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6. 폐허에 틔운 싹 =========================
(연참 2/2)
엘테르트는 바쁘게 움직였다. 이실리아를 살피기도 했고, 아랫것들을 부리기도 했다. 황제와 황태자도 산을 내려왔다. 이에샤는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1년의 안녕을 비는 행사에서 대표격인 황후가 납치당했다. 예삿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정신없었다. 사냥 대회도 중단되었다. 신년맞이 무도회에 이어 두 번째였다. 영년 토너먼트를 더하면, 올해의 큰 행사는 모조리 물거품이 되었다.
이실리아를 납치하려다, 베르타로 데려간 마법사는 찾지 못했다. 비벨라를 뒤져 보아야 소용없었다. 숲은 넓고 우거졌다. 성수의 샘이 내뿜는 기운으로 마력을 다스리기도 어려웠다. 추적 마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실리아가 샘터로 끌려간 까닭도, 성수와 마력의 작용 때문이라고 했다.
이실리아는 돌아오는 가마 안에서 까무러쳤다. 이에샤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은 황후를 지켰고, 인도했다. 더는 무슨 일이 생겨도 제 책임이 아니었다.
짜증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캠프로 돌아와 보니, 이실리아를 찾아낸 공이 옐윈에게로 돌아갔다. 브링으로 숲을 헤집은 이는 이에샤였다. 한데 이야기가 옐윈이 비벨라의 샘으로 안내한 것처럼 바뀌었다. 바로잡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피곤했다. 사람과 싸울 기력이 없었다.
그리고…….
“어서 와, 이에샤 언니.”
“네가 왜 여기 있어?”
“언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못 올 데 왔어?”
밀레나가 계면하게 웃었다. 병아리색과 연두색 옷감을 써 지은 드레스가 봄꽃 같았다. 이에샤는 인상을 구겼다. 힘들어 죽겠는데, 얄미운 낯을 보니 피로가 몰려왔다. 사냥 대회 참가자와 구경꾼의 캠프는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밀레나가 황족의 막사까지 찾아온 이유를 몰랐다. 얘는 밸도 없나. 설레설레 손사래를 쳤다.
“나 너랑 말싸움할 기운 없으니까 마차 타고 집에나 가.”
“내가 뭘. 난 언니랑 다투려는 거 아니야. 그러지 말고, 우리 오랜만에 만났잖아.”
“난 훨씬 오랜만이 됐으면 했단다. 한 50년쯤?”
밀레나는 슬픈 얼굴을 했다. 이에샤가 원망스러웠다. 어찌하여 달아나려고만 하는가? 저는 참말로 이에샤를 걱정했다. 피올라 거리에서 별일은 없는지. 황궁 생활은 잘하는지. 오늘도 사냥 대회가 중단되고, 뛰어다니는 대회 관리자들이 백화 기사단장 어쩌고 하기에 겁났다. 무슨 일인가 물어보고 싶었다.
이에샤에게는 밀레나와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네가 안 가겠다면 내가 갈게. 아버지한테 죽을 날은 받아 놓으셨냐고 안부 전해 주렴.”
“어, 언니!”
이에샤는 홱 돌아섰다. 발걸음을 떼었다. 내키는 대로 걸어갔다. 밀레나가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그늘에서 쉬다가 에브라힐로 돌아갈 셈이었다. 이실리아가 기절해 버렸으니 갈 때는 하녀들의 마차를 타야 하나 싶었다. 거부감이 들기는 했지만, 말을 탈 줄 모르니 도리 없었다.
밀레나는 오도카니 섰다. 이에샤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쫓아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바지 차림의 이에샤를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녀자들 천막으로 돌아가야 할 성싶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먼 거리도 아니건만, 비벨라의 공기는 수도보다 맑았다. 숨을 들이마시면 청량한 맛이 났다. 나뭇잎이 부대꼈다. ‘차르르’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느릿느릿 거닐었다.
여기야…….
밀레나는 주춤했다. 웬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무가 얽히고설킨 쪽에서였다. 다가가 살펴보았다. 드레스를 입고는 들어가지 못할 풀숲이었다.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말소리가 들린 듯한데, 사람이 있을 만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일까? 의아쩍었다.
여기야, 여기…….
이번에는 똑똑하게 들었다. 솜털이 곤두서는 줄 알았다. 후다닥, 나무새로부터 물러섰다. 경계심 어린 눈길로 숲 속을 들여다보았다.
