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51화 (51/164)

00051 6. 폐허에 틔운 싹 =========================

“이래서 백화 기사한테 일을 전부 맡기면 안 된다고 했잖소! 멘델린 남작!”

엘테르트는 얼굴 근육을 다잡았다. 이맛살이 죄어들려고 했다. 길길이 뛰는 남자는 홀랜드 후작으로, 이실리아의 외척이었다. 촌수는 멀었지만 이실리아의 어머니와 막역했다. 그동안 황후를 등에 업고 재산을 불려 왔다. 이실리아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델피르 황가의 맹우인 멘델린을 깎아내리겠다는 속셈도 있었다.

“앨저 경에게만 일임하지 않았습니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백화 기사단장과 근위 기사 여덟은 같은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가장 가까이서 경호를 맡았던 게 여기사 아닌가!”

“앨저 경이 한순간도 마마의 막사 앞을 떠난 적 없음은 저하께서 보증하셨습니다.”

홀랜드는 이에샤를 물고 늘어졌다. 엘테르트가 여기사 따위에게 일을 맡겨, 그르쳤다는 모양새로 만들어야 했다. 멘델린의 명예도 떨어뜨리고 사건도 축소시킬 수 있었다. 백화 기사는 못하면 물어뜯기고 잘해도 운으로 받아들여졌다. 딱 알맞은 구실이었다.

이에샤는 이를 악물었다. 홀랜드와 근위 기사들의 눈총이 따가웠다. 제가 이실리아와 베르타를 놓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란델의 수다에 정신이 팔렸다지만, 어떻게 사람이 사라지는 줄 몰랐단 말인가? 이에샤의 감각은 날카로웠다. 움직이기도 힘들어하는 이실리아가 빠져나가는데 모를 턱이 없었다. 막사 뒷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였다. 흙이 무너지는 순간 눈치챘어야 했다. 이상했다.

엘테르트도 위화감을 느꼈을 터였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저력을 알았다. 떨어진 사람의 기척을 잡아내는 모습도 보았다. 엘테르트의 통찰력이라면 이에샤가 한눈판 탓이 아니라고 꿰뚫었을 것이다. 이에샤는 ‘또 이 사람이 감싸 주네.’ 하고 떠올렸다.

“멘델린 경.”

“죄인 주제에 어딜 끼어드느냐!”

“죄송합니다, 홀랜드 후작. 하지만 황후 마마를 찾는 일이 급하지 않습니까?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헛소리! 책임을 덜어 보려고 혓바닥을 놀리는 것이렷다. 당장 황궁의 문초실로 끌고 가지 않은 걸 천운으로 여겨라!”

초조했다. 황후가 사라지지 않았는가. 납치일지도 몰랐다. 황궁에서 벌어졌다면 모든 관료와 기사단장이 소집되었을 일이었다. 하나 비벨라 숲에는 인력이 적었다. 엘테르트와 권한을 나누어 가진 홀랜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넓은 숲이어도 브링이 도움되리라. 사냥 대회 참가자들을 불러들여야 했다. 다른 사람을 한곳에 모아 놓고 돌아다니다 보면, 이실리아와 베르타의 기척이 걸릴지도 몰랐다.

뜻을 전하려면 자신이 브링어라는 사실도 밝혀야 했다. 이에샤는 다짐을 굳혔다. 열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여자 브링어. 세상은 가벼운 흥미로 무거운 관심을 보내, 일상을 뒤흔들 터였다. 도리 없었다. 이에샤는 백화 기사였다. 이실리아와 베르타를 지켜야 했다.

‘세비, 미안.’

셈브리온과의 잔잔한 나날은 아까웠다. 무엇하고도 바꾸기 싫었다. 하지만 의무가 소중성 위로 올라갈 때도 있는 법이었다.

말문을 떼려는 참이었다. 엘테르트가 팔을 들었다. 이에샤를 가로막았다.

“앨저 경의 능력은 낮게 나는 독수리로서 내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결코 실수하지 않습니다.”

“메, 멘델린의 이름을 걸다니! 이 여자는 이미 실수하지 않았소?!”

“일반적인 이탈이나 납치라면 앨저 경이 못 알아차렸을 리 없다는 뜻입니다. 일반적, 이라면.”

이에샤도 같이 생각했다. 황후의 막사가 허술하게 지은 건조물이라고 해도, 침입과 탈출이 쉬울 리 없었다. 설마설마하며 물어보았다.

