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7 7. 리타 밸리의 별 =========================
(연참 1/2)
“뭐가 말입니까?”
“둘이 같이 산다는 거야, 지금? 언제부터? 난 전혀 못 들었는데!”
스란이 미엘라를 힐끗했다. 묘한 눈빛을 띠었다. ‘어라?’ 하고 당황하는 듯했다. 미엘라는 앞몸에 늘어뜨린 머리채를 어깨 뒤로 넘겼다. 설명을 시작할 때의 버릇이었다. 스란은 이에샤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시더한테는 얘기했는데, 그때 앨저 경도 계셨다고 저희가 착각했나 봐요.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야 없지만…….”
이에샤는 놀라움을 갈무리했다. 배신감을 느끼는 자신이 낯설었다. 스란하고도 미엘라하고도, 기사단과 관련한 대화밖에는 나누지 않았다. 사적인 일을 털어놓을 만한 사이는 못되었다. 어째서 섭섭한가? 생각해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실은 제가 기사단으로 옮기면서 하녀 기숙사에 살 수가 없어졌거든요.”
“아.”
“저희 집은 다이칸의 시골이고, 모아 놓은 돈으로는 셋방 구하기도 빠듯하고. 스란 경이 시오 거리에 사신다고 들은 게 떠올라서 상담했더니 집안일을 해 준다면 들어와 살아도 좋다고 하셔서요. 지지난 주부터 신세 지고 있어요.”
스란의 집도 처음 알았다. 혼자 사는지, 가족과 사는지조차 몰랐었다. 머릿속이 멍했다. 같은 시간을 함께했는데도 판이했다. 스란과 미엘라는 고민을 나눌 만큼 스스럼없어졌다. 이에샤는 따돌림당하는 기분마저 맛보았다. 야속스러운데, 입 밖으로 내자니 민망했다.
신분 때문일지도 몰랐다. 둘은 평민이었으니까. 날 때부터 후작 영애였던 이에샤가 어려울 법도 했다.
“두 사람. 혹시 나랑 얘기하는 게 불편하거나 어려운가? 귀족이라서?”
“아니요? 처음엔 무서웠는데 앨저 경은 귀족 나리치고 소탈한 편이세요. 괜찮아요.”
“제가 앨저 경을 어려워했다면 단검을 집어 던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미엘라가 “히익.” 하며 질겁했다.
귀족이 무서운 게 아니라면 왜? 이에샤는 의문을 품었다. 미엘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에샤가 서운한 모양인데, 자존심 탓인지 나타내지를 못했다. 상황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으로서 책임감이 들었다.
“앨저 경은 좀, 뭐랄까. 그런 건 있어요. 남하고 어울리기를 싫어하시는 느낌.”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이쪽에서 다가가도 내쳐지는 거 같아요. 그 부분에서는 어렵다 싶기도 하네요.”
이에샤는 충격받았다. 사람들과 섞이고 싶었다. 좋아서는 아니었지만, 다른 이와 어울리지 않고 살기는 어려움을 깨달았으므로. 노력했다. 곤란해하는 여자가 보이면 다가가 손 내밀었다. 인정받고자 아등바등했다. 하지만 동료는 이에샤로부터 벽을 느꼈다는 것이다. 허탈했다.
“오해야. 난 그냥, 그런 거 잘 못해. 남이랑 잡담하고 상담하고 그런 적이 없어서.”
“앨저 경은 사교 모임에도 전혀 안 나가신댔죠. 초대장은 종종 받지 않으세요? 그런 데 나가 보시는 건요?”
“모르는 사람이랑 만나는 게 대체 뭐가 재밌지?”
스란과 미엘라는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에샤의 사교성은 시원시원한 몸가짐과 다르게 끔찍했다. 알기는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이야. 스란이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앨저 경이 그러시다면 지인하고만 어울려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꼭 새 사람 사귀며 살 필요는 없죠. 저도 암무 동료 대여섯이랑 올센 경 말고는 거의 안 만납니다.”
“대여섯?”
“예. 인간관계 좀 좁더라도 자기가 편하면 그만입니다.”
물 흐르듯이 타격이 들어왔다. 대여섯이 적다니! 이에샤는 “나한테는 스승님 한 명뿐인데.” 하고 말하지 못했다. 답지 않게 움츠러들었다. 9년 동안 셈브리온만 보고 산 건 너무했나 싶었다. 자신은 생각보다 더 이상한 모양이었다.
부질없이 물어보았다.
“그, 아는 사람이 딱 한 명뿐이어도 자기만 편하면 그만이겠지?”
“세상에 그렇게 비사교적인 사람도 있습니까?”
