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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는 검 한 자루-41화 (41/164)

00041 6. 폐허에 틔운 싹 =========================

(연참 2/2)

퐁당!

물고기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수면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이에샤는 곁눈질로 보았다. 짠 생선 먹고 싶다. 실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델페레타에는 바다가 없었다. 민물고기만 먹다 보면 바닷물고기가 그리워지기 마련이었다.

루시온은―이에샤가 무슨 멍청한 공상을 하는지도 모르고―곤혹을 느꼈다. 말문을 떼기가 망설여졌다. 켕기는 구석이 있었으므로.

「마법으로 앨저 경의 위치를 찾아요? 오라버니, 그만두세요. 두 다리로 뛰어서 찾는 정도의 성의는 보이시는 편이 백배 낫답니다.」

여동생의 충고를 받아들였어야 했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루시온의 수중에는 이에샤를 추적하는 아티팩트가 있었다. 어서 만나고 싶어서, 황실 마법사를 볶아 만든 것이었다. 돌이켜보니 제가 미친놈 같았다. 걷고 물어서 찾거나 연통을 하면 될 일인데 마법까지 동원하다니. 유난이 따로 없었다. 이에샤의 얼굴을 보고야 깨달았다. ‘대충 속일까?’ 하는 고민마저 들었다.

관두기로 했다. 윗단추가 풀린 셔츠로 손을 집어넣었다. 가죽으로 만든 끈이 잡혔다.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이에샤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보았다. 목걸이에 꿰인 보석이 나타났다. 위아래가 뾰족하고 가운데는 넓은 마름모꼴이었는데, 파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왔다. 아래쪽 끝이 이에샤를 가리켰다.

“이건?”

“앨저 경이 어디 있는지 찾아 주는 아티팩트. 지시하는 방향으로 가다 보면 그대가 나오게 되어 있지.”

루시온은 마음을 다잡았다. 바른대로 고했다. 기사단 입단 시험에서의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자 찾아왔으나, 새로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에샤가 불쾌해하면 어떻게든 보상할 셈이었다.

이에샤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법이 편하긴 하군요.”

“응?”

“원하는 아티팩트를 아무 때나 손에 넣으실 수 있다니 부럽습니다.”

“앨저 경?”

루시온은 당혹했다. 이에샤의 반응은 내다보지 못한 것이었다. 화내기를 바라지야 않았다. 원만하게 넘어갈 수 있다면 반길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샤가 물 흐르듯이 받아넘기자, 꺼림칙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저, 앨저 경. 이상하지 않나?”

“뭐가 말입니까?”

“마법까지 써서 그대를 보러 왔다는 게, 그, 기분 나쁘지 않아?”

“그다지요? 제가 전하께 뭐라고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잖습니까.”

예사로운 대꾸에 루시온의 낯빛이 달라졌다. 무언가가 어긋난 성싶었다. 루시온이 황태자이고 이에샤는 한낱 기사단장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화내지도, 언짢아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는다니 이상했다.

“섬뜩하잖나! 이것만 있으면 앨저 경이 비밀스러운 곳, 그러니까 목욕탕이나 화장실, 으, 아무튼 그런 곳에 들어갔을 때도 내가 찾을 수 있다고.”

“아! 그, 그건 좀 뭣하네요.”

“그대의 허락도 없이 이런 걸 만들었으니 기분 나빠야 정상이란 말이야.”

“……듣고 보니 그렇군요…….”

겨우겨우 이에샤가 심각해졌다. 루시온은 가슴을 치고 싶었다. 어찌하여 성년을 앞둔 여인에게 상식을 가르치고 앉았나? 스스로 지은 죄를 짚어 가면서 말이다.

이에샤는 엄지손을 깨물었다. 루시온의 말이 옳았다. 누가 아티팩트를 써서 저에게 찾아왔더니, 화장실 문과 맞닥뜨린다면 죽고 싶을 것 같았다. 수련할 때 연무장에 있다는 게 알려져도 문제였다. 브링을 들킬지도 몰랐다.

이에샤는 우거지상으로 루시온을 올려다보았다.

“근데 아시는 분이 왜 그러셨죠?”

“그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급했어. 아니, 내가 정말 어떻게 됐었나 봐. 미안해.”

한숨이 새었다. 자신을 만나고 싶었다는 사람에게 따지고 들기도 껄끄러웠다.

“이미 만들어 버리신 걸 어쩌겠습니까. 제가 전하를 상대로 화낼 수도 없고.”

루시온은 또다시 답답함을 느꼈다. 이에샤가 ‘황태자 전하’라고 선을 긋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시온은 분노를 드러내는 사람이 좋았다. 어떠한 감정이든 억누르면, 곪다가 터진다고 믿었으므로. 이에샤도 속을 털어놓기를 바랐다.

“내가 황태자라서 이러는 건가?”

“예?”

“입단 시험 때 앨저 경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알아. 차라리 그날, 내가 그대를 만나러 궁을 나갔던 날처럼 신경질이라도 부리는 편이 낫겠어. 계속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괜찮다고만 하잖아.”

숨도 쉬지 못하고 늘어놓았다. 이에샤를 탓할 처지가 아니면서도 짜증이 났다. 루시온 이벨리오노는 남에게 거절당하는 데에 익숙지 못했다.

