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53화 (53/164)

00053 6. 폐허에 틔운 싹 =========================

(연참 1/2)

킬타로스는 휜 검으로 앞을 겨누었다. 이에샤가 달려들더라도 받아칠 수 있게끔.

이에샤는 멍해졌다. 벨체터의 용병이 이실리아를 노렸다, 깨달은 순간 오싹했다. 셈브리온은 킬타로스를 동료라고 일컬었다―지금은 아니라 했으나. 셈브리온이 휘말릴지도 몰랐다. 이에샤의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스쳤다. 루시온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셈브리온에게 탈이 난다면, 제국을 뜰 다짐까지 했다.

까마득했다. 기사로서는 황후를 해치려 든 범죄자를 문초실로 보내야 했다. 이에샤 개인으로서는 킬타로스를 쫓아 버리고, 사건을 덮고 싶었다. 셈브리온이 가담하지 않은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작은 불씨가 큰불로 번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심문 중 셈브리온의 이름이 나오면 어쩌겠는가?

고개를 설레설레했다. 황후가 지켜보았다. 킬타로스와 싸우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이에샤는 마음을 다졌다. 죽여서 입을 막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낙엽 더미를 묏자리 삼았던 베르타의 주검이 떠올랐다. 딜란 렌디드를 고문했을 때와는 달랐다. 목숨을 빼앗아야 했다.

‘유감은 없어. 저놈도 나를 죽이려 했었고. 그냥…….’

찜찜했다. 이에샤는 폭력이나 살인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셈브리온을 위해―자신을 위해, 사람을 죽이겠다는 결심이 괜찮은 걸까. 엘테르트가 마음에 밟혔다.

킬타로스는 조소했다. 어린 계집의 고뇌가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벨체터는 끔찍한 나라였다. 선량한 백성보다 강도가 많았다. 여자를 욕보이려는 쓰레기도 넘쳤다. 자신을 지키려면 용병이 아니더라도, 남에게 칼을 꽂아야 할 때가 잦았다. 이에샤는 처음으로 살인을 앞둔 사람과 같은 얼굴을 했다. 말랑말랑한 제국인다웠다.

상대는 브링어였다. 허무맹랑했지만 제 눈으로 이에샤의 브링을 보았다. 맞붙는다면 승패는 뻔했다. 이에샤가 각오를 굳히는 순간, 킬타로스는 브링에 찢겨 나갈 터였다. 괜찮았다. 이에샤를 이기겠다는 헛꿈은 없었다. 빈틈만 파고들면 되었다.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윽, 갑자기!”

이에샤가 검을 내리그었다. 킬타로스의 검을 쳐 떨어뜨릴 셈이었다. 킬타로스는 아귀힘을 주어 버텼다. 구둣발로 이실리아를 걷어차려고 했다. 이에샤는 놀라서 검을 거두었다. 이실리아를 감쌌다. 어깨를 부둥키고 킬타로스의 발길질을 맞아 주었다. 아악! 이실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괘, 괜으십니까. 마마! 황후 마마!”

“아프다. 허리가, 골반이 너무 아파! 놓아 줘!”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에샤가 급작스럽게 끌어안고, 킬타로스의 발로부터 충격까지 전해졌다.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괴로웠다. 가뜩이나 아프던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이에샤는 이를 악물었다. 차인 옆구리가 욱신욱신했다. 아픈 내색을 할 짬조차 없었다.

킬타로스가 킬킬거렸다. 검을 쳐들었다. 이실리아의 목을 노렸다. 이에샤는 칼끝으로 킬타로스의 공격을 쳐 냈다. 몸을 비틀었다. 다리를 휘둘렀다. 킬타로스의 발을 걸려고 들었다. 킬타로스는 날렵하게 뒤로 물러났다.

이에샤도 알아차렸다. 킬타로스의 과녁은 이실리아뿐이었다. 이에샤는―루시온이 탐내리만치―과감한 승부사였다. 환자를 지켜 가며 벨체터의 용병과 겨룰 수는 없었다. 킬타로스를 놓아준다는 선택지도, 사로잡는다는 선택지도 집어던졌다.

‘죽이자.’

검은색 칼날이 버르르 떨렸다. 이실리아가 보더라도 상관없었다. 이실리아가 잘못되어 벌을 받거나 무능력자로 찍히느니, 브링을 들키는 게 나았다. 이에샤의 검에 새파란 기운이 송골송골했다. 이실리아가 숨을 집어삼켰다.

