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9 6. 폐허에 틔운 싹 =========================
이실리아는 곧게 좌석에 앉았다. 펼친 드레스 자락과 허벅지 위로 모은 손이 우아했다. 이오르도 자식들과 닮지 않았지만 이실리아는 더했다. 머리카락은 거리의 아낙처럼 흔한 갈색이었다. 왕방울 같은 눈은 장난기 아래 서슬을 감춘 루시온과도, 슬기로 반짝이는 라제카와도 달랐다. 초점이 흐렸다. 생명력이 뚝뚝 떨어지는 어린잎 빛깔을 띠고서도 썩은 나무에 낀 이끼와 비슷이 보였다. 푸르죽죽한 살갗은 연지로도 가릴 수 없었다.
이에샤는 이실리아에게 말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심사가 꼬인 것이 분명했으므로. 비벨라 숲에 도착할 때까지 숨죽여야겠다 싶었다. 하나 말할 수밖에 없었다.
“황후 마마. 입술이, 상처 나십니다.”
이실리아는 이에샤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목소리는 닿은 모양이었다. 앙다물었던 이를 풀었다. 입술이 부어올랐다. 휴우우.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에샤는 움찔했다. 갑갑궁금했다. 속을 읽을 수 없는 황족과 단둘이 있자니 당장에라도 문초실로 끌려갈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왜 안 들어온담.’
“……파…….”
“예? 마마, 방금 뭔가 말씀하셨습니까?”
손가락만 꿈지럭대던 참이었다. 이실리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되물었으나 묵묵했다.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에샤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다. 이에샤는 눈을 끔뻑였다. 이실리아는 듣지 못했으리라 믿는 눈치였지만, 이에샤의 청각은 날카로웠다. 멀찌감치 떨어진 꼬마의 코 훌쩍이는 소리도 잡아낼 만큼.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내 혼잣말을 들었느냐?”
“아, 그게, 마차 안이 조용하다 보니 들렸습니다. 아프다고 말씀하셨지요.”
이실리아가 또다시 한숨을 지었다. 이에샤에게 상태를 들키자, 얼굴에 피로가 차올랐다. 평정을 꾸미던 성싶었다. 공릉으로 짠 장갑이 오그라졌다. 주먹을 그러쥔 탓이었다.
“아프다고 말이라도 하면 아픔이 가실까 해, 이따금 소리를 낸다. 마음껏 아프다 말해서도 안 되는 처지이니 어쩌겠느냐. 너도 못 들은 거로 해 다오.”
“존체가 안 좋으시다면 출발하기 전에 의사에게 보이시는 편이,”
“나는 항상 아프다. 해에 삼백오십 일을 의사와 만나니 열닷새는 아프지 않은 체해야만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이실리아의 목소리는 후들거렸다. 아픔을 참는다기보다, 화를 참는 듯했다.
“하오나 마마.”
“말이 많구나.”
“죄, 죄송합니다.”
이에샤는 속으로 엘테르트를 헐뜯었다. 온화하신 황후 마마는 개뿔! 이실리아는 신경질적이었다. 이에샤가 무어라 하기만 해도 눈부터 홉떴다. 환자가 으레 그러하듯이 이실리아도 괴로움에 절었다. 주변을 돌볼 여력이 없어 보였다. 이실리아의 잘못은 아니었으나,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해야 하는 아랫것으로서 곤혹스러웠다.
구원자가 나타났다. 마차 문이 열렸다. 야유회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하녀의 도움으로 올라탔다. 겨우살이궁의 시녀장이었다. 시녀가 따라붙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시녀장이 별궁을 비울 줄이야. 베르타 세네기아 후작 부인은 이에샤 옆에 앉았다. 이실리아가 양미간을 찡그렸다.
“굼뜨구나. 내 가만히 앉아만 있는 데에도 힘이 들거늘 어찌 꾸물거리느냐?”
“벌해 주십시오, 마마. 서향궁의 벨제아가 찾아와 지체되었습니다.”
“바르벨로샤가 전할 말이라도 있다더냐.”
“공주님께서 이걸.”
