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6. 폐허에 틔운 싹 =========================
“너 지지리도 못하니까 나가 놀아라.” 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에샤는 자존심이 셌다. 오기를 불러일으킬지도 몰랐다. 셈브리온은 평화로운 저녁 식사를 바랐다. 달걀 껍데기 씹히는 프라이가 아니라.
이에샤가 식칼을 받아 들었다. 꼴이 어정쩡했다. 초심자가 호박을 채 치려면, 도막을 만들어 써는 편이 쉬웠다. 셈브리온은 짐짓 설명했다.
“우선 호박 껍질을 종이처럼 얇게 저미는 거야. 그다음 펼쳐 놓고 탁탁탁탁! 쉽지?”
“호박을 어떻게 종이처럼 만들어? 나 놀려?”
“살살 돌려 가며 깎으면, 아, 그렇게 뭉텅뭉텅 말고! 아까운 식재료 버리잖아!”
이에샤는 호박의 심까지 칼날을 박아 넣었다. 우악스레 돌렸다. 열매살이 손가락 굵기로 잘렸다. 셈브리온이 칼과 호박을 빼앗아 갔다.
“돌리라며!”
“이-샤, ‘얇다’의 뜻을 몰라? 이건 껍질을 벗기는 게 아니라 조각을 내는 거잖아!”
“그럼 칼 말고 숟가락 줘!”
“지금 감자 껍질 벗겨?”
바란 대로 이에샤는 포기했다. “나 안 해!” 하고 내뱉었다. 부엌을 뛰쳐나갔다. 셈브리온은 쾌재를 불렀다. 기분을 망쳐서 미안했으나, 서투른 도움은 사절이었다. 이에샤는 부엌에 들어올 필요가 없었다. 스승이 거두고 먹이면 되지 않겠는가?
셈브리온은 여유 있게 음식을 만들었다. 달걀을 부쳤다. 채 친 호박·당근·양파를 볶아 토마토와 삶았다. 흐무러진 토마토를 으깨, 소금과 후추로 간했다. 달걀 프라이를 걷어 낸 프라이팬에 미트볼을 굴렸다. 냇내가 피어올랐다. 이에샤가 슬그머니 돌아왔다.
“토마토 수프?”
“만들기 쉽고 맛있어.”
“늘 이렇게 먹어?”
“네가 없으면 훨씬 간단히 먹지.”
이에샤의 퇴궐이 이르지 않았다면, 셈브리온은 감자나 쪄 먹었을 터였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내가 있다고 상이 푸짐해져?’ 하는 듯했다. 셈브리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요리의 귀찮음을 모르는 자야말로 행복한 사람이었다.
얄미워도 별수 없었다. 이에샤는 후작의 딸이었다. 손에 물을 묻게 하기 싫었다. 여느 귀족 영애 못지않게 바라지해 주고 싶었다. 피올라 거리의 집에서부터 글러 먹었지만, 가사만은 시키지 않을 셈이었다.
이에샤는 셈브리온을 위해서라면 물이 묻든, 피가 묻든 괜찮았다. 하지만 셈브리온은 이에샤가 평범하고 고운 아가씨였으면 했다. 여자가 싸울 줄 알아 봤자였다. 밥그릇을 지키려는 사내들에게 시달리기밖에 더하겠는가―힐가가 그러했듯이.
‘일곱 살 때 만나서 열 살부터 키운 걸 어쩌겠어.’
셈브리온에게 이에샤는 보기만 해도 애틋한 소녀였다. 스물다섯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더라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음식을 옮겼다. 식탁에 늘어놓았다.
이에샤가 숟가락으로 수프를 휘저으며 말했다.
“알디온에서 나오기 전엔 세비가 이렇게 살뜰한지 몰랐어.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 좋은 형이었을 거 같아.”
“백일도 되기 전에 죽은 앤데 그런 생각이 무슨 소용이야.”
“돌림병이었댔지? 벨체터는 제국보다 위생이 나빠?”
“위생뿐 아니라 모든 게 나빠. 부모도 돈이 없어서 야반도주했고, 여러모로 안 좋았어. 용병 노릇할 때 도시 연합에도 가 봤지만 거기도 벨체터랑 다르지 않아. 델페레타는 신이 가호하는 나라라니까.”
케케묵은 이야기였다. 이에샤가 어머니의 죽음에 덤덤하듯 셈브리온도 과거를 되새기지 않았다. 이에샤는 미트볼을 오물거렸다. 셈브리온이 부모에게 버림받은 일도 알았고, 용병 길드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어린 시절도 들어 보았다. 별 느낌은 없었다.
