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5 7. 리타 밸리의 별 =========================
4월도 말로 접어들었다.
이에샤는 훈장을 받았다. 영춘 사냥 대회에서 황후를 지킨 덕이었다. 반대 의견은 없었다. 이실리아가 이에샤의 무위가 빼어나 자객을 물리쳤다고 못박았으므로. 실력이 공고해진 셈이었다. 이실리아는 이에샤가 브링어임은 밝히지 않았다. 지금껏 브링어라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숨겨 왔구나 판단한 것이었다. 이에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질 듯했다.
옐윈 리토스도 훈장을 받았다. 빠른 판단력으로 비벨라의 샘을 떠올리고 이에샤를 이끌었다는 까닭이었다. 이에샤로서는 속이 터졌다. 하나 아니라고 나서지도 못했다. 대륙을 통틀어도 브링어는 50명이 되지 않았다. 브링이란 미지에 싸인 힘이었다. 멀리 떨어진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해 봐야 믿어 주지 않을 성싶었다. 브링어인 기사단장들이 이에샤의 편을 들어줄 리도 없었다.
이에샤는 싫증을 느꼈다. 신년맞이 무도회 때보다 큰 상을 받았지만 울적했다. 발부리에 놓인 돌멩이를 찼다. 툭. 툭. 잔돌은 굴러가다가 이에샤에게 차이기를 거듭했다. 답답했다. 뭇사람의 인정을 받고, 무리로 끼어들고 싶은데 되지 않았다. 사교계를 주름잡는다는 이복동생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걷다 보니 서향궁이 나타났다. 라제카 공주를 생각했다. 라제카는 계집인데다 어렸다. 남의 배로 뛰어난 머리를 타고났는데도 티 내지 못했다. 만난 날 나누었던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그때도 라제카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지금은 뼈저리게 공감했다.
브링을 선보이고, 불세출의 재능을 드러내고 싶기도 했다.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적에는 그럴 셈이었다. 셈브리온이 말려서 감추었을 뿐이었다.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 브링을 썼으면 으뜸으로 합격했을까? 근위 기사 노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지.’
루시온이 일깨워 주었다. 이에샤는 오래도록 남자끼리만 굴러온 집단에 녹아들 수 없을 거라고. 이에샤도 동감했다. 옐윈 같은 놈을 하나도 아니고 수십 명씩, 매일 본다고 상상하니 끔찍했다. 제국 기사단에 들어갔다면 일주일 만에 사상자를 냈을 것이다.
돌멩이가 톡톡 튀었다. 하늘색 치맛단 앞에서 멈추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인두로 지져, 늘어뜨린 여자아이가 섰다. 방긋 웃었다. 이에샤는 놀라지 않았다. 라제카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었다. 일부러 돌을 라제카 쪽으로 차며 온 터였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아, 무릎 꿇지 말아요. 치레는 됐어요. 벨제아 부인도 없는걸요.”
“부인은 어디 계십니까?”
“앨저 경, 여기는 서향궁이에요.”
제집이니 시녀를 거느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공주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했다. 진종일 사람이 따라붙는다면 울증에 걸리고 말리라. 이에샤는 “제가 바보같은 질문을 했군요.” 하고 중얼거렸다.
라제카가 이에샤를 올려다보았다. 양팔을 뻗었다. 이에샤는 물리치지 않았다. 라제카를―팔이 닿지 않도록 품을 벌려―그러안았다.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내 떨어져, 한 발짝 물러났다. 라제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에샤가 어리광을 받아 주기는 처음이었으므로.
“우리 오랜만에 보잖아요. 라제카는 반가운데, 경은 기분이 별로인가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끌어안을 만한 게 필요해 보였거든요.”
이에샤는 실웃음을 흘렸다. 똑똑한 라제카다웠다. 저를 안아 준 것이 아니라, 이에샤 쪽에서 온기를 바랐음을 눈치챘다. 라제카가 손짓했다. 정원을 가리켰다.
“라제카랑 좀 걷지 않을래요?”
“기꺼이, 공주님.”
