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2 6. 폐허에 틔운 싹 =========================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나무줄기가 모여 통로를 이루었다. 늘어진 이파리들이 그늘을 드리웠다. 컴컴한 굴 같았다. 뱃속이 술렁거렸다.
이에샤는 브링을 밝히려 했을 터였다. 엘테르트는 때가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브링어의 출현은 소란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은 이실리아를 찾는 일이 급했다. 거짓말까지 해 가며 이에샤에게 수색을 맡겼다. 잘한 행동일까? 믿음이 서지 않았다. 저 때문에 이에샤가 난처해질 것만 같았다. 까닭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엘테르트의 생각이 계면하게, 이에샤는 고마워했다. 이제는 세상 일반에 자신이 모난 돌임을 알았다. 셈브리온의 걱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브링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다면 숨기고 싶었다.
덤불을 헤쳤다. 길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땅을 디뎠다. 비벨라는 해에 한 번만 열리는 숲이니만큼, 다니기가 까다로웠다. 이에샤는 브링으로 오감을 갈았다. 중심을 잃지 않도록. 뛰듯이 걸었다. 옐윈은 이에샤가 지나간 길을 쫓는지라 수월했지만, 몇 번이고 휘청거렸다. ‘사냥을 배웠다는 말이 진짜인가 보군.’ 하고 떠올렸다. 그만큼 이에샤는 잘 나아갔다.
하지만 내심은 갈팡질팡했다. 숲에서 누군가를 찾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소소리바람이 귀를 어지럽혔다. 코에는 흙냄새가 자욱했다. 특유의 가득찬 생명력이 촉각마저 독차지했다. 기척을 잡더라도 사람인지 짐승인지 가릴 수 없었다. 날래다면 짐승일 테고, 캠프 쪽으로 움직인다면 사냥 대회 참가자이겠거니 할 따름이었다.
“헉, 헉……! 앨저 경! 지금 흔적을 살피며 이동하는 게 맞습니까?”
“숨이 찬가 보군. 따라오기 힘들어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믿어.”
“무, 물론입니다! 경보다 저의 차림새가 무겁잖습니까!”
근위 기사는 가죽으로 만든 흉갑과 무릎 보호구를 차고 왔다. 이에샤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시겠지.” 하고 내뱉었다. 옐윈의 얼굴이 벌게졌다.
“막사 쪽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아. 귀환 명령이 전달된 모양이야.”
“그걸 어찌 압니까? 발자취라도 보이는 겁니까? 허풍이 심하군요.”
“정신 사나우니까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지 좀 마. 리토스 경, 그대는 도대체가 왜 자꾸 나한테 덤벼드는 거야?”
이에샤는 발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앞쪽에서 기이한 느낌이 풍겼다. 인기척과는 달랐으나 이에샤의 신경을 쿡쿡거렸다. 무어가 있는지 봐야만 할 듯했다.
옐윈도 숲길에 적응했다. 숨결이 가라앉았다. 이에샤가 롱소드로 가시덤불 헤집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날씬한 몸 어디에서 힘이 솟는지, 넝쿨을 잘도 뜯어냈다. 옐윈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앨저 경이 뭇 레이디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몰라.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앨저 경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니까 여자들 분위기가 들뜨지 않습니까! 요즘 무슨 일만 생겼다 하면 백화 기사를 부르겠다 으름장을 놓아 대는데 아주 죽겠습니다. 사람이 선의로 길을 가르쳐 준다는데도 치한처럼 쳐다보고.”
이에샤는 칼등으로 옐윈을 두들겨 패고 싶어졌다. 충동을 참았다. 셈브리온이 준 검이었다. 옐윈 같은 놈팡이의 피를 묻히기에는 아까웠다.
옐윈은 우락부락했다. 검법도 덩치에서 나오는 팔심으로 상대를 으스러뜨리는 식이었다. 이에샤는 개의치 않았다. 브링을 쓰면 옐윈보다 더한 힘도 낼 수 있었으므로. 그러나 다른 여자는 아니었다. 옐윈 앞에 서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낄 터였다.