이에샤는 온몸에 브링을 맴돌렸다.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팔다리가 가뜬했다. 땅을 박찼다. 킬타로스는 피하지 못했다. 롱소드와 사브르가 부딪쳤다. ‘쨍’하는 소리가 울렸다. 부러진 칼날이 날아갔다. 쇠를 잘라 내는, 묵직하면서도 찌르르한 느낌이 이에샤의 팔목을 타고 흘렀다.

“장, 난 아닌걸!”

매서운 브링이었다. 절삭력만큼은 셈브리온을 앞질렀다. 킬타로스가 동강난 검을 든 채 뒷걸음쳤다. 이에샤의 검이 가로로 움직였다. 기검을 쏘아 보냈다. 옆으로 두어 바퀴 굴렀으나, 이에샤가 돌진해 왔다. 윗몸을 젖혔지만 부질없었다.

‘아고르 그 자식, 꼭 중요한 때에 실수해서는!’

이실리아를 놓쳐 이곳으로 보내 버린 동료를 헐뜯었다. 목숨은 아깝지 않았다. 제국에 혼란을 불러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못하랴? 황후를 죽이는 데 실패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힐가의 검으로 만든 롱소드 탓일까? 힐가가 떠올랐다. 킬타로스 같은 꼬마들에게 밥을 먹이고, 검술을 가르치고, 용병 길드에 심부름꾼 자리나마 마련해 주었던 여자. 힐가도 이에샤처럼 맹렬하게 싸웠었다. 천재 셈브리온조차 힐가와의 대련을 두려워했다.

이브론 녀석, 언젠가 힐가를 이겨 보이겠다고 큰소리쳤지. 힐가는 양아들에게 지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용병 길드에서는 힐가에게―언제나처럼―하잘것없는 건이라고 했다. 여자 용병에게도 맡길 만한 일이라고. 뒷골목에 똬리 튼 부랑배를 소탕하면 그만이었다.

그 실상이 왕실 기사단의 탈영병들일 줄이야! 힐가는 선발대로 쓰인 셈이었다. 죽을힘을 다하여 가져온 정보는 왕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힐가는 황혼의 세계로 떠났다. 훈련받은 기사에게 입은 상처 탓이었다. 양아들인 셈브리온은 보수도, 위로금도 받지 못했다. 그때 셈브리온의 꼴은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브론한테,”

검이 목까지 다가들었다. 킬타로스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파랗게 빛나는 칼날이 킬타로스의 울대를 쑤셨다.

‘제국을 뜨라고. 일러 줘야 하는데.’

이에샤는 숨을 몰아쉬었다. 검을 되돌렸다. 핏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킬타로스의 목은 반만 잘렸다. 머리통이 덜렁거렸다. 징그러웠다. 죽어 마땅한 자를 죽였으니 두렵다거나, 괴롭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기분 나쁠 뿐이었다. 욕지기가 솟았다.

“황후 마, 우욱.”

윗몸을 고부렸다. 가슴을 치며 꺽꺽거렸다. 토사물은 올라오지 않았다. 한동안 헛구역질만 해 댔다.

“괜찮, 으십니까. 황후 마마.”

“나, 나는, 나는 괜찮다. 그보다 앨저 경, 네가.”

“저도 문제없습니다. 싸움이 끝나니 힘이 풀려서 그렇습니다.”

이실리아는 치마폭을 부여잡았다. 온몸이 매라도 맞은 양 아팠다. 봄은 싫었다. 나쁜 일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킬타로스의 주검을 힐끗했다. 허둥지둥 눈길을 돌렸다.

“저자가 베르타를 죽였느냐?”

“아마도요.”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벨체터어를 쓰더구나. 제국인이 아닐 게다.”

이에샤는 고개만 주억였다. 아는 사실이라고 대꾸해 봐야 긁어 부스럼이리라.

이실리아의 이마에 땀방울이 빼곡했다. 이에샤는 조마조마해졌다. 어깨라도 붙잡아 줄까 했으나, 살갗에 무엇이 스치기만 해도 아픈 모양이었다. 이실리아는 한참 만에야 숨결을 가라앉혔다.

“……베르타의 아이에게 미안하구나.”

“세네기아 부인의 아이 말입니까?”

“올해 열 살이라고 들었다. 베르타는 늘 자식을 염려했지.”

베르타는 삼십 대 중반의 귀부인이었다. 자식이 있을 만도 했다. 이에샤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저도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나 킬타로스의 패가 남았을지도 몰랐다. 옐윈이 사람을 데려올 때까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되었다.

