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수는 검 한 자루-45화 (45/164)

00045 6. 폐허에 틔운 싹 =========================

엘테르트가 책을 덮었다. 루시온을 향하였다. 소파는 사선으로 놓였다. 틀에 굳힌 양 반듯하던 자세가 깨어졌다. 루시온은 드물게 당황한 낯빛을 띠었다. 엘테르트는 남보다 머리가 잘 돌아갈 뿐, 독심술을 익히지는 않았다. 제가 속을 읽히게끔 군 것도 아니었다. 한숨을 푹푹 쉬었을 따름이었다. 앨저의 ‘앨’자도 꺼낸 적 없었다.

“무슨 헛소리야? 에르디. 앨저랑 내가 뭐?”

“여기서는 앨저 경 이름이 지금 왜 나오냐고 물어야지.”

“…….”

엘테르트는 차분했다. 얄미울 정도였다. 루시온도 엘테르트의 머리 위로 잉크병을 기울이고 싶어졌다. 사촌 형제 사이에 싸늘한 분위기가 흘렀다.

멸망한 레오웰 왕국의 미술사가 담긴 책이 탁자에 놓였다. 엘테르트는 등받이 깊숙이 기대었다. 가슴께에서 손깍지를 꼈다. 표정을 보아 잠이 오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일요일인데도 황궁을 누비며 일했으니.

“너 월요일부터 이상했어. 앨저 경 만나겠다고 나갔다 온 뒤. 내 부하가 말 납품하러 온 여자랑 살림 차리겠다고 난리 치던 때 기억나?”

“내가 그녀한테 반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아니라면 이 뭣 모르는 도련님에게 말해 보시지요, 전하. 무슨 고민을 안고 계시온지요.”

루시온의 인상이 썩어 들어갔다. 엘테르트는 졸릴 때, 뇌에서 입까지의 거리가 짧아지고는 했다. 나흘쯤 밤샘하면 속어는 하나도 쓰지 않고 분노를 내뿜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적당히 앓고 지나쳐 보내.”

옳은 충고였다. 재산이라고는 검 솜씨 하나뿐인―몰락한 백작가의 주인과 황태자. 희극 소재였어도 진부하다고 비웃음당할 법했다. 루시온은 짜증을 느꼈다. 단념하라는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제가 이에샤를 연모한다고 못박는 엘테르트의 태도가 거슬렸다.

“위험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어. 앨저가 갑자기 예뻐 보이더라고.”

“전에도 앨저 경이 예쁜 얼굴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쁜 게 아니라 예뻐 보였다고. 이건 좀 실수했다 싶더라. 하지만 아직 그리워한다 할 만한 마음은 못 돼.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지.”

루시온은 “좋아합니다.” 하는 말을 듣는 게 익숙지 않았다. 황족은 부모·자식 간에도 정을 읊는 일이 적었다. 전하의 여자로 만들어 달라는 애원이라면 들어 보았다. 좋아하고 친근해서, 편하다는 고백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이에샤 앨저는 지닌 재주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나이도 비슷했다. 루시온이 흔들리기에 알맞았다. 이에샤가 남녀 간의 이야기를 한 게 아님은 알았다. 이에샤의 뜻과 루시온의 감상은 떨어진 문제였다. 물 한 잔을 대접해 준 마을 처녀에게 반하는 나그네처럼.

“정말 앨저가 그런 의미로 가지고 싶어지면 큰일이잖아.”

엘테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루시온은 유들유들한 주제에, 어떤 문제에서는 꽉 막혔다. 보람되게 흘러갈 수 없도록 정해진 감정 아닌가. 머리가 가슴을 다스리지 못하더라도 도리 없었다. 내버려두면 되었다. 흐려질 때까지 기다린다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엘테르트에게는 우스웠다.

루시온은 샌님이니 도련님이니 놀려 댔으나, 바깥으로 도는 쪽은 엘테르트였다. 자질구레한 인간관계에는 훨씬 익었다.

“옛날에 내가 그랬지.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말되 쉽게 생각하라고.”

“그 얘기야말로 지금 왜 나와?”

“너와 앨저 경은 가망이 없다. 너는 앨저 경을 좋아하기 직전이다. 쉽게 재 본다면 정답은 모르는 척,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척하다가 끝내는 거야.”

루시온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엘테르트는 누군가에게 설레 본 적이 없어서 냉철할 수 있을 터였다―루시온도 여자를 사랑스럽게 여기기는 처음이었지만 말이다.

“더 쉬운 잣대로 얘기해 줘? 앨저 백작가와 델피르 황가. 어느 쪽이 중할까?”

“당연한 건 왜 묻지?”

“앨저 경은 가문을 부흥시키겠다고 했어.”

미혼의 여자 가주가 집안을 일으키려면 한 길뿐이었다. 데릴사위를 들여 작위를 넘기고,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 황태자는 앨저 백작이 될 수 없었다. 앨저 백작은 황태자비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엘테르트는 ‘너넨 안 돼.’ 하는 뜻을 우아하게도 풀어 주었다.

“애초에 난 모르겠다. 침실에 미인으로 소문난 귀공녀를 밀어넣었을 때도 어떤 놈 계획이냐며 노발대발했잖아. 앨저 경의 어디에 빠진 거냐.”

“그렇게 재능도 있고 재치도 있고 희소성도 있는 여자가 없으니까.”

“……앨저 경이 검 잘 쓰는 여자라 좋아하는 거였어? 그렇다면 백화 기사단에 한 사람 더 있어.”

루시온은 눈을 치떴다. 엘테르트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검 이야기가 나오는가? 엘테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어진 재능으로 노력하는 아가씨는 드물지 않다는 뜻이야. 재능, 재치, 희소성이라니. 곡예단에 뱀과 대화할 수 있는 재치 넘치는 여자가 있으면 네 취향이겠군.”