셈브리온과 만난 무렵을 돌이켜보았다. 사나운 인상의 용병이 무서웠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를 달래고자, 거울 앞에서 웃는 연습까지 했다. 그러고도 이에샤의 마음을 열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공포와 노력과 인내. 옐윈은 어느 하나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대와는 영영 잘 지낼 수 없겠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내가 경을 많이 봐주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둬. 리토스 경은 이미 나한테 숱한 무례를…….”
이에샤의 부츠 굽에 밟힌 나뭇가지가 빠득, 부서졌다. 이에샤는 우두커니 섰다. 옐윈도 멈추었다. 의아한 낯빛을 띠었다. 왜 주춤하는가? 이에샤의 어깨를 넘어다보았다.
베르타가 가로놓였다. 심장께에서 피가 솟았다. 단번에 꿰뚫린 모양이었다. 시내라고 부르기도 무엇한 물줄기가 흘렀다. 풀어진 머리채를 적셨다. 헤벌린 입술과 부릅뜬 눈. 죽음 앞의 여인을 나타낸 석고상처럼 부자연스러운 생동감이 넘쳤다. 소름 끼쳤다.
이에샤는 시신으로 다가갔다. 황후 마마는 다정한 분이십니다. 몸이 아프셔서 마음의 여유도 사라졌을 뿐이죠. 말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눈이라도 감겨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손대기 싫었다. ‘이것’은 베르타 세네기아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넋이 빠져나간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리토스 경. 돌아가서 이 일을 알려.”
“안 됩니다.”
“뭐?”
“제 임무는 앨저 경의 감시잖습니까? 고작해야 시녀가 죽었을 뿐이지요. 황후 마마를 찾을 때까지 함께할 겁니다.”
어처구니없었다. ‘고작’. 하찮아하는 말씨가 못마땅했다. 시신이라도 추슬러 주고 싶건만, 옐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나쳐야 할 성싶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에샤라고 슬프겠는가? 얼굴을 마주한 적조차 손에 꼽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충격받았다. 식사하기도 힘들 것 같았다. 옐윈의 덤덤함이 껄끄러웠다.
발걸음을 떼며 물어보았다.
“리토스 경, 살인해 본 적 있지?”
“검을 쥐는 자라면 누구나 있지 않겠습니까. 아, 백화 기사한테는 없겠군요. 제가 깜빡했습니다.”
‘이런 거였구나.’
평화로운 델페레타의 기사라도 싸울 일은 일어났다. 다른 나라로 파병할 때, 외적을 막아 낼 때, 죄인을 붙잡을 때……. 많은 기사가 사람을 죽였다. 또는 사람이 죽는 광경을 보았다. 시체 한두 구에 놀랄 턱이 없었다. 엘테르트의 이야기가 되살아났다.
「폭력에 젖어들면 남의 슬픔에 무뎌집니다. 그러니까 나는 앨저 경이 말로 풀어 나가는 방법도 배웠으면 합니다.」
엘테르트가 옳았다. 기사가 되기 전의 이에샤는 ‘폭력적’이었다. 역경에 처하더라도 브링어이니 괜찮다고 여겼다. 무력으로 해결할 생각밖에는 없었다. 모르는 채 살았다면 자신도 옐윈과 비슷해졌을까.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념을 떨어냈다. 이실리아가 가까이 있을지도 몰랐다. 베르타를 죽인 까닭은 인질로서의 가치―몸값이라든가―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실리아는 살려 두었을 법했다. 살려 두었어야만 했다.
참방.
이에샤는 움찔했다. 먼 거리에서, 고인 물에 무언가가 떨어진 듯했다. 숲이 내는 소리와는 달랐다. 흘려 넘기기 힘들었다. 향하던 쪽이 아니었다. 방향을 홱 틀었다. 옐윈이 “뭘 알고 가기는 하는 겁니까?” 하고 투덜거렸다.
이에샤는 이마에 부딪치는 잔가지를 걷어 냈다. 걸음을 서둘렀다.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실리아일까? 베르타를 죽인 사람일까?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나무새의 끝자락이 나타났다. 빈터가 펼쳐지는 성싶었다. 햇빛이 부시게 들이쳤다.
엘윈이 혼잣말했다.
“여긴 분명…….”