“…….”
이에샤의 입이 다물어졌다.
* * *
앨저 백작은 법도에 시큰둥했다. 아랫것과도 허물없었다. 영 귀족답지 않았다. 반면 멘델린 소공작은 법도에 철저했다. 뒤집어 말하자면, 기분 내키는 대로 아랫것을 괴롭히지 않았다. 극히 귀족적이었다. 미엘라는 어느 쪽도 좋아했다. 이에샤나 엘테르트 같은 귀족만 있었다면 하녀의 삶도 편했으리라.
엘테르트는 미엘라에게 공부가 막히지는 않느냐 묻곤 했다. 관리들에게 홀대받으면 도와주었다. 생김새마저 근사했다. 왕자님이 따로 없었다. 실지로 황녀의 아들이기도 했다.
루시온이 바쁜 만큼 엘테르트도 바빴다. 루시온은 굵직굵직한 건을 도맡았으나, 엘테르트는 에브라힐 궁전 전체를 아울렀다. 업무량은 배로 많았다. 때문에 백화 기사단을 신경쓰기는 오랜만이었다. 미엘라가 그동안의 활동 보고서―이에샤가 쓰고 제가 첨삭한―를 끌어안았다. 엘테르트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앨저 경은 어떻게 지내느냐. 무심코 던진 물음에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사람을 꺼리는 줄 몰랐다. 신경질적이기는 했지만, 첫 만남이 험악했으니 저에게만 그러리라 여겼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의외로군. 워낙에 대범한 사람이니 친화적일 줄 알았다.”
“겉보기보다 섬세하세요. 매일 같이 일하다 보면 눈에 보이더라고요.”
“나도 어서 만나러 가야 할 텐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미엘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테르트는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허둥지둥 손사래 쳤다.
“그녀한테 줘야 할 게 있어서 그렇다. 일에 치이느라 아직까지 건네주지 못했어.”
“그럼 제가 전해 드릴까요?”
“마음은 고맙다만 남의 손에 맡기기엔 좀 곤란한 물건이라.”
책상 서랍을 힐끗했다. 열면 비단 끈으로 묶은 상자가 나왔다. 디자이너 이보르는 엘테르트가 여성용 물건을 주문하자 엘로나의 선물로 받아들였다. 점잖은 디자인을 보여 주기에 묘령의 여인이 쓸 것이라고 하자, 기묘한 표정을 띠었었다. 오해를 살 만도 하지. 엘테르트는 한숨지었다.
“사실 전 앨저 경이 말하신 ‘한 명뿐인 지인’이 멘델린 남작님일 줄 알았어요.”
아귀힘이 들어갔다. 펜이 미끄러졌다. 재무부에서 올라온 서류에 금이 그어졌다. 펜촉이 다다른 곳에서 뽁, 구멍을 냈다. 엘테르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다. 종잇장을 구겼다.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서류를 다시 만들 재무부 관리에게 미안해졌다.
“허튼소리를 하는군. 앨저 경은 나를 별로 탐탁해 하지 않아.”
“그,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주제넘은 소리를.”
“화내는 건 아니다만 입을 단속하거라. 나는 남자이니 괜찮아도 앨저 경이 추문에 휩싸이면 치명적이니까.”
“예, 남작님.”
미엘라는 보고서를 날짜순으로 쌓았다. 엘테르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몸을 꾸벅했다. 하녀다운 인사였으나, 엘테르트는 지적하지 않았다. 새로운 신분에 익숙해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리라. 미엘라의 일 솜씨는 빈틈없었다. 그것으로 좋았다.
“실례했습니다.”
“조심히 돌아가거라.”
미엘라가 문으로 다가갔다. 사무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엘테르트는 상앗빛 코트 자락을 눈으로 좇다가, 벌떡 일어섰다. 의자 밀리는 소리가 울렸다. 미엘라가 뒤돌아보았다.
“아니, 같이 가지. 앨저 경을 만나야겠다.”
“백화 기사단에 무슨 문제라도……?”
“나한테도 휴식이 필요해.”
‘세상에!’
미엘라의 뺨이 달아올랐다. 이에샤를 만나는 일이 휴식이라니! 엘테르트의 뜻은 이에샤에게 스카프를 전해 주는 김에 숨을 돌리겠다는 것이었으나 미엘라는 설레고 말았다. 차기 멘델린 공작과 망한 가문의 백작. 이에샤가 걱정되면서도, 별수 없이 두근거렸다.
엘테르트는―미엘라의 속내 따위 까맣게 모르고―책상 서랍에서 스카프가 든 상자를 꺼냈다. 품에 갈무리했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미엘라의 앞장에 섰다. 둘은 함께 석곡궁으로 향했다.
