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6 6. 폐허에 틔운 싹 =========================
엘테르트의 말허리를 자르고 물어보았다. 엘테르트는 망설였다. “볼일이 없어서 안 왔습니다.” 하고 고하기 어려웠다. 이에샤는 퍽 반가워했다. 야멸찬 인상을 풍기는 눈매가 둥그레졌다. 환한 얼굴을 보니 대꾸가 나오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양피지들을 미엘라에게 건넸다. 슬그머니 이에샤의 시선을 피했다.
“바빴습니다. 사냥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보니.”
“사냥 대회? 방금도 영춘 사냥 대회 어쩌고 하셨죠.”
“봄을 맞아들이는 황실 행사입니다. 4월 중순마다 치르는데, 신년맞이 무도회나 토너먼트에는 못 미쳐도 제법 성대합니다. 한 해의 풍요를 빌자는 취지이니까요.”
미엘라는 익숙히 들었다. 엘테르트는 이에샤가 나오기 전에도 찾아왔었다. 사냥 대회와 관련한 서류가 늘어난다고 귀띔해 주었고, 두 번째로 온 것이었다. 이런 날이 있었다. 멘델린 소공작은 허드레꾼이 눈뜰 시간에 입궁해, 성문이 닫히고야 쪽문으로 퇴궐한다고 들었다. 미엘라는 엘테르트가 약물이라도 쓰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엘테르트는 멈칫했다. 이에샤의 목께를 바라보았다. 낯선 스카프가 매였다. 자주색 실크는 낡았고, 가장자리를 따라 박힌 진주가 촌스러웠다. 유행이 20년은 지나간 디자인이었다. 의아쩍었다.
“겨울도 끝물인데 감기에 들었습니까?”
“네? 감기?”
“목.”
엘테르트가 집게손가락으로 제 목을 가리켜 보였다. 이에샤는 “아하.” 하고 스카프를 매만졌다. 미심을 사리라고만 예상했는데, 감기로 봐 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엘테르트는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뭐, 비슷하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별로 좋지 않아서요.”
“돌아가신 앨저 영애의 물건인가 보군요.”
“가끔 멘델린 경이 모르는 게 있기는 한가 궁금해져요.”
실웃음이 새었다. 옷과 장신구를 꿰고 사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만했다. 모르는 이에샤가 별종이었다.
엘테르트가 소파에 앉았다. 다리를 꼬았다. 이제는 이에샤도 알아차렸다. 엘테르트가 반듯하게 앉는다면 씩씩한 상태이고, 삐딱이 앉으면 지쳤다는 뜻이었다.
“일이 많은가 봐요? 저는 경이 저랑 만나기 싫어서 발길을 끊은 줄 알았어요.”
“앨저 경.”
엘테르트의 표정이 비뚤어졌다. 난처했다. 이에샤는 저를 싫어하면서, 헷갈리게끔 말하고는 했다. 깜짝깜짝하는 건 둘째 치고 염문이 퍼질까 무서웠다. 이에샤의 평판은 우스개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주제도 모르고 멘델린을 넘보는 여기사’ 따위의 험담이라도 돌면 큰일이었다. 엘테르트는 소년 시절에 어느 귀족의 딸에게 선의를 베풀었다가, 그녀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기억했다.
“그렇게 저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면 안 됩니다.”
“기다리진 않았습니다만. 멘델린 경이 소식이 뜸하니까 궁금하고, 허전하기도 해서…….”
“그런 식으로 말해서도 안 됩니다.”
이에샤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급작스러운 꾸지람이었다. 돌이켜보아도 제 말에 이상한 점이라고는 없었다. 법도를 그르치지도 않았고, 시비하듯이 말한 것도 아니었다. 이에샤의 반가움이 싫어서일까? 거기까지 떠올리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저희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건 알지만 그렇게까지 물리칠 건 없잖아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한동안 같이 일하다 갈라섰는데 허전해하는 게 못할 반응인가요?”
“앨저 경. 그런 게 아닙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나도 경이 무탈히 지내는지 늘 염려했습니다.”
엘테르트는 ‘아차.’ 했다. 주의를 시키려다가, 덩달아 요상한 말을 뱉었다. 사냥 대회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이에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한테 그런 말씀 하시면 이상한 소문이 날 텐데요, 멘델린 경.”
“지금 조심성 없이 말하는 게 누군데 그런 소리를 합니까!”