“마법의 원칙이라는 게 이런 일에는 적용되지 않나요?”

“사람을 납치하는 게 어찌 이로운 기술이겠습니까. 하지만 델페레타의 국모를 노릴 만한 범죄자가 양지에서 활동하는 마법사일 리 없습니다. 원칙이라고 해도 학계에서 통하는 구두 약속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마법학계에서 매장당해도 괜찮다면 원칙―인간에게 이로운 기술로써만 마법을 사용하라―을 어기는 데에도 주저 없을 법했다.

이에샤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아까 하녀가 황자 저하께서 앉으실 의자를 가지러 막사 뒤로 돌아갔어요. 벽에 그런 구멍이 뚫렸는데 저한테 말도 안 했을 리 없죠.”

“그랬습니까! 시간도 기억합니까?”

“저하께서 오신 지 얼마 안 되셨을 때니까, 세네기아 부인이 들어가고 5분이 넘지 않았을 즈음이에요. 틀림없어요.”

“일은 15분 남짓한 시간에 처리되었다는 뜻……. 마법이 확실합니다. 구멍은 그곳으로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눈가림일 겁니다."

벽을 부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잔해도 적었다. 독이나 열로 녹인 모양이었다.

“앨저 경이 곧바로 알아차려서 부자연스러움이 두드러진 거지, 늦었다면 속아 넘어갈 뻔했습니다.”

공간 이동 마법은 까다로웠다. 무생물보다 생물을 옮기기가 어려웠고, 고등 생물일수록 품이 들었다. 사람 둘을 데리고 멀리 가지는 못했으리라.

엘테르트는 행동이 빨랐다. 근위 기사 두 명을 불렀다. 기사와 대화하자니 껄끄러웠으나, 투정할 때가 아니었다. 빠르게 늘어놓았다.

“말을 타고 가까운 역참으로 가서 에브라힐에 파발을 띄워라. 마법부에 황후 마마를 대상으로 마법 범죄가 일어났음을 알리도록. 그대는 대회 관리소에서 기다리는 황실 마법사들에게 상황을 설명해라. 마력 역추적이나 황후 마마의 위치 추적이 가능한지 물어보고, 한 명을 이곳으로 오라 하라. 나머지 마법사는 흩어진 참가자들에게 귀환 명령을 보내라 이르면 된다.”

“예, 멘델린 경!”

기사들이 말을 매어 둔 곳으로 달려갔다. 엘테르트는 홀랜드를 돌아보았다. 볼일이 남았다. 마법으로 이실리아를 쫓기보다 빠른 방법을 쓰려면, 이 고집불통 늙다리를 구워삶아야만 했다.

이에샤를 곁눈질했다. 이에샤는 인상을 구긴 채였다. 안쓰러운 마음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여는 행사마다 번거로운 사건에 휘말리는지.

“앨저 경은 숲에서의 추적술을 익힌 사랍입니다. 선대 앨저 백작이 사냥을 곧잘 했다는 건 알겠지요? 19년 전 사냥 대회에서도 멧돼지를 두 마리나 잡은 실력자였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앨저 백작도 처음 들었다. 외할아버지가 사냥을 즐겼을 줄이야. 19년 전이라면 엘테르트도 두 살배기였을 때였다. 모든 영춘 사냥 대회의 기록을 외우기라도 한 걸까. 엘테르트라면 가능성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멘델린 남작.”

“앨저 경에게도 수색을 맡기겠습니다. 이게 단순히 몸값을 노린 납치가 아니라면 황후 시해로 이어질 수도 있는 비상 사태예요. 홀랜드 공도 지엽적인 책임 전가는 그쯤 하시길.”

“뭐라고!”

“측근 경호를 맡은 앨저 경. 방어진을 이룬 근위 기사. 황후 마마의 시중꾼으로 따라온 모든 하인과 하녀. 시녀장 세네기아 부인. 마지막으로 이 대회의 책임자인 나와 홀랜드 공! 모두가 책임을 면치 못할 일입니다. 당신이…….”

엘테르트가 말을 쉬었다. 숨을 들이마셨다. 홀랜드를 노려보았다. 지금 상황이 막막할 뿐 아니라, 짜증까지 났다. 이에샤가 잘못을 뒤집어쓸 뻔한 흐름이 마뜩잖았다.

