 속을 긁어 놓겠다는 꿍꿍이는 없었을 것이다. 욱해서 화풀이했을 뿐이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가 찾아오지 않으면 얼마나 허전해지는지, 전에도 겪어 보았다.

엘테르트가 문가로 걸어갔다. 이에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속이 쓰렸다. 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어찌하여 이토록 서글픈가. 입을 열자 메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멘델린 경.”

“예?”

“저는 제가 방긋방긋 웃어야만 좋아해 주는 사람하고는 친해지고 싶지 않아요.”

엘테르트가 돌아섰다. 이에샤를 건너다보았다. 맑고도 깊은 눈이 이에샤의 모습을 훑었다. 반듯한 입매가 휘었다.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이 이루어졌다.

“다행이군요. 전 앨저 경이 저한테 화만 내도 싫어지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탁. 사무실 문이 닫혔다. 이에샤는 긴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뜨끔뜨끔했다. 선물을 받았을 때의 기분이 싹 가셨다. 엘테르트의 목소리만이 귓전에 맴돌았다.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사람은 멘델린. 나는 앨저. 저 사람은 멘델린 소공작. 나는 몰락한 백작.’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미운 정이라는 놈이 무시무시했다. 그 증오스러운 이복동생을 질투해 버리다니. 북받친 감정에 놀라기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아직은 그 정도의 깊이였다.

============================ 작품 후기 ============================

복잡하고 힘겨운 하루였습니다. 후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1. 제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 완전한 선역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매화 누군가는 그릇된 행동을 할 거고, 그게 주인공일 수도 남주인공일 수도 엑스트라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독자님들을 답답하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에샤 앞에는 여러 껄끄러운 상황이 닥칠 겁니다. 사이다처럼 시원한 해결은...솔직히 장담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작가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텍본 유출 따위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는 한)완결까지 조아라에서 연재하겠다, 이뿐입니다.

2. 작가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되도록 성실 연재를 지키겠지만 부득이하게 쉬는 날이 늘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3. 남주인공은 엘테르트입니다. 사상이 공산주의자스럽지만 그쪽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로 그려 나가겠습니다. 루시온과의 삼각관계는 되도록 독자님들이 만족하실 수 있게끔 충실히 풀겠습니다. 엘에샤도 루에샤도 지켜봐 주세요.

4. 성범죄 피해자와 미투 운동을 응원합니다. 이겨냅시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미지슬로 님, 이호수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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