베르타는 왕골로 엮은 바구니를 들었다. 뚜껑을 열었다. 안쪽에 둥글넙데데한 그릇이 놓였다. 물이 들어찼고, 주먹보다 큰 꽃송이가 떠다녔다―이에샤는 이름 모르는 꽃이었다. 마차가 흔들렸다. 덜커덩덜커덩 나아가기 시작했다. 꽃 그릇에 마법을 건 모양이었다. 물이 넘치지 않고 찰랑이기만 했다. 이에샤는 그것이 라제카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위문품임을 알아차렸다. 갸륵한 마음씨였다.
“서향궁에서도 채비를 마치고 지금 출발한다고 합니다.”
“바르벨로샤가…….”
이실리아는 가라앉은 눈길로 바구니를 건너보았다. 낯에서 감동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황후 마마.”
“앨저 경, 조용히 해 다오. 머리가 아프다.”
이에샤는 깨달았다. 이실리아 황후는 공주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쌍둥이를 낳으며 건강을 해쳤다고 들었다. 몸에 괴로움을 안겨 준 딸과 아들이 미운 걸까? 어수선한 기분이 들었다. 이실리아는 변함없이 곧은 자세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암발라 산은 델페레타 중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중턱에 해신교 대사원이 자리했다. 꼭대기에는 원반형 제단이 놓였다. 기슭을 숲이 에워쌌는데, 해신과 달신이 어울리는 곳이라 하였다. 숲이란 햇빛을 받으며 그늘을 키웠다. 해달신이 하나되기에 알맞았다. 그중에서도 비벨라 숲에는 성수의 샘이 솟았다. 기실 암발라가 아닌 비벨라의 뜻이 깊어, 암발라 산속에 대사원이 세워진 것이었다.
황후의 마차가 숲으로 접어들었다. 다그닥다그닥. 말 여덟 필이 걸어갔다. 사원에서 비벨라의 나무를 베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이실리아는 숲길을 걸을 수 없었다. 너른 길을 닦아야만 했다. 사냥 대회를 관장하는 사람이 힘들다는데 어쩌겠는가?
이실리아가 머무를 막사는 그럴싸했다. 나무 얼거리에 진흙을 발라 구웠다. 안벽을 직물로 꾸몄다. 바닥에는 널빤지를 깔았다. 넓이가 이에샤의 방보다도 넓었다. 출입문까지 달렸다. 황자와 공주의 막사도 비슷했다. 숲 속에 이만한 건조물을 세우다니! 황실 관리 여럿이 죽어 나갔을 법했다.
“황후 마마께서 매몰차 놀라셨지요.”
“아, 아뇨. 아니, 조금은요.”
“늘 저러시지는 않습니다. 평소에는 공주님과 황자 저하를 염려하는 분이십니다. 어린 아기씨들을 돌보지 못해 죄스럽다는 말씀도 자주 하셨죠.”
‘전혀 그러실 거 같지 않은데.’
이실리아는 막사에 틀어박혔다. 아무도 들이지 말도록 명했다. 이에샤와 베르타는 문전에 섰다. 베르타 세네기아는 젊은 귀부인이었다. 마흔 살이 되지 않았다. 이전 겨우살이궁의 시녀장이 노환으로 물러서고, 작년에 자리를 이어받았다.
“제가 신출내기 시녀일 때 이벨리오노 전하께서 태어나셨죠. 순산이었습니다. 진통도 짧았고 아기씨도 기름 바른 양 쑥 나왔으니까요. 그때까진 밝고, 호반 나들이를 좋아하는 분이셨습니다. 전하와 조카인 멘델린 경께 더없이 다정하셨죠.”
“어쩐지 멘델린 경이 황후 마마는 온화한 분이시다 말하더군요.”
“멘델린 경은 황궁에서 전하와 함께 자라셨습니다. 기른 정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도 마마께서는 멘델린 경께 너그러우십니다.”
이에샤는 고개를 주억였다. 엘테르트는 이실리아의 조카―가족이었다. 저는 오늘 만난 기사에 지나지 않으니, 쌀쌀맞을 만도 했다. 그래도 억울했다. 상냥한 황후의 화를 산 줄 알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가?
“라제카 공주님은 황후 마마께 자주 선물을 보내시나요?”
“……마마는 세 분 황손 가운데 공주님께 가장 정이 없으십니다.”
“예?”