“어쨌든 베르타의 원수는 갚았으니, 고맙다. 앨저 경.”

“아닙니다. 황후 마마의 존체를 노렸으니 당연한 일이죠.”

“베르타는 내 가장 충직하고 영리한 신하였다. 에브라힐로 돌아가면 정식으로 백화 기사단에 상을 내리마.”

황후를 지켜 주어서가 아니라 시녀장의 원수를 갚아서 상을 내리겠다니. 둘의 사이가 헤아림보다 각별했던 성싶었다. 이에샤는 어색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이실리아가 한 손으로 가슴께를 눌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견디기 벅찼다.

“눈앞이 가물거린다.”

“예? 마마, 어딘가 다치셨습니까?!”

“아니. 무리를 한 것 같아. 의식을 다잡기가 힘들구나, 정말로.”

“안 됩니다. 아마도 가마꾼들하고 의사가 같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 정신 단단히 차리셔야 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황후 마마.”

이에샤는 안절부절못했다. 무릎을 굽혔다. 이실리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까무러치지 않도록, 되풀이해서 말을 붙였다. 이실리아는 몽롱한 낯으로 이에샤를 바라보았다.

예쁜 아가씨였다. 눈빛이 맑았다. 살갗에 핏기가 뚜렷했다. 저와는 다르게 튼튼한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이 앳된 여인이 브링어라는 사실을 돌이키자 우스워졌다. 세상에 참 터무니없는 일도 있었다.

“……터무니없다고.”

“예? 계속 말씀하십시오. 말을 계속하시면 정신을 잃지 않으실 겁니다.”

“베르타는,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도.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지.”

떠오르는 대로 늘어놓았다. 이에샤는 “예. 예.” 하며 들었다. 갈피가 잡히지 않는 이야기라도 좋았다. 계속 시키고, 맞장구쳐야 했다. 힘들게 지켜 낸 황후가 잘못되어서 곤욕을 치르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녀도 첫아이를 사랑하지 못했다고 했어.”

“그랬군요. 세네기아 부인에게 자식이 여럿 있었습니까?”

“난산이었단다. 나처럼, 아주 힘들었다지 않니. 다시는 애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는데. 하필이면 딸이었다는 거야. 주변에서 어찌나, 집안의 대가 끊어졌다고, 들볶아 대는지. 죄 없는 어린 것이 미웠다고 하더구나.”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탓일까? 베르타의 딸은 두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네기아 부부는 양자를 들여야만 했다. 사촌의 차남을 얻고서야 평화가 찾아왔다. 베르타도 양아들에게는 정을 붙일 수 있었다.

라제카와 란델을 낳은 무렵 이실리아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자기 배로 낳은 쌍둥이가 역겨웠다. 갓난아이의 손발이 발목을 휘감은 가시덩굴처럼 보였다.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기분이었다. 치다꺼리는 유모가 해 주었지만, 황실의 법도는 이실리아가 가르쳐야 했다. 그 아이들에게 시간을 쏟아야 한다니 끔찍했다. 몽유병까지 생겼다. 밤마다 아픈 몸으로 방안을 서성였다.

이실리아가 침실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시녀 한 사람이 번을 섰다. 겨우살이궁으로 온 지 오래지 않은 후작 부인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베르타가 이실리아에게 따뜻한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

「마마는 이상하시지 않습니다. 제 인생을 고달프게 하는 아이를 어찌 사랑하겠습니까? 어미도 사람인데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힘든 걸 싫어하는 법이 아닙니까. 마마께서는 자연스러운 일을 겪고 계시는 겁니다.」

이실리아의 슬픔을 꿰뚫어본 것 같았다. 잠꼬대를 들어서이기도 했으나, 동병상련인 까닭도 있었다. 베르타도 첫딸을 사랑하지 못하는 제가 그릇되게 느껴졌었다. 이실리아는 베르타의 이야기 귀 기울였다. 덕분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이실리아의 큰 눈에 눈물이 방울졌다. 이에샤는 놀랐다. 입다문 동안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울면 지치십니다. 이실리아는 답하지 않았다. 윗몸을 기울였다. 이마를 땅에 닿을 듯이 내린 채, 어깨를 떨었다. 이에샤는 엎드려 흐느끼는 이실리아를 내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그리하였을까.

“황후 마마! 앨저 경!”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샤의 낯빛이 환해졌다. 샘터 어귀로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엘테르트가 달려 들어왔다. 반듯한 얼굴을 보자, 들끓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이에샤는 “멘델린 경!” 하고 외치며 팔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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