미엘라에게는 하녀로 일할 때의 습관이 남았다. 에브라힐에 흩어진 이동 마차를 잡기 어려워했다. 엘테르트는 자연스럽게 마차를 불러 세웠다. 미엘라를 에스코트하여 태우고, 자신도 올랐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손님에 이에샤는 놀랐다.
“멘델린 경? 어쩐 일로?”
엘테르트가 백화 기사단 사무실로 들어왔다. 미엘라가 뒤따랐다. 이에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엘라는 보고서를 올리러 가지 않았던가? 엘테르트가 찾아오다니 어리둥절했다. 보고서에 실수라도 있었나, 돌이켜보았다. 이에샤는 일단 일어나 엘테르트를 맞이했다.
“오래간만입니다.”
“보름이 넘었죠? 바쁘시다고 듣긴 했습니다.”
“늘 바쁘니 괜찮습니다. 앨저 경, 몸은 어떻습니까? 그날 자객과 싸우다 다치진 않았습니까?”
생경했다. 이에샤는 브링어였다. 예사 사람에게 당할 턱이 없었다. 알 만한 사람이 걱정해 주니, 계면쩍었다. 처음 만난 무렵을 떠올리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동시에 찔끔했다. 엘테르트는 싸움박질을 싫어했다. 경멸하고 증오하는 정도였다. 살인을 저질렀다고 야단치러 왔는가 싶었다. 화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에샤는 조마조마하며 엘테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엘테르트는 여상히 소파에 앉았다. 사흘 전에는 루시온이 차지했던 자리였다. 이에샤도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내렸다.
“올센 경, 잠깐 나가 있을래? 스란 경은 순찰 나갔고 시더가 주방에 있을 거야.”
“차를 준비하라 이를까요?”
“으음. 멘델린 경, 차 드실래요?”
“괜찮습니다.”
미엘라가 어째서인지, 들뜬 낯으로 떠나갔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쟤가 뭘 잘못 먹었나.
“전 말짱해요. 그보다는 제가 적을 그냥 죽여서 황태자 전하가 곤란해지셨다던데요.”
“그 문제는 걱정 마십시오. 백화 기사단장이 바뀔 일은 없을 겁니다.”
“예. 설명은 들었답니다.”
대화가 끊어졌다. 엘테르트는 어떻게 화두를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이에샤가 약속을 기억하는지조차 미지수였다. 스카프를 내밀었다가, 웬 거냐는 소리를 들으면 겸연쩍을 터였다. 이에샤는 이에샤대로 답답했다. 저는 엘테르트에게 할 말이 없었다. 온 쪽에서 용건을 꺼내야만 했다.
한참 만에 엘테르트가 말문을 떼었다.
“혹시 기억합니까.”
“뭘요?”
“사냥 대회를 조용히 넘기면 선물을 드리겠다고 한 얘기.”
이에샤는 눈을 멀뚱멀뚱했다. 기억하다 뿐인가? 궁금해서 좀이 쑤시던 차였다. 내다본 대로 엘테르트는 살인을 문제 삼으러 온 듯했다. 이에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미안합니다.”
“예?”
이번에는 엘테르트가 얼떨떨해했다. 이에샤가 사과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로부터 시선을 비꼈다. 입속말에 가까운 소리로 꿍얼거렸다.
“아니, 하지만 진짜 방법이 없었거든요. 그놈 꽤 강했단 말이에요.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앨저 경, 설명을 좀 차근차근히 해 주십시오.”
“그 자객,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고요! 제가 멘델린 경의 주의를 무시하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죽이지 않으면 황후 마마께서도 위험해질 판이었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엘테르트는 이해력이 좋았다. 이에샤의 생각도 알아차렸다. 홍차 색 눈동자에 기막힌 빛이 돌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에샤가 보기에 자신은, 꽉 막히다 못해 고집불통인 모양이었다.
“아니, 그 일은 됐습니다. 적이 먼저 칼을 뽑으면 앨저 경도 칼을 뽑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몸은 지켜야지요.”
“어쨌든 사냥 대회를 조용히 못 넘긴 건 사실이니 내기는 패배를 인정하겠어요.”
“앨저 경…….”
엘테르트는 까마득해졌다. 무엇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몰랐다. 후회도 들었다. 제가 지나치게 엄하게 굴었던 성싶었다. 이에샤는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교사에게 벌받아서 기죽은 학생처럼 보였다.
“저는 근위 기사들과 싸우지 말라고 했지, 앨저 경의 임무를 방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네?”
“황후 마마를 지키는 임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