생뚱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어리둥절한 소리를 냈다. 베르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치게 총명하여 당신 배로 낳은 자식 같지가 않으시다고. 그러다 보니 공주님께서도 마마를 찾아 뵙지는 않고, 위문품만 보내곤 하시지요.”
“그럴 수가.”
“그렇다고 박대하시는 건 아닙니다. 이따금 겨우살이궁에 찾아오시면 손수 놓은 자수를 쥐이기도 하시고.”
부질없지 않나? 이에샤는 냉정히 생각했다. 어린아이란 정에 민감한 법이었다. 이에샤 또한 서너 살 무렵부터 아버지를 미워했다. 어머니는 연민했고. 라제카는 사춘기였다. 이실리아의 태도가 앙금으로 쌓이고도 남았을 터였다. 황가와 뭇 가정은 다르겠지만,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입에 올릴 때 라제카는 즐거워 보였다. 이실리아도 어머니로서 사랑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인데, 너무하시는 거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세네기아 부인께서는 안 그렇습니까?”
이에샤에게 ‘모성애’란 자연스러웠다. 오스터는 연인의 딸만 아꼈으나, 에이릴리는 끔찍한 남편과 닮은 딸조차 사랑했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이기 때문 아니겠는가. 부성애는 후천적이되 모성애는 본능으로 여겨졌다.
베르타는 빙그레 웃었다. 어린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백화 기사단은 갈 길이 멀군요.”
“네? 갑자기 무슨…….”
“경의 본분이 황후 마마와 공주님, 나아가 황궁 여인들의 수호자임을 잊지 마세요. 여인의 괴로움이란 남정네보다 섬세하고 복잡하답니다. 앨저 경은 그 모든 걸 이해해야만 하는 위치에 서 계시고요.”
베르타는 지혜로웠다. 황후의 으뜸 시녀는 공으로 맡은 자리가 아니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까다로운 잣대로 재어짐을 알았다. 이에샤가 그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도 꿰뚫어 보았다.
“제가 앨저 경한테 황후 마마의 이야기를 시시콜콜 전달한 까닭이 뭐겠습니까. 오늘이 지나고도 계속 마마의 경호를 맡을 분이니까지요.”
“백화 기사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되겠죠.”
“아시다시피 마마께서는 신경이 예민하십니다. 심사를 거스르지 않으려면 앨저 경은 보다 세심해질 필요가 있겠네요. 편찮으신 분께 의무랍시고 무언가를 다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에샤는 베르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뜻인가요? 물어보려던 차였다. ‘챙그랑’하고 물건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막사 안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베르타! 베르타!”
흠칫 놀랐다. 이에샤와 다르게 베르타는 침착했다. 이에샤가 막사로 뛰어들려고 하자, “앨저 경! 잠깐만요!” 하며 말렸다. 이에샤는 의아쩍은 눈빛을 띠었다.
“아귀힘이 빠져서 찻잔을 놓치신 겁니다. 흥분하셨을 테니 경은 밖에서 기다리세요.”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봄에는요.”
봄에는 국모의 행사가 많았다. 그래 보아야 두세 개였으나, 허약한 이실리아에게는 무거운 짐이었다. 베르타가 막사 문을 열었다. 드레스 자락을 쥐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실리아의 모습이 언뜻언뜻했다. 소파에 앉아 이마를 부여잡은 채였다. 바닥에 도자기 조각들이 널브러졌다.
황후 마마, 고정하세요. 베르타의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틀었던 몸을 바로 했다.
다가온 사람을 보았다. 조금 전부터 기척을 느꼈다. 보폭이 좁았으므로 어린아이일 줄은 알았다. 라제카 공주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라제카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바지로 갈아입힌 듯한 소년이었다. 소년의 눈길이 이에샤를 향했다. 이윽고 뒤쪽의 막사로 옮겨갔다. 이에샤는 느릿이 무릎을 굽혔다. 소년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아, 안녕……. 누님께 얘기 많이 들었어.”
란델 탈리오노가 뺨을 붉히며 인사해 왔다.
============================ 작품 후기 ============================
이걸로 황가 캐릭터들이 전부 등장했네요...
지난 편 코멘트로 걱정해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_ _) 엄살을 피우긴 했지만 아직은 할만합니다...완결까지 쭉쭉 달릴 거예요...
듀랑고 재밌습니다 듀랑고 합시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