무언가가 빛났다. 덤불 아래에 반짝이는 물건이 떨어진 채였다. 호기심이 솟았다. 무릎을 구부렸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해도,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았다. 보이기로는 작고 동그란 보석인 모양이었다.
밀레나는 팔을 내밀었다. 흰색 보석을 끄집어냈다. 따뜻했다.
“이-샤, 어서 와!”
셈브리온은 청소 중이었다. 자루걸레로 바닥을 밀었다. 양동이에 구정물이 들어찼다. 청소가 늦었다. 이에샤가 여섯 시면 돌아온다고 했으므로, 낮에 저녁밥을 준비해야 했다. 오늘은 이에샤가 나라에서 가장 높은 여자를 모신 날이었다. 평상시보다 실력을 발휘했다.
이에샤의 낯빛이 이상했다.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셈브리온은 고개를 기울였다. 걸레를 세웠다. 배로 자루의 끄트머리를 눌렀다. 이에샤 쪽으로 윗몸을 숙였다. 얼굴을 살펴보았다. 안 좋은 일이라도 겪었는가, 걱정되었다. 궁전의 사내자식들이 이에샤를 잡아먹지 못하여 안달이라고 들었다. 또 어떤 놈팡이야?
“이-샤? 어디 아파?”
“아니, 아냐. 괜찮아. 당신이 왜 이 시간에 청소하고 있나 해서.”
“저녁 거하게 차리느라 낮시간을 다 쏟았지. 배고프지? 금방 차려 줄게.”
이에샤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셈브리온의 마음은 고마웠으나 음식이 들어가지 않을 성싶었다. 지금도 속이 부대꼈다.
“나 입맛이 없는데, 그냥 일찍 자면 안 될까?”
“초저녁인데?”
“오늘 만든 밥은 내가 내일 다 먹어 치울게, 세비. 미안해. 정말 미안.”
셈브리온은 눈만 멀뚱멀뚱했다. 이에샤가 사과하는 까닭이 의아쩍었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옛 친구를 해쳤다는 생각에,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도저히 바른 대로 고할 수 없었다.
셈브리온이 “파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손을 뻗었다. 이에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식어서 맛대가리 없는 걸 어떻게 너한테 먹이냐. 내일 새로 지어 줄게. 알잖아, 네 스승님 많이 먹을 수 있는 거.”
“난 괜찮은데.”
“나도 괜찮아.”
이에샤의 등을 밀었다. 방으로 들여보냈다. 어서 들어가 쉬어. 상냥하게 말해 주었다. 킬타로스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모르는 셈브리온으로서는, 이에샤가 높으신 분을 수발드느라 힘들었겠거니 할 따름이었다.
이에샤의 살인을 알았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킬타로스는 흘러가 버린 인연이었다. 지금 셈브리온에게 중요한 사람은 이에샤였다. 이에샤만이 사랑하는 가족이었고, 살아가는 원동력이었다. 내란을 거치며 폐허가 된 마음에 움튼 하나뿐인 초록이었다.
이에샤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실리아 황후는 친자식에게 매정했다. 셈브리온은 피붙이도 아닌 소녀를 길러 냈다.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에 의구심을 내세우기는 싫었다. 셈브리온이 이에샤를 사랑하지 않는 모양새가 정상이라면, 이에샤는 비정상인 편이 행복했다. 그런 것도 괜찮았다.
세상에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았다. 이실리아는 이실리아대로 이런저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터였다. 베르타도 그러했을 것이다. 셈브리온이 이에샤의 곁에 머무르는 데에도, 숱한 시간이 원인으로 쌓였다.
누가 어떻게 살아가든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에샤는 게을렀다. 셈브리온, 라제카, 루시온, 미엘라, 스란, 시더. 이만큼의 사람을 신경쓰고 살기도 벅찼다.
‘그리고 멘델린 경.’
이보르 센트라의 스카프를 선물하겠다고 한 말은 어찌되는 걸까. 엘테르트는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을 달았었다. 싸움을 넘어서 살인을 저질렀다. 내기의 향방이 궁금했다.
피곤한 사냥 대회였다. 이에샤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 작품 후기 ============================
길었던 챕터가 끝났습니다...분량이 모호하게 나왔네요...
여기까지가 대략 1부에 해당하는 내용이었어요...다음 챕터부터 본격적으로 로맨스도 팍팍 넣고 사건도 팍팍 일으키고 하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