둘은 관목을 네모반듯하게 잘라, 문기둥처럼 세운 입구를 지나쳤다. 서향궁의 정원은 석곡궁과는 다른 멋이 있었다. 자그마한 분수대가 곳곳에 섰다. 앙증맞은 물줄기를 흩뿌렸다. 히아신스 송이송이가 요정의 잠자리 같았다. 라제카가 백철 울타리 안쪽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말해 줄 수 있나요?”
“뭘 말입니까?”
“앨저 경의 기분이 나쁜 이유요. 경은 다른 여인들의 슬픔을 돌보는 기사님이니, 경의 슬픔은 내가 들어 줄게요.”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화두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옐윈이 자신의 공을 가로챘다고 고해바쳐 봐야 무엇하겠는가? 라제카에게는 결과를 뒤집을 힘이 없었다. 옐윈은 황실의 훈장을 받은 기사로서 거들먹거리며 다닐 터였다.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누구에게라도 속내를 털어놓았으면 했다. 이러다가는 제가 갑갑증으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실은, 공주님…….”
이에샤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비벨라의 샘을 찾아낸 것은 우연이었고, 자신이 앞장섰으며, 옐윈은 베르타의 죽음을 욕보였을 따름이라고. 캠프로 돌아왔을 때 이에샤의 활약은 사라져 버린 채였다. 억울했다. 라제카는 잠자코 들어 주었다.
넋두리가 끝났다. 이에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쏟아 내면 시원해질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변함없이 화가 치밀었다. 말만으로 풀어지는 응어리가 있겠는가? 옐윈이 거꾸러지는 꼴을 보아야만 성에 찰 듯싶었다.
라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제카에게는 현자의 혜안 못지않은 눈이 있었다. 이에샤의 속도 들여다보였다.
“앨저 경. 우리, 옛날이야기 할까요.”
“옛날이야기요?”
“델페레타의 건국사 말이에요. 시조 아벨테오노가 헤라이어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 풍요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 앨저 경도 알죠?”
“압니다만, 왜 갑자기?”
“에브라힐 도서관에는 온갖 기록이 있어요.”
뜬금없었다. 이에샤는 란델의 수다를 떠올렸다. 달라도 쌍둥이라고, 종잡기 힘든 점이 닮았다. 라제카는 이에샤가 따분해하자 서둘러 잇대었다.
“어릴 때, 아벨테오노 황제가 겔모어 평야에서 헤라이어 대군과 부딪친 전투의 기록을 쭉 찾아봤어요.”
“아, 예.”
열네 살짜리 아이가 읽기에는 고리타분한 주제였다. 이에샤는 라제카의 학구열에 혀를 내둘렀다. 저는 살면서 도서관을 찾아 본 일이 없었다. 라제카나 엘테르트가 도서관에 놀러―또는 쉬러―간다고 할 때마다 낯설었다.
“그중에 흥미로운 문헌이 있었어요. 겔모어 전투에 적지 않은 수의 여성이 참전했다는 거예요.”
“금시초문인데요. 백화 기사단 이전에 여기사는 없었던 거로 아는데…….”
건국 황제 아벨테오노 델피르는 헤라이어 제국의 기사였다. 당시 헤라이어는 부패할 대로 부패하였다. 끝내 청렴한 아벨테오노가 반기를 들었다. 황가를 멸족하고, 나라 이름을 바꾸며 델페레타가 태어난 것이다. 아벨테오노는 폭정에 지친 백성을 이끌고 싸웠다. 겔모어 전투에 나간 이도 농민이나 사냥꾼이 대부분이었다.
라제카가 설명을 죽 벌여 놓았다. 이에샤는 ‘내가 지금 뭘 하고 앉았지?’ 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농부, 사냥꾼, 대장장이, 또는 건국 황제를 따르던 기사의 아내들이 전투에 뛰어들었대요. 단순히 배식이나 구호를 맡은 게 아니에요. 병장기를 들고 싸웠다고 해요. 그중 어느 부인은 뛰어난 기마술로 적진에 뛰어들어 헤라이어 백부장의 심장을 찌르기도 했대요.”
“어떻게 여자가,”
멈칫했다. 이에샤 또한 여자이면서 검을 쥐는 자였다. “어떻게 여자가 그럴 수 있느냐?” 따위의 괄시는 지긋지긋했다. 제 입으로 같은 말을 할 뻔한 금방이 믿기지 않았다. 허둥지둥 둘러대었다.