엘테르트에게서 큰소리가 터졌다. 드문 일이었다. 이에샤도 울컥한 낯빛을 지었다. 영문 모를 핀잔을 늘어놓더니 왜 화는 낸단 말인가?
이에샤 속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너무 뜸하지 않느냐.” 등은 밀어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엘테르트의 “항상 당신을 걱정했다.”는 오해를 살 법했다. 엘테르트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생각이었으나, 실지로 이에샤 쪽이 평범한 안부에 가깝기는 했다.
문제는 신년맞이 무도회에서 비롯하였다. 그날 이에샤는 엘테르트의 손을 잡아끌고 정원으로 나갔다. 숱한 귀족이 그 꼴을 보았다.
“앨저 경, 내가 당신의 정절을 설명하고 다니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아십니까? 제발 조심해 주십시오. 나는 괜찮아도 앨저 경이 곤란해진단 말입니다.”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전 그냥 멘델린 경이 좀 지나치게 뜸하지 않나 했을 뿐이라고요!”
“당신이 무도회 날 무슨 사고를 쳤는지 생각하십시오!”
그제야 이에샤는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렌디드 자작 사건 때문에 잊어버렸었다. 이전에도 엘테르트는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다급하더라도 손을 잡고 끌어당기거나 하지 말라고. 이에샤는 일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사소하지 않은가 싶었지만, 귀족 사회에 까막눈인 저보다야 엘테르트가 옳을 터였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앨저 경은 내게 일말의 호의도 내비쳐선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지난주에도 나더러 백화 기사단 일에서 손을 떼면 싫다느니 했었죠. 그때 고쳐 주고 넘어갈 걸 그랬습니다.”
“……그럼,”
짜증스러웠다. 곧바로 지적했다면 자신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언질조차 주지 않고 문제삼다니, 제멋대로였다. 못마땅한 까닭은 또 있었다.
“그날 제가 말실수를 해서 일주일이나 얼굴을 안 비친 거였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정말로 바빴습니다. 백화 기사단에 제가 손댈 일이 없기도 했고.”
“올센 경하고는 만나셨잖아요?”
“올센 경을 내 사무실로 부르지 않았습니까. 겨우 업무 전달 가지고 직접 석곡궁에 방문할 짬은 없었습니다.”
미엘라는 안절부절못했다. 대귀족과 상관이 제 이름을 꺼내며 티격태격하자,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불똥이 튈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에샤는 입술을 옥깨물었다. 곰곰 따져 보아도 함께 일하던 사이에 못할 말을 하지는 않았다.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싫으니까 친한 척하지 말라고 내쳐지는 편이 나을 성싶었다.
“좋아요.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제 경솔한 태도로 폐를 끼쳐서 미안하게 됐어요, 멘델린 경.”
“내가 돌아가면 화를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이는 나를 위한 게 아니라 경을 위한 조치입니다.”
“……알았어요.”
“그럼, 본 용건으로 돌아갑시다.”
엘테르트는 한숨지었다. 가까스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에샤가 고개를 주억였다. 엘테르트는―미엘라에게 넘겨주지 않은―양피지 한 장을 책상에 펼쳤다. 이에샤가 읽을 수 있도록 돌려 주었다.
“만물의 어머니가 겨울을 어루만져 재우는 계절. 황실에서는 가물지도 침몰치도 않는 여름과 풍요로운 가을과 금번보다 따뜻한 겨울을 기도한다. 성을 다하여 하늘에 바칠 헌물과 백성에게 먹일 양식을 마련토록 하라?”
“풀어 말하자면 봄이 왔으니 여는 사냥 대회에 황후 마마께서 책임자로 참석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에샤는 ‘어떻게 하면 이게 그게 돼.’ 하고 생각했다. 궁중어란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황후 마마는 편찮으시잖아요? 전 아직도 인사를 못 올렸어요.”
“다른 철이라면 몰라도 영춘 행사만큼은 국모가 주관해야 합니다. 델페레타의 풍요는 한 해를 시작하는 계절, 황후의 기도가 좌우한다 하니까. 힐라웰로샤 마마께서 병석에 계신다고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아프신 분 모시고 사냥 대회라니 고약한 전통이네요.”
