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50화 (50/164)

00050 6. 폐허에 틔운 싹 =========================

라제카와는 판달랐다. 생김새는 닮았지만, 인상이 수더분했다. 눈망울이 수줍게 굴렀다. 이에샤는 친절한 웃음을 머금어 보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지금은 황후 마마께서 바쁘시니 이따 저하가 왔다 가셨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나는 그냥.”

란델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쑥스러웠다. 이에샤는 바쁘다고 둘러댔으나, 란델도 모르지 않았다. 이실리아가 신경질을 부린다는 걸. 그런데도 만나기를 바랐다. 라제카가 “어마마마를 성가시게 하면 안 돼.” 하고 말려도 보고 싶었다.

라제카는 입버릇처럼 외었다. 어마마마는 우리를 보면 더 아프시니까 찾아가지 말자. 란델은 따르지 않았다. 싫어서가 아니라, 참지 못했다. 유모는 아랫사람이었다. 생모를 대신할 수 없었다. 어린 황자는 어머니가 그리웠다.

“어마마마께 문안을 올리고 싶었을 뿐이야. 지난달 중순 뒤로 못 뵈었거든. 저기, 많이 안 좋으셔?”

“사고로 찻잔이 깨졌습니다. 막사로 돌아가 계시면 정리가 끝나고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면 안 될까? 경한테 방해되지 않도록 얌전히 있을게.”

이에샤는 당황했다. 라제카와 비슷한 얼굴이 칭얼대니 묘했다. 란델이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렸다. 간절한 낯빛을 지었다. 말없는 보챔에 속이 뜨끔거렸다. 이에샤는 고개를 세로로 젓고 말았다.

“의자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이대로도 괜찮은데.”

“황후 마마께서 언제 여유가 생기실지 모릅니다. 마냥 저하를 서 계시게 했다간 제가 불경하다고 벌받습니다.”

하녀를 불러들였다. 노는 의자 하나 있을까? 묻자 하녀는 막사 뒤편으로 돌아갔다. 의자 한 개를 끌고 나타났다. 바깥 풍경과 겉도는 모양새였다. 팔걸이에, 벨벳 등받이까지 달렸다. 황후의 예비품다웠다.

란델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양손을 엉덩이 옆에 두었다. 다리를 엇갈아 가며 까딱거렸다. 천진스러웠다. 이에샤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라제카만은 귀여워했다. 닮은 꼴인 란델에게도 호감이 갔다.

“앨저 경.”

란델이 말을 걸어왔다. 이에샤는 뒷짐지고 선 채 란델을 곁눈질했다.

“말씀하십시오.”

“경은 무슨 취미를 즐겨?”

“예?”

뜻밖의 물음을 받았다. 이에샤의 머릿속에 루시온과 라제카가 그려졌다. 두 사람은 우스개를 던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영양가 있는 화제를 꺼냈다. 백화 기사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든가 요즈음 사교계의 분위기 같은. 잡담은 드물었다. 이에샤는 고민에 잠겼다.

“검술 수련 말고는 딱히 없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책을 좋아해.”

“열심히 공부하시는군요.”

“으응, 공부는 잘 못해. 소설책이 좋아. 모험 소설도 좋아하고 연애 소설도 읽어. 뒤엣건 들키면 우리 시종장이 질색하긴 하는데. 앨저 경은 좋아하는 얘기 있어? 난 말이야, 누님이 읽는 책들은 어려워서 모르겠어.”

란델의 이야기는 두서없었다. 대답을 하려도 화두가 핑글 돌아 버렸다. 본인은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기실 어린아이의 언변이란 란델과 같았으나, 이에샤가 아는 아이라고는 라제카뿐이었다. 란델 쪽이 낯설었다.

“어마마마께서도 희곡을 좋아하신대. 나도 연극은 지루하지만 희곡집 읽는 건 재밌어.”

“취향이 비슷하신가 보네요. 하기야 저하께서는 마마의 아드님이시니까요.”

“앨저 경을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일할 때 찾아가면 실례니까 참았어. 난 검술에는 별로 재능이 없대.”

‘쫓아갈 수가 없어.’