“당신이 제국에 와서 나는 득 봤지, 뭐.”
“이-샤가 아니었으면 벨체터로 다시 기어들어 갔을지도 몰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조국이니까.”
“내가 그렇게 예뻤어?”
장난스레 물어보았다. 셈브리온은 피식해 버렸다. 이처럼 시답잖은 대화는 오래간만이었다. 이에샤는 밤이 깊어서야 집에 오고는 했다. 인사만 나누고 잠에 들기 일쑤였다. 알디온에서 살 때는 온종일 함께했는데, 쓸쓸하던 차였다. 이러한 저녁도 나쁘지 않았다.
“그으래! 벨체터에서는 사내애나 계집애나 거지꼴이라고. 처음으로 드레스 곱게 차려입은 꼬마 아가씨를 보면 예뻐 죽을 수밖에 없지. 귀여움은 한때인데 완전히 속았어.”
“뭐야. 지금은 안 귀여워?”
“양심이 있냐.”
셈브리온은 자기 미트볼을 이에샤의 접시로 옮겨 주었다. 다섯 개씩 나누었으나, 이에샤는 벌써 먹어 치웠다. 십 대의 먹성은 무시무시했다. 셈브리온도 대식가에 들었지만, 이에샤를 먹이는 편이 흐뭇했다.
옛일이 떠올랐다. 셈브리온이 이에샤보다 어릴 적의 어느 날이.
「엄마는 이브론이 먹는 거 구경만 해도 좋더라.」
「당신이 왜 내 엄마야. 서방도 없는 주제에.」
「내가 널 사랑하고 키우는데 왜 엄마가 아니야? 아빠도 만들어 줄까, 우리 꼬맹이?」
세상사 재미있었다. 힐가에게 친자식도 아닌 애를 왜 키우냐고 핀잔하던 제가, 남이 맡긴 소녀를 사랑하게 될 줄이야. 셈브리온은 언제까지나 이에샤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벨체터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옛 동료보다 지금의 가족이 소중했다.
* * *
스란은 공주의 호위 역을 받아들였다. 갈라진다고 해도 황후와 공주의 천막은 멀지 않았다. 이에샤와 스란도 서로가 보일 만한 곳에 머무를 터였다. 미엘라는 석곡궁에 남기로 했다. 싸우지도 못하고, 귀족도 아닌데 쫓아가기는 무엇했다.
영춘 사냥 대회는 암발라 산의 기슭―비벨라 숲에서 벌어졌다. ‘신이 노니는 숲’ 비벨라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없었다. 황실과 대사원에서 가로막다가, 사냥 대회 날에만 열어 주었다. 덕분에 수풀과 짐승이 성했다. 재작년에는 곰이 잡히기도 했다.
엘테르트는 비벨라에 터를 닦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땅을 다지고, 캠프를 세우고, 물과 음식을 갖추었다. 귀족 누구나―16살이 되었다면―헌금을 내고 참가할 수 있는 행사였다. 사람이 몰렸다. 질서를 잡고 황족을 지키려면 준비할 것이 많았다. 반듯한 얼굴에 기미가 낄 지경이었다.
그나마 올해는 나았다. 영년 토너먼트가 취소되면서 여유가 생겼다. 지난해에는 과로로 쓰러졌다―엘로나가 울면서 아들을 포션으로 채운 목욕탕에 담갔었다.
델피르력 743년 4월 7일. 봄을 맞이하는 사냥 대회가 시작되었다. 이에샤는 이실리아 황후와 마차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코트의 주름을 폈다. 겨우살이궁으로 향했다.
겨우살이궁 앞에는 황후의 마차가 섰다. 크고 호화로웠다. 멘델린의 마차가 수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금으로 암사자가 웅크린 모습을 조각하고, 그 품에 진녹색 차체가 끼었다. 말 여덟 필이 매였다. 이에샤는 이러한 마차는 처음 보았다.
마지막으로 근육질의 군마들이 마차를 둘러쌌다. 이에샤의 인상이 구겨졌다.
“백화 기사단장께서는 여유가 있으시군요. 그리 슬렁슬렁 오시다니 말입니다.”
“명치의 멍이 다 빠진 모양이야, 리토스 경.”
“아녀자가 좀 툭탁거린다고 단련된 몸에 흠집이 나지는 않습니다. 하기야 앨저 경께서는 평생 남자 몸을 본 적이 없겠지만요.”