“내가 바라는 건 라제카처럼 똑똑한 여자나 앨저처럼 고강한 여자다. 이렇게까지 설명해야 돼?”

“학문과 무술에 뛰어난 여자 말고는 무가치하다는 거야?”

엘테르트는 루시온이 재능―그것도 흔하지 않은―있는 사람만 아끼는 게 싫었다. 범재와 둔재도 돌아봐 주기를 바랐다. 모든 사람이 뛰어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끌리는 여자가 하필이면 이에샤라니, 걱정스러웠다.

더구나 이에샤는 ‘특이한 여자’ 취급받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무슨 계기로 반하든 예만 다한다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역사서에는 발가락 모양이 예쁜 여자를 왕비로 삼았던 왕의 기록도 있었다.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로 사랑했다. 엘테르트는 거기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넌 황태자고, 제국민 모두에게는 네 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어.”

“도대체 언제부터 연애 고민이 이쪽으로 빠진 거냐? 에르디, 제왕학이라면 너보다 내가 빠삭하지 않겠어?”

엘테르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동자에 졸음기가 그득했다.

“머리는 나보다 나쁘잖아.”

“……나 간다.”

“안녕히 주무시기를, 황태자 전하.”

루시온은 본전도 건지지 못하고 떠나갔다. 엘테르트는 평화를 만끽했다. 나른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책은 더 읽지 못할 성싶었다. 고요해진 것만으로도 좋았다. 하품하며 ‘번거로운 동생이라니까.’ 하고 떠올렸다.

눈을 감았다. 불빛이 눈꺼풀의 그림자와 섞였다. 시야가 갈색으로 뒤덮였다. 등불을 꺼야 하는데. 초조하면서도 귀찮았다. 심지가 닳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침대로 움직일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근육통이 생기든 말든, 잠들고 싶었다. 루시온이 아니어도 독서는 힘들었을 성싶었다. 백 페이지 남짓에서 반도 기억할 수 없었다.

「멘델린 경, 휴게실에서 눈 좀 붙이는 게 어때요?」

「아뇨. 지금 여기 일을 끝내야 무도회 쪽으로 눈 돌릴 시간이 납니다.」

「백화 기사단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이에샤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다발적으로 되살아났다. 백화 기사단에서 손을 떼고 한 번도 이에샤를 만나지 않았다.

‘자주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는데.’

몽롱한 채로 생각했다. 이에샤 앨저는 남이 해 보지 못한 일을 해내고는 했다. 여자 몸으로 기사가 되거나, 황태자의 마음을 빼앗았다. 그리고 엘테르트에게 “당신이 없어지면 싫다.” 같은 말을 건네기도 했다…….

* * *

‘그 자식, 팔이라도 부러뜨릴걸.’

이에샤는 후회했다. 밤사이 목에 든 멍이 짙어졌다. 검보라색 손자국이 흉했다. 스카프로 가리기도 머쓱했다. 한겨울에도 맨살을 내놓고 다녔었다. 수상해 보일 터였다. 셈브리온을 들볶고 싶어졌다. 킬타로스를 끌고 와, 바닥에 이마를 처박으라고.

기사단 정복의 블라우스는 목을 감싸 주었다. 하나 부질없었다. 킬타로스의 손이 컸다. 멍이 네크라인 위로 삐져나왔다. 수련 시간도 걱정되었다. 셔츠로 갈아입으면 숨길 수 없었다.

결국은 자줏빛 스카프를 둘렀다. 에이릴리의 물건이었다. 구식 디자인이 젊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앨저 경. 목에 웬 거예요?”

“올센 경은 오늘도 일찍 나왔네.”

미엘라가 물어 왔다. 이에샤는 엉뚱한 답만 돌려주었다. 미엘라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하녀 출신이었다.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데에 익숙했다. 이에샤가 말하기 싫어한다는 것쯤은 알아차렸다. 캐묻지 않기로 했다.

이에샤는 갑갑한 목을 어루만졌다. 백화 기사단에는―다른 부처에 비하여―서류 업무가 적었다. 그나마도 미엘라가 도맡아 보았다. 이에샤는 빼놓은 서류를 읽고 서명만 하면 되었다.

기계적으로 ‘I.Alger’ 하고 적어넣던 중이었다. 의아쩍은 부분이 나타났다.

“올센 경. 이거, 잘 모르겠는데.”

“예? 뭐가요?”

“제국 기사단에 보내야 할 협조 공문. 우리가 걔네랑 같이 할 일이 있던가?”

“영춘 사냥 대회에서 황후 마마의 경호는 지금껏 근위 기사단 몫이었습니다. 금년부터 측근만 백화 기사단에게로 위임되었으니, 방어진으로 뽑을 근위 기사를 백화 기사단과 마찰이 없는 자로만 구성해 달라는 공문입니다.”

대답은 문 쪽에서 들려왔다. 부드러우면서도 또박또박한 남자 목소리가 울렸다. 이에샤는 얼굴을 들었다. 금발의 미남자가 양피지 두루마리를 끌어안고, 어깨로 문을 밀며 들어왔다. 이에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람이 오는 줄은 알았으나 엘테르트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멘델린 경!”

“오래간만입니다, 앨저 경. 오늘은 경이 사냥 대회에 대해 잘 모를 듯해서…….”

“왜 이제야 온 거예요?”

============================ 작품 후기 ============================

컨디션이 나빠서 분량이 얼마 안 되네요...

에르디랑 루시온은 저마다의 장단점과 특징이 있는 남주들로 그려 나가고 싶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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