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4 6. 폐허에 틔운 싹 =========================
사내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살기가 자욱했다. 입안이 마를 지경이었다. 12년 만에 만나는 동료는 변함없었다. 짓눌릴 듯한 위압감. 세상 모든 걸 사무치게 미워하는 눈빛. 웬 계집애를 달고 살길래 사람이 바뀌었나 싶었더니만 아니었다. 쓴웃음을 머금었다. 항복하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나야, 나. 곧바로 목부터 떨구지 않다니 너답지 않군.”
“킬타로스?”
셈브리온이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이에샤는 킬타로스가 쓰는 말이, 셈브리온이 쓰던 말과 같음을 깨달았다. 킬타로스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검정에 가까운 고동색 눈동자가 달렸다. 제국인의 눈은 대체로 밝았다.
“세비, 저거 벨체터에서 온 놈이야?”
“이-샤.”
“당신 아는 사람?”
셈브리온이 안타까운 눈길로 이에샤를 보았다. 날씬한 목에 멍이 들었다. 손자국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듯싶었다.
킬타로스는 망연해졌다. 셈브리온의 노여움은 바닥에 주저앉은 계집애를 보자마자 누그러졌다. 자식이 열병에 걸려 안절부절못하는 부모처럼, 제가 더 아프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믿을 수 없었다. 이에샤의 엉덩이 근처를 뒹구는 롱소드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칼날이 익숙했다. 경악스러웠다.
“이브론 너, 힐가의 칼을 녹인 거냐?!”
“다물어라, 킬타로스. 두들겨 패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단순히 어린 애인 끼고 산다 생각했는데 아니군. 저년 대체 뭐야? 뭐길래 네가 힐가의 물건까지 넘겨줘?”
“너 이 새끼……!”
모멸스러운 말씨에 셈브리온은 핏대를 세웠다. 킬타로스의 목도 이에샤와 같이 만들어 주고 싶었다. 참는 까닭은 이에샤가 어리벙벙한 얼굴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샤부터 다독여야 했다. 셈브리온에게도 제자의 안위보다 중한 일은 없었다.
이에샤가 검을 추슬렀다. 일어나 섰다. 셈브리온에게 다가갔다. 셈브리온은 이에샤의 어깨를 붙들고 이리저리 돌리며 상처는 없나 살폈다. 가진 옷 가운데 기사단 정복 다음으로 고급스러운 원피스가 넝마가 되었다는 걸 빼면, 말짱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에샤는 쑥스러움을 지우려고 투덜거렸다.
“죽을 뻔한 건 난데 왜 당신이 울려고 그래?”
“이-샤, 많이 아팠지. 내가 집을 비우는 게 아니었는데.”
“됐어. 낮에는 더워서 늦게 나간 거잖아.”
초봄인데도 셈브리온은 갑갑해 했다. 꽃 피는 철이 반가운 것과는 별개로 공기가 무거워졌다. 벨체터인은 더위에 민감했다. 이에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프고 무서웠지만, 살아남았으니 되었다.
셈브리온과 아는 사이로 보이는 사내가 신경쓰이기도 했다. 셈브리온이 벨체터에 있을 무렵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으므로.
이에샤의 머릿속에서 죽을 뻔한 일은 흐릿해졌다. 방금은 킬타로스를 제압하려다가 당한 것이었다. 베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싸우면 질 턱이 없었다. 셈브리온까지 왔다. 셈브리온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에샤에게 모르핀보다 잘 듣는 진통제였다.
킬타로스가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제국어였다.
“여자.”
“날 부르는 건가?”
“말하시요. 스-임브리온과의 사이. 그는 나와 낡은 친구입니다.”
이에샤는 고민에 빠졌다. 외국인의 제국어를 비웃어도 될까? 셈브리온도 저놈처럼 어눌한 시절을 겪지 않았을까? 귀여웠겠다……. 멀뚱멀뚱하다가, 속시원히 웃기로 했다. 쳐들어와서 목을 조른 놈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겠는가.
“발음 보소. 그래서야 식당에서 밥이나 시키겠어?”
“큭!”
“알아듣기는 잘 알아듣나 보네? 당신이나 말해. 누구야? 아, 모국어로 해도 돼. 통역사 있으니까.”
셈브리온은 곤란한 낯빛을 지었다. 이에샤는 위기감을 깨우쳐야만 했다. 킬타로스는 굶주린 동료들을 먹이겠다고 농가를 몰살시켰던 놈이었다. 이기적이고 모질었다. 이에샤 또한, 제가 일 분만 늦었어도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굴다니! 무의식이 문제였다. 다음번에는 브링을 쓰면 괜찮을 거라는 무의식이.