“어떻게 여자도 그때 싸웠다는 걸 사람들이 모르는 거죠?”
“도서관에도 여성의 참전을 다룬 문헌은 하나뿐이었어요. 나도 왜 여자들의 공적만 그늘에 덮이는지는 몰라요. 다만.”
라제카가 이에샤를 곧게 보았다. 이에샤는 라제카의 눈동자가 샛별 같다고 생각했다. 그 눈을 보자, 뒤숭숭하던 가슴속이 가라앉았다.
“앨저 경이 실수했다거나 운이 나빠서 공을 가로채인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경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는 부당한 일을 겪은 거랍니다.”
“리토스 경을 보내지 않고 제가 사람들을 부르러 갔어도 같았을까요?”
“그랬다면 어마마마를 찾아낸 공뿐 아니라 보호한 공마저 리토스 경한테로 돌아갔겠죠. 나쁜 건 앨저 경이 아니라, 앨저 경을 몰라주는 모두예요. 잘못은 남이 했는데 왜 앨저 경이 풀이 죽어요.”
라제카 공주는 장담할 수 있었다. 이에샤는 틀리지 않았다. 제자리를 지키며 꿋꿋이 책임을 다한―능력 있는 기사단장이었다. 이에샤의 노력이 알려지지 못하여 안타까웠지만, 당장 해결할 수는 없으리라.
라제카가 치맛자락을 집었다. 양쪽으로 펼쳐 보였다.
“라제카 바르벨로샤가 앨저 경에게 감사를 표할게요.”
“예? 고, 공주님. 공주님의 이야기에 위로받은 건 저인데 어찌.”
“어마마마를 찾고 지켜 줘서 고마워요. 앨저 경 같은 기사를 얻은 건 델페레타의 축복이에요.”
이에샤는 눈매를 추어올렸다. 눈시울이 아렸다. 물기가 배어날락 말락 했다. 슬기롭고 사랑스러운 소녀를 부둥켜안을 수만 있다면! 라제카가 황족이라 아쉬웠다. 무릎을 꿇었다. 빙그레 웃어 보였다.
“공주님의 말씀, 영광으로 받잡겠습니다. 앞으로도 황후 마마와 공주님을 지켜 드릴 겁니다.”
“역시 앨저 경은 늠름한 모습이 보기 좋아요.”
이에샤도 같이 생각했다.
뎅그렁…….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오전 11시가 되었다. 라제카가 수학자들과 만나기로 한 시각이었다. 이에샤는 라제카를 문간까지 데려다주었다. 라제카는 팔을 붕붕 흔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놀랄 만큼 어른스럽다가도, 이럴 때는 애티가 났다.
이에샤도 석곡궁으로 향했다.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오전 수련을 빼먹었다. 오후 수련은 여느 날보다 힘들이겠다고 마음먹었다. 1년 내내 작약화가 흐드러지는 정원을 지나쳤다. 출입문에 다다랐다.
걸음을 멈추었다. 스란과 미엘라와 시더가 바깥에 나온 채였다.
“뭐야, 다들 왜 그러고 있어?”
“애, 앨저 경! 어서 오세요!”
미엘라가 얼빠진 목소리로 맞아 주었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겁 많은 미엘라나 호들갑스러운 시더라면 몰라도, 스란까지 이상했다. 엄지손을 씹는 꼴이 심상치 않았다. 궁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누구 껄끄러운 사람이라도 왔어? 대체 왜들 이래?”
“나야.”
문이 벌컥 열렸다. 이에샤는 두어 발짝 물러섰다. 손님의 얼굴을 확인했다. 반듯반듯한 이목구비가 낯익으면서도, 뜻밖이었다. 루시온의 눈가에 피로가 짙었다.
“전하?”
“보고 싶었다고, 자기……, 라고 농담할 기력도 없군. 들어가서 얘기 좀 하지.”
“무슨 일이길래 그러시죠?”
루시온은 이에샤가 들어설 때까지 문을 잡아 주었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레이디처럼 대해 주니 어색했다. 사무실 쪽으로 손짓했다. 루시온이 비척거리며 따라왔다. 석곡궁 사람들이 얼어붙은 까닭도 알 성싶었다. 오늘 황태자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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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챕터 시작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