막막했다. 대화의 흐름이 잡히지 않았다. 란델은 이에샤의 속도 모르고 방긋했다. 이에샤도 어설피 웃어 보였다.

“루시온 형님도 경에 대해 많이 얘기하셔. 형님도 누님도 말이야, 앨저 경을 많이 믿고 좋아하는 거 같아. 나도 앨저 경이 친근해.”

“가, 감사합니다.”

“형님이랑 누님은 옳은 일이랑 옳을 말만 하시거든. 나는 형님처럼 민첩하지도 않고 라제카 누님처럼 똑똑하지도 않은데, 평생 책이나 읽고 살 수 있으면 좋아.”

아무래도 란델은 수다쟁이 같았다. 맞장구만 쳐 주어도 신나서 떠들었다. 이에샤는 시시한 말들을 한 귀로 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상대는 황자였다.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되었다.

“앨저 경.”

“예, 저하.”

“어마마마는 언제쯤 건강해지실까?”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기 어려웠다. 공주와 황자가 태어나고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낫지 않은 몸이 괜찮아질 턱이 없었다.

지독한 난산이었다고 들었다. 머리부터 나온 라제카도 오래 걸렸는데 란델은 거꾸로 들어서기까지 했다고. 해산하고도 피가 멎지 않았다 하였다. 황실 마법사가 총동원되어, 포션을 쏟아붓고야 이실리아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베르타는 그날 산실을 본 사람이라면 이실리아를 동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실리아는 뼈와 근육과 관절 어디 하나 성하지 못했다. 수시로 자세를 바꾸어 줘야만 했는데, 일어났다 앉을 기운조차 모자랐다. 어찌 건강해질 수 있겠는가?

“글쎄요. 잘 치료받으신다면 곧…….”

“형님은 옛날에 어마마마랑 피크닉도 가 보셨대. 나도 그러고 싶어.”

“황자 저하.”

이에샤는 망설였다. 떠오른 질문이 건방지다 싶었으므로. 란델이 이실리아를 만나서도 지금처럼 수다를 늘어놓는지, 궁금증이 솟았다. 저는 일개 기사이나 란델은 아니었다. 친자식인데다 황자였다. 말허리를 자르기 힘들 터였다. 이실리아는 란델의 이야기를 참고 듣는 걸까?

“앨저 경? 왜 그래?”

“아니요. 아닙니다. 저하께서는 황후 마마를 참 좋아하시는군요.”

“어머님인걸. 당연하지. 어마마마도 사실은 나랑 누님을 좋아하셔.”

이에샤도 똑같이 생각했다. 어머니라면 자식을 아껴야 한다고. 하나 이실리아에게 자식은, 저를 괴로움으로 밀어넣은 불씨였다. 라제카의 위문품도 귀찮아했다. 직접적으로 정을 구하는 아들이 어여쁠 리 없었다. 란델과의 대화는 이에샤에게도 지리멸렬했다. 이실리아라면 고역으로 느낄 성싶었다.

란델은 귀여웠다. 상냥하고 싹싹했다. 나름대로 속도 깊었다. 어린아이란 손이 가게 마련이었다. 란델 정도면 돌보기 쉬운 축에 들리라. 그렇더라도 이실리아에게는 버거울 법했다.

‘어라.’

이에샤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이실리아는 이상했다. 동시에, 사랑하더라도 이상했다. 관념이 부딪쳤다.

란델이 말머리를 돌렸다.

“앨저 경. 조금 전부터 막사가 조용한데. 이제 들어가도 될까?”

“안 됩니다.”

란델의 조바심에 답한 사람은 이에샤가 아니었다. 실바람이 불어왔다. 엷은 금발이 나부꼈다. 엘테르트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황후의 막사로 다가왔다. 란델이 “에르디 형님!” 하고 외쳤다.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보는 눈이 있을 때는 그리 부르시면 안 된댔지요, 저하. 막사에 계시지 않아서 여기 오셨을 줄 알았습니다. 당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냥 대회 날에는 황후 마마가 평소보다 더 편찮아지신다고요.”

“미, 미안해요. 난 그냥, 어마마마가 가까이 계신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뵙고 싶어서.”