이에샤는 여자 기사라는 까닭으로 여자인 황후의 곁을 지켰을 따름이었다. 자리에 부적절하지 않았다. 능력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누구라고 황후가 납치당할 줄 알았겠는가? 이에샤에게만 죗값을 물려서는 안 되었다. 엘테르트는 한 사람을 희생양 삼아 얻는 안정이 싫었다.

“진정 황후 마마의 무사를 바란다면 냉정하게 따져 보시지요. 이 일이 앨저 경과 그녀를 뽑은 나, 두 사람을 밀어냄으로써 끝날 만한 사안인지.”

“큭.”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지금은 앨저 경을 가만두십시오.”

쌀쌀히 쏘아붙였다. 이에샤 쪽으로 돌아섰다. 이에샤는 복잡한 눈길로 엘테르트를 보았다. 지친 낯이 걱정스러웠다. 엘테르트가 어렴풋이 웃었다. 무거운 입꼬리를 추어올리는 양 힘겨운 미소였다.

“앨저 경. 내 명예를 걸고, 한 번 일을 그르친 당신에게 다시금 황후 마마의 안위를 맡기겠습니다.”

“멘델린 경.”

“만회해 보이십시오. 나도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며 기다리겠습니다.”

이에샤는 세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엘테르트는 넘칠 만큼 뒷받침해 주었다. 보답해야 했다. 숲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수 따위, 배운 적도 없었다. 이에샤는 외할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에샤의 몸속에는 근위 기사단장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브링이 쌓였다.

“제가 꼭 마마와 세네기아 부인을 모시고 오겠어요.”

다짐의 말을 전했다. 엘테르트가 “가십시오.” 하고 말했을 때였다.

“잠깐!”

누군가의 외침이 끼어들었다. 이에샤는 옐윈을 쳐다보았다. 일각을 다투는 마당이었다. 또 무슨 일인가? 신경질이 났다. 옐윈이 콧김을 씩씩거렸다. 이에샤와 엘테르트에게로 다가왔다.

“멘델린 경! 앨저 경 혼자 보냈다가 책임이 두려워 도망치면 어떡합니까? 앨저 경을 어찌 믿으십니까?”

“리토스 경.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겁쟁이처럼 도망칠 거라고 말하는 건가?”

“여인네가 아무리 사내처럼 검을 잡고 머리채를 자른다고 해도, 천성이 소심하고 무르기 마련입니다. 저는 앨저 경을 못 믿겠습니다.”

이에샤는 화를 억눌렀다.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었다. 넉 달간 이에샤가 울음이라도 터뜨리지 않을까, 들쑤셔 온 남자가 수두룩했다. 그러나 지금 같은 비상시에까지 성별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혐오감이 치밀었다.

엘테르트도 황당해졌다. 이에샤와 결투까지 벌여 보았으면서 ‘천성’ 운운하다니.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설령 여자가 나긋한 성정을 타고난다 하더라도, 제국 기사들처럼 폭력적인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리토스 경. 경과 입씨름할 시간이 없다. 앨저 경의 능력은 내가 일을 맡긴 시점에서 멘델린의 인정을 받은 셈이다. 경도 자리로 돌아가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멘델린 소공작께서는 왜 앨저 경을 그리도 감싸시는 겁니까?”

“그대……!”

어처구니없었다. 엘테르트와 이에샤의 사이를 색정적으로 몰아가려는 심산이 뻔했다. 어지간히도 이에샤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욕지기가 솟았다. 입지도 아슬아슬한 자를 찍어 눌러,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들려는 악의에.

노기를 내뿜으려던 차였다. 이에샤가 “그만!” 하고 말렸다.

“이렇게 해요, 멘델린 경.”

“앨저 경?”

“리토스 경을 달고 가겠어요. 저를 감시하라고 시키세요.”

옐윈이 눈을 치켜떴다. 이에샤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한숨이 흘러넘쳤다. 속이 터지기는 엘테르트와 마찬가지였지만, 한시가 급했다. 옐윈을 손봐 줄 기회는 많아도 이실리아에게 탈이 생긴다면 돌이킬 수 없었다.

“따라와, 리토스 경. 숲 깊숙이로 들어간다.”

“잠깐만요, 앨저 경!”

“죽을 힘을 다해 뛰어야 할걸!”

소리친 다음 땅을 박찼다. 옐윈은 얼떨결에 달리기 시작했다. 이에샤의 뒷모습이 멀어져 갔다. 터무니없이 빨랐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