엘테르트도 동감했다. 이실리아 힐라웰로샤는 매해 봄마다 우울해했다. 돌봐야 할 일이 늘어나는 탓이었다. 10분만 걸어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몸이었다. 사냥 대회 참관은 고문과 같았다. 이오르 황제가 사흘을 하루로 줄이고, 절차도 간소화했으나 관료의 반발이 컸다. 이실리아를 쉬게 해 줄 수는 없었다.
“폐하와 전하를 제외한 모든 황족이 참석하는 행사입니다. 상징성만 따지면 신년 무도회를 넘어서죠.”
“두 분은 왜 빠지죠?”
“두 분 윗전께서는 암발라 산의 대사원에서 기도를 올리실 겁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앨저 경. 황실의 주요 행사는 서너 살이면 다 배울 텐데.”
“몰라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제가 세 살 때 동생이 태어나 버려서요.”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엘테르트는 머쓱해졌다. 오스터 알디온은 천박했다. 사업을 논의하다가도 두 딸을 비교하고, 노골적으로 이에샤를 깎아내리곤 했다. 이혼하기까지 전 부인과 싸운 시간이 6년. 그동안 이에샤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미안합니다. 앨저 경에게 불쾌감을 주려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얘기나 마저 하죠. 사냥 대회에서 저랑 스란이 황후 마마의 경호를 맡는 건가요?”
엘테르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탁상의 양피지를 돌돌 말았다. 품에 갈무리하며 답했다.
“한 명은 공주님께 붙으십시오. 브……, 실력이 뛰어난 앨저 경이 황후 마마 쪽으로 간다면 좋겠지만 편할 대로 나눠도 됩니다. 암무에서 폐하를 지켜 온 스란 경도 이런 일에는 능할 테니.”
듣는 귀가 있었다. ‘브링어’라는 낱말을 삼켰다. 미엘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서류장을 정리했다.
이에샤는 고민에 잠겼다. 엘테르트의 말대로 스란이 걸맞을지도 몰랐다. 황제의 경호도 맡아 본 이가 아닌가. 라제카 공주를 지키는 일도 보람될 듯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에샤는 공을 세우고 싶었다. ‘나라에서 가장 높은 여인 수행’이라는 큰 건을 놓치기는 아까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엘테르트가 말끝을 달았다. 이에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엘테르트를 쳐다보았다.
“마마께서 이용하시는 마차와 천막은 근위 기사 여덟이 방어진을 치고 지키게 됩니다. 앨저 경 혼자―물론 시녀와 하녀가 있겠지만, 기사로서는 말입니다. 혼자 마마의 곁에 붙어 있게 되니만큼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을 듯합니다.”
“후우! 그런 건 익숙해요. 황궁 사람 대부분이 제가 숨만 쉬어도 고깝게 보니까.”
“이번에는 온종일 코앞에서 기사들이 신경을 건드릴 겁니다.”
기사 놀이를 하는 계집애가 황후께 달라붙어 아양 떤다, 비웃음당할 미래가 훤했다. 이실리아 앞에서 참지 못하고 욕설하는 자신이 그려졌다. 오싹했다. 엘테르트도 같은 걱정을 하는 모양이었다. 낯빛이 무거웠다.
“참을 자신 없어요.”
“검을 뽑지 않고 말로만 싸운다면 제가 어떻게든 수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장갑을 던지면요?”
“기억하십시오, 앨저 경. 중요한 행사에서 기사단장과 평기사 사이에 물의가 생길 시 징계 강도는 기사단장 쪽이 강합니다.”
한숨이 이에샤의 입술을 비집었다. 또다시 미엘라에게 자리를 넘기고 싶어졌다. 미엘라가 딱하다는 눈길을 이에샤에게 보냈다. 백화 기사단으로 온 지 일주일, 그사이 이에샤는 제국 기사 세 사람을 의료원으로 보냈다―스란도 한 번 결투를 벌였다.
“저쪽 기사들은 진짜 왜 그러죠? 어린 여자가 뭐 좀 한다 싶으면 훼방 놓지를 못해서 안달이니. 그런 주제에 여자랑 놀고 싶어서 싫다는데도 붙잡고 찡얼찡얼!”
“그러게 말입니다.”
“이래서 힘만 믿는 놈들은 안 돼요. 사람이 말을 하면 듣지, 좀.”
이에샤가 투덜거렸다. 엘테르트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이에샤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힘 하나로 일을 처리해 나가던 1월로부터 눈부신 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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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곁을 허락한 사람에게 맹목적인 성격도 차차 고쳐 줘야지 생각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