“이-샤. 옛날에 나랑 같이 일하던 녀석이야. 어떻게 제국에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고르가 거리에서 이브론을 봤다고 떠들어 대더군. 생뚱맞게 죽은 자식 얘기는 왜 꺼내냐고 한 대 팼는데, 진짜 너더라고.”
킬타로스가 끼어들었다. 벨체터어로 늘어놓았다. 이에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서 데리러 온 거다. 안 가겠다고 뭉그적댈까 봐 현지처부터 없애 두려 했지.”
“킬타로스! 이-샤는 그런 게 아니야!”
“고년 참 이름도 귀엽네. 잘 싸우더라? 네가 가르쳤어?”
답답했다. 셈브리온이 낯설었다. 쓰는 말이 달라서인지 목소리나 분위기마저 달라져,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싸늘하고 신경질적인 셈브리온은 퍽 별로였다.
킬타로스는 두려움을 억눌렀다. 매일같이 얼굴을 맞댈 적에는 익숙했건만, 십여 년 떨어졌다고 움츠러드는 제가 우스웠다.
“돌아가자, 이브론. 싸움이 막바지로 치달았다. 너만 오면 단숨에 끝낼 수 있어.”
“난 안 가. 다시는 벨체터 땅을 밟지 않을 셈으로 떠나왔다.”
“어째서? 넌 누구보다도 내란을 끝내고 싶어 했잖아!”
셈브리온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킬타로스는―벨체터의 동료 누구도―셈브리온이 도망한 까닭을 몰랐다. 자신은 내란에 불을 지필 분자였다.
돌아갈 수 있더라도 이에샤를 두고는 떠나지 않을 셈이었다. 셈브리온은 이에샤의 삶을 지켜보고 싶었다. 귀부인으로 꽃피든, 기사로서 이름을 떨치든. 이러한 뜻을 밝힌다면 킬타로스는 이에샤를 없애려 들 터였다.
“힐가가 죽고 모든 게 지긋지긋해졌어. 어차피 나도 죽은 거로 됐다면서?”
“이브론!”
“킬타로스. 너는 내 제자를 해치려 했다. 살려 두는 것만으로도 옛정을 다한 거야. 당장 우리 집에서 꺼져.”
킬타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셈브리온의 기세가 버거웠다. 옛날부터 그랬다. 같은 날, 같은 스승 아래에서 검을 들었는데도 셈브리온은 앞서 나갔다. 나이 스물다섯에는 브링어가 되었다. 세상을 탈탈 털어도 최연소이리라.
포기하지는 않았다. 제가 물어나더라도 아고르가 나설 것이다. 아고르가 안 되면 또 다른 동료가. 셈브리온 데힐에게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오늘은 돌아가지.”
“내일도 모레도 오지 마, 짜식아.”
“……언제부터 그런 말투로 얘기하게 된 거야?”
셈브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소해 보였을 따름이었다. 킬타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창가로 걸어갔다.
이에샤는 두 남자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킬타로스가 떠나갈 낌새는 눈치챘다. 이맛살이 죄어들었다. 자기 멋대로 들어왔으니, 나갈 때 정도는 집주인의 허락을 구해야 옳지 않겠는가? 이에샤에게는 킬타로스가 튀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킬타로스가 한 발을 창문턱에 올린 순간이었다. 등뒤에서 섬뜩한 느낌이 빗발쳐 왔다.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용병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었다.
“무슨 짓이야, 이브론!”
버럭 소리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브링으로 이루어 낸 기검(氣劍)이 머리꼭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수그리지 않았더라면 목이 달아났다.
팔을 추어올린 사람은 셈브리온이 아니었다. 회색 머리카락의 여자였다. 이에샤가 검을 거둬들이며 킬타로스를 노려보았다. 예쁘장한 입술이 벌어졌다.
“너.”
“어떻, 어떻게, 너, 네가. 브링.”
“또 덤빈다면 그땐 죽일 마음으로 싸울 거야.”
많아야 스물, 스물하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킬타로스는 얼이 빠졌다. 터무니없어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셈브리온이 고개를 설레설레했다. 끼리끼리 모인다더니만! 킬타로스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서둘러 창문을 넘어 나갔다. 브링어 둘과 한자리에 있기는 껄끄러웠다.
셈브리온은 묘한 얼굴을 했다. 이에샤는 킬타로스가 피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의도했던 모양이었다. 귀족인 이에샤가 벨체터의 천것―아마도 밀입국했을―을 죽여도 탈은 되지 않았다. 빌미도 있었다. 봐준 것이 뜻밖이었다.
“왜 안 죽였어? 이-샤.”
이에샤가 눈을 치켜떴다. 무슨 당연한 일을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신 친구 같아서.”