이곳을 아는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마지막 나무줄기를 붙잡았다. 몸을 내밀었다. 튕기듯이 그늘로부터 벗어났다. 삼림이 뿜어내는 빽빽한 공기가 가셨다. 산들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샘터였다. 이끼가 끼지 않은, 새하얀 바위가 섰다. 키가 훤칠한 어른만 했다. 아랫동아리에는 너르고 우묵한 돌이 놓였다. 바위 복판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 푸르스름한 빛깔을 띤 샘물이 돌판에 괴었다. 알싸한 냄새가 물씬했다.
옐윈은 매해 황후의 호위를 맡았다. 사냥 대회를 마칠 때는 황후가 성수를 뜨도록 정해졌다. 그것을 암발라 산의 대사원까지 옮겨야 했다. 이실리아의 몸으로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국, 근위 기사들이 대신하고는 했다. 옐윈도 이 ‘비벨라의 샘’에 와 보았다.
샘물가에 이실리아가 앉은 채였다. 조약돌을 주웠다. 돌판으로 던져 넣었다. 참방! 물낯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에샤는 옐윈을 돌아보았다. 입을 벙긋거렸다. 사람을 불러와. 옐윈도 알아듣고,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뒷걸음질했다. 이윽고 몸을 돌렸다.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에샤는 느릿하게 이실리아에게로 다가갔다.
“황후 마마.”
이실리아가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놀란 눈빛이 이에샤를 향했다.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드레스가 지저분해진 걸 빼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활기 없는 눈동자도 여전했다. 이에샤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찌 이런 곳에 계십니까.”
“기다리고 있었다.”
“저를요?”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구나.”
이실리아는 가차 없이 잘라 말했다.
“베르타를 기다렸다. 가구 그림자에서 웬 손이 뻗어 나와 나를 잡아당기는데, 베르타가 힘껏 밀쳐 내더구나. 다른 그림자에 빠져 버리기는 했지만 최악은 면한 게지. 정신이 드니 여기에 있었다. 내가 사라져서 소동이 났느냐?”
“아…….”
“베르타는 어디 있느냐?”
이에샤는 입다물었다. 이실리아의 머리꼭지만 내려다보았다. 라제카는 말비다를 성으로 불렀다. 어머니뻘이니 당연하겠지만, 이실리아 쪽이 시녀장과 친밀해 보였다. 퍽 믿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베르타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납치되려는 이실리아를 지키고 제가 끌려갔을 만큼.
황후의 물음에 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마마. 세네기아 후작 부인은 죽었습니다.”
이실리아가 이에샤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거짓말이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구석구석 살폈다. 이에샤는 어색하게 섰다. 지인의 부고를 받으면 무슨 기분이 들까. 상상할 수 없었다. 이에샤가 겪어 본 죽음이라고는 모친상뿐이었기에. 기실 에이릴리가 떠났을 때 제 마음이 어땠는지도 어렴풋했다.
이실리아의 고개가 숙어졌다. 이에샤로서는 표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구나.”
“괜찮으십니까?”
“막사에서 죽었느냐?”
“숲에서 발견했습니다.”
“시신은 수습해 주었고?”
“겨, 경황이 없어서 미처.”
이에샤는 속으로 옐윈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그놈이 재까닥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면 제가 황공해질 일도 없었을 텐데. 이실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야겠구나. 하지만 가마가 와야 한다. 나는 도저히 일어설 수조차 없으니.”
“예. 기다리시는 동안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죽은 사람이 생겼더라도, 황후가 무사했다. 이실리아만 캠프로 데리고 가면 되었다. 나머지는 제국 기사와 황실 수사관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이에샤는 이실리아의 곁에 서려고 했다.
검은색 롱소드가 호선을 그렸다. 쇳소리가 터졌다. 쳐 낸 단검이 흙바닥에 처박혔다. 검을 들어 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단검이 날아든 쪽에서 호리호리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이게 누구야.”
모르는 언어였다. 하지만 이에샤는 사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브론의 떨거지가 왜 이런 곳에 있지?”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의 컨셉은 '세상만사 속이 터진다'입니다...
캐릭터의 죽음이 헛되이 지나가지 않도록...전개에 신경 많이 기울이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