“……그 말대로야. 눈물 뽑으며 들것에 실려가는 남자 모습은 처음 보았어.”
근위 기사 옐윈 리토스가 이에샤를 노려보았다.
옐윈은 실력 있는 검사였다. 근위 기사단에서도 알아주었다. 그러나 괜찮다는 여자를 붙들고 길을 안내해 주겠노라, 치근덕대는 말종이었다. 이에샤는 옐윈을 말리려다가 장갑을 맞았다. 모두가 기대했다. 제국 기사 중에서도 최정예인 근위 기사가 건방진 계집에게 망신을 줄 터라고.
옐윈은 이에샤의 칼자루에 명치를 맞고 까무러쳤다. 그 일로 이에샤를 인정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많은 이가 운이나 속임수로 여겼으나.
제국 기사단에 ‘황후와 공주를 지키는 기사들은 백화 기사와 싸운 적이 없는 자로만 이루어 달라.’ 하고 요청했지만, 옐윈은 명성이 있었다. 사냥 대회가 돌아올 때마다 이실리아의 방어진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빼지 못한 모양이었다.
“존귀하신 여인 앞에서 쓸데없는 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다. 자리로 돌아가도록.”
“그러지요. 저는 충신으로서 말조차 타지 못하는 기사단장이 황후 마마의 마찻길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했을 뿐입니다.”
이에샤는 말을 탈 줄 몰랐다. 배우지를 못했다. 말은 유지비가 드는 동물이었다. 이에샤에게는 마구간은커녕 말구유조차 없었다. 승마에 젬병인 것은 당연했다. 말을 무서워해서도, 재능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실지로 이에샤는 몸을 가누는 일이라면 뭐든 잘했다.
“리토스 경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내 경호 위치는 멘델린 소공작께서 지정하셨다. 불만 있으면 공작가에 가서 따져.”
“그건 소공작께서 여자인 앨저 경을 배려하신 거겠지요!”
“그래? 그대는 편하게 마차 타고 황후 마마를 모시고 싶은가 본데, 남자 주제에 황후 마마와 한자리에 들겠다니. 불경 아니야?”
“내가 언제……!”
옐윈은 말을 삼켰다. 근위 기사라고 해도 저는 평기사였다. 기사단장에게 반말을 써서는 위험했다. 이에샤는 감봉권까지 지녔다. 한 달치 봉급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내가 혼자 마차로 이동하는 게 불만이라면 그대도 여자로 다시 태어나든가.”
“하! 앨저 경께서는 저를 모욕하시려는 겁니까?”
이에샤는 한숨을 쉬었다. 승마를 못한다고 ‘배려받는 여기사’ 취급당하는 처지가 짜증났다. 그만두기로 했다. 여자로 태어나라는 말이 모욕씩이나 된다는데, 무어라 더 하겠는가?
이에샤와 여덟 명의 근위 기사는 딱딱하게 섰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10분쯤 지났을까. 겨우살이궁의 문이 열렸다. 이에샤는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수그렸다. 기사들은 말고삐를 쥔 채 섰다. 이에샤는 델페레타에서 가장 높은 여인을 맞아들였다.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
‘왜 아무 말씀 안 하시지?’
이실리아는 이에샤의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이에샤는 조마조마해졌다. 실수라도 저질렀는가? 돌이켜보았다. 예법은 완벽했다. 급한 와중, 황제의 앞에서도 침착했던 저였다. 잘못했을 리가 없었다.
스르륵스르륵. 옷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스러웠다. 이실리아는 입다물고 이에샤의 옆을 지나쳐 갔다. 하인이 마차 문을 열었다. 치마폭에 숨은 하이힐이 받침대를 디뎠다.
이에샤도 몇 번 만나 본 황후의 시녀가 허리를 숙였다. “앨저 경.” 하고 불렀다.
“일어나시지요. 마차로 들어가서 마마와 마주보지 않는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화, 황후 마마께서 제게 뭔가 화나신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다만 예민하신 상태이니 진노를 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에샤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로 다가갔다. 옐윈의 히죽거리는 낯짝이 보였다. 속이 뒤집혔다. 사나운 걸음새로 받침대를 지르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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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별로 안 좋고 슬럼프가 온 거 같아서 어깨가 무겁습니다...그래도 힘 닿는 데까지 써야죠...연재가 습관이 됐는지 하루 쉬었다고 불안불안했네요...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