눈치가 빠른 건지, 감이 좋은 건지. 셈브리온은 말을 잊었다. 셈브리온의 친구라면 제 목숨을 빼앗으려 했어도 넘어가 준다는 걸까. 이에샤의 애정과 믿음은 이따금 무거웠다. 한 사람에게 집중된 마음을 넓고 얕게 뿌리면 좋으련만.
“다음에 또 이런 일 있으면 죽여. 그래도 돼. 우린 그래도 싼 놈들이야.”
“당신까지 한데 묶지 마. 세비가 세비의 뭘 알아.”
이에샤가 괴상한 소리를 꿍얼거렸다.
검을 움켜쥐었다. 오늘은 검을 떨어뜨리고는 잠들지 못할 성싶었다. 셈브리온은 걱정스러운 낯빛을 띠었다가, 이에샤의 등을 떠밀었다.
“청소해 줄 테니까 거실에서 쉬어. 끝나면 바로 잘 수 있게 씻든가.”
“으응. 고마워.”
이에샤는 셈브리온의 손목에서 달랑거리는 바구니를 빼앗아 갔다. 이건 내가 저장고에 가져다 놓을게.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셈브리온은 쓰러진 마네킹을 일으켜 세웠다. 킬타로스와 이에샤의 싸움 탓으로 먼지가 날렸다. 바닥에는 킬타로스의 발자국이 점점했다―이에샤는 집에 들어올 때 꼭 흙발을 털었다. 한숨이 넘쳐흘렀다.
자신은 벨체터에서 죽은 사람으로 알려진 모양이었다. 짐작은 했다. 셈브리온이 델페레타에서 숨어 지내는 꼴을 두고 볼 동료들이 아니었으니까. 킬타로스. 아고르. 그리운 이름을 둘이나 맞닥뜨렸다. 무슨 까닭으로 제국에 들어온 걸까.
또, 오래간만에 들은 이름이 있었다.
“힐가…….”
힐가 데힐.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 같은 머리 색깔을 지녔다는 이유로 부랑아였던 셈브리온을 데려다 키운 사람. 비렁뱅이를 보면 피죽이라도 쑤어 먹여야 성이 차던 참견꾼.
동시에 셈브리온과 몇 명의 꼬마에게 검술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힐가는 고강한 검사였고, 능력 있는 용병이었다. 그러나 용병 길드에서는 힐가를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 금패를 받아 마땅한 실력자가 은패조차 받지 못했으니. 셈브리온의 양어머니는 궂은일만 하다가 사그라져 버렸다.
셈브리온은 사랑하는 제자가 힐가와 같은 길을 걸을까 두려웠다.
“후우.”
땅이 꺼질 듯한 한숨에 엘테르트는 인상을 썼다.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퇴궐해서까지 저 뺀질뺀질한 낯짝을 봐야 하다니. 불경한 생각을 떠올렸다. 루시온은 소파에 몸을 파묻고, 고개를 젖힌 채였다. 엘테르트는 푸른 사자 성까지 쳐들어온 황태자가 성가셔 죽을 것 같았다. 감기에라도 걸렸으면 싶었다.
“루시온.”
“왜.”
“좀 가라.”
루시온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와 남작이었다. 권력이 깡패 아니던가.
엘테르트는 책으로 코 밑을 가렸다. 루시온을 흘겨보았다. 저래 봬도 일고여덟 살까지는 귀여웠다. 라제카와 란델이 태어난 날을 떠올렸다. 루시온은 이실리아에게 꽃을 가져다주고 싶어 했다. 엘테르트가 “아기씨들이랑 황후 마마께 꽃가루는 안 좋아.” 하고 말리자 울먹였었다. 어질고 상냥한 황태자 전하가 되겠구나 했는데…….
“무슨 일인지 말을 하든가, 객실로 가서 잠이나 자든가. 왜 남의 방에 눌러앉아서 한숨만 쉬어 대?”
“에르디 같이 순진한 도련님한텐 말해 봐야 쥐뿔도 모를 고민이라.”
“그럼 나가!”
좀생이. 루시온이 작지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엘테르트는 공신의 아들―저를 일방적으로 경쟁자 취급하는―에게 쌍소리를 들었을 때도 법도로만 다스렸던 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루시온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주고 싶었다.
“대체 답이 정해진 고민은 왜 하는 거야?”
“내 고민이 뭔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해.”
“앨저 경은 너랑 안 돼.”
루시온은 소파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 작품 후기 ============================
이브론은 벨체터에서 불리던 애칭이고...셈브리온과 이에샤가 처음 만났을 때, 7살 이에샤가 셈브리온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해서 세비라는 애칭이 생겼습니다...
음...애칭 얘기가 나와서 몇 가지 적어 보자면
에이릴리가 부르던 이에샤의 애칭은 에시아였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부르지 않으니 작중에서 나올 일은 없겠지만요...작가는 독자님들이 불러 주시는 이샤를 귀여워서 좋아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