“저하의 마음은 압니다. 하지만 이리 나와 계시면 저하까지 감기에 드실지도 모릅니다. 봄이라지만 아직 쌀쌀합니다.”

“미안해요…….”

엘테르트는 한숨지었다. 라제카가 애를 끓였다. 란델이 어마마마를 찾아간 듯하다고. 때마침 엘테르트도 이실리아에게 볼일이 있었다. 라제카에게 제가 가 보겠노라 말하고 온 참이었다.

란델은 라제카를 잘 따랐다. 제가 뜻도 모르는 물음에 척척 답하는 누이를 존경했다. 시샘이라고는 없었다. 이번에도 라제카가 부른다는 소리에 고분고분히 물러났다. 얘기 상대가 돼 줘서 고마웠어. 이에샤에게 한쪽 팔을 펼치며 인사했다―우아하다기보다 귀여웠다. 공주의 막사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돌아보았다.

“멘델린 경은 어째 불쑥불쑥 끼어들 때가 많은 거 같아요.”

“자주 그럽니다. 온 황궁을 헤집으며 일하다 보니. 시간이 촉박해서 여유롭게 대화하기도 어렵고요. 끼어드는 게 버릇되었습니다.”

“황후 마마를 뵈어야 하죠? 많이 흥분하신 모양이던데.”

이실리아는 차분한 성정이었으나 이맘때에는 예민해졌다. 잘 흥분하고 울고 짜증 부렸다. 엘테르트는 봄 전에 이에샤가 이실리아와 만나기를 바랐다.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으면 했다. 안타깝게도 지난겨울 이실리아는 유달리 아팠다. 백화 기사단장의 인사를 받기도 전에 지옥 같은 봄이 와 버렸다.

“벌써 사슴을 잡아온 이가 있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흰 꽃을 하사하셔야 합니다.”

“꼭 지금 나오셔야 합니까?”

“예. 황태자비도 없으니 별수 없습니다.”

황태자비라면 황후의 대행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루시온은 혼인을 차일피일했다. 이실리아는 첫아이인 루시온에게 다정했으나, 재작년 즈음부터 싸늘해졌다. 루시온이 비를 맞아들이지 않자 원망이 쌓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한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냥 대회가 무슨 의미인가 싶네요.”

“전통 대부분은 의외로 짧은 세월에 의미를 잃습니다. 지키는 일 자체에 의의를 둘 따름이죠.”

“……쉬운 말로 해 주겠어요?”

“돈이 됩니다.”

“아, 이해했습니다.”

엘테르트의 간추림은 명료했다. 영춘 사냥 대회에는 큰 헌금이 들어왔다. 평민들도 기분을 내, 작은 헌물이나마 바치고는 했다. 대사원에서는 황실이 행사를 도맡는 값으로 성물과 성수를 나누어 주었다. 고위 사제가 축복한 물건은 대규모 마법의 매개체가 될 수 있었다. 마법은 델페레타를 이롭게 할 터였고. 돌고 도는 이해관계였다.

엘테르트가 조심스럽게 막사 문을 두드렸다.

“황후 마마, 엘테르트가 왔습니다. 이제 나와 보셔야 합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려 보았지만 이실리아도, 베르타도 잠잠했다. 고요가 이어졌다.

이에샤는 불현듯이 깨달았다. 안쪽의 인기척이 사라진 채였다.

‘언제부터? 어떻게?’

허리띠에서 검을 빼 들었다. 엘테르트가 움찔 뒷걸음쳤다. 이에샤의 기세에, 막사를 둘러싼 근위 기사들도 술렁거렸다. 무슨 일입니까! 옐윈 리토스가 소리쳤다. 이에샤는 대꾸하지 않고 문을 잡아당겼다. 막사로 뛰어들었다.

황후와 시녀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란델은 뛰어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어린애입니다...

형과 누나를 질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범한 순둥이지만요...

라제카는 12월 31일 한밤에 태어난 14살, 란델은 1월 1일 새벽에 태어난 13살입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후원 쿠폰이 들어온 줄 몰랐네요. 이호수 님, wingit 님, wild chick 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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