이에샤는 눈을 홉떴다. 루시온의 장광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속가슴에 원망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루시온이 저를 마법까지 써 가며 찾아 주어 반가웠고―이것이 잘못된 반응인 줄은 몰랐지만―함께 걸으니 즐거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에샤를 기사로 만들고자 애써 준 사람이 아닌가.

“저는 전하께 화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있어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여. 앨저 경, 에르디한테 말할 때랑 나한테 말할 때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 알아?”

듣자니 정말로 심기가 불편해졌다. 엘테르트와 루시온이 이에샤를 대하는 태도는 판이했다. 이에샤 또한 각자에게 맞추어 대했을 따름이었다. 거기다 엘테르트는 하루건너 하루꼴로 만났지만, 루시온은 옷자락조차 보기 어려웠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화난 줄로 알면서 도리어 성질을 부리는 꼴도 아니꼬웠다. 쌀쌀맞게 입을 열었다.

“멘델린 경은 전하와 다릅니다.”

“대체 어디가 어떻게 다르지?”

“지금 전하처럼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면 기본적으로 믿어 줍니다.”

루시온은 움찔했다. 이에샤를 생각하지 않고 밀어붙여 버렸음을 알아차렸다. 이에샤의 눈총이 따가웠다.

“……미안. 너무 답답해서 또 저질러 버렸군. 경에게 용서받고 싶은데 내빼는 게 싫었어. 그야 앨저 경이 분노를 보인다면 불경이 되겠지만, 우리끼리 있고 내가 먼저 사과하는데도 수그릴 필요는 없다고.”

“내빼지도 수그리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전하께 아무런 악감정도 없으니까요.”

루시온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띠었다. 이에샤는 뒤통수를 긁었다. 제가 지나치게 무뚝뚝이 굴어 온 모양이었다. 터무니없는 오해를 샀다. 셈브리온도 엘테르트도 루시온도, 남자란 꼭 성가신 부분이 있었다.

“오히려 저는 전하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오늘도 만나 뵈어서 꽤 신났어요.”

“……정말인가?”

“물론입니다. 그 아티팩트만 없애 주신다면 저희 사이에 따질 일도 사라질 것 같네요.”

“물론 그럴게. 그대의 허락 없이 이런 걸 만든 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이에샤는 살갑게 보이기를 바라며 루시온에게 웃어 주었다.

하나, 루시온이 아티팩트 때문에 쩔쩔매며 미안해하는 까닭은 와 닿지 않았다. 낯부끄러운 일을 맞을지는 몰라도 해될 건 없었다. 제 몸을 지킬 자신이 가득한 이에샤로서는 위기의식을 가지기가 어려웠다. 루시온은 이에샤의 속내를 꿰뚫어보았다.

“앨저 경은 역시 시류를 전혀 몰라.”

“으, 노력하는 중입니다만.”

“더 노력해야겠어. 세상엔 그대를 위험에 빠뜨릴 사람도 많다고.”

이에샤는 마음속으로 ‘아닐 텐데.’ 하고 꿍얼거렸다. 루시온은 이에샤가 제 말을 흘려듣는다곤 생각하지 못하고 계속해 나갔다. 무방비가 지나쳤다. 뛰어난 검술사라고 해도 걱정되었다.

“나만 해도 그래. 지금은 우리가 원만한 관계라지만, 내가 권력자라는 걸 잊지 마. 경에게 강제로 싫은 명령을 내리면 어떡할래? 경계하란 말이야.”

“싫은 명령이요? 잘, 상상이 가지 않는데.”

“그 빨간 머리 용병을 황궁으로 데려오라고 한다면?”

이에샤의 인상이 썩어 들어갔다. 셈브리온을 걸고넘어지다니! 이에샤의 안에서 셈브리온 데힐은 건드려서는 안 될 울타리와 같았다. 세상 사람 모두를 더해도 셈브리온만 못했다. 남의 입에 오르내리기만 해도 아까운, 사랑스러운 스승.

“제국을 뜰 겁니다.”

“그랬을 때 이런 아티팩트로 뒤쫓을 수가 있잖아. 이제 감시당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겠나? 내 섣부른 선택에 열받아야 할 일이라고, 이건.”

“그렇네요. 스승님이 휘말린다니 절대 안 됩니다.”

이에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에 중요한 문제를 깨닫게 되었다. 셈브리온과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경각심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루시온부터 경계 대상에 올렸다.

“조심해야 해. 여자는 더더욱.”

루시온은 자신이 위험 인물로 찍힌 줄도 모르는 채, 상투적으로 마무리지었다.

이에샤는 눈살을 찌푸렸다. 루시온의 이야기가 께름칙한 기분을 불러들였다. 여자가 남자보다 조심해야 한다니. 불공평하게 여겨졌다. 장정 열 명이 달려들어도 물리칠 수 있는 이에샤와 다르게, 대부분의 여자가 연약하기 때문일까. 약한 자는 움츠리고 살아야만 하나.

엘테르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력이란 사라져야 합니다. 누가, 얼마나 힘을 지녔냐. 다른 이와 얼마나 차이가 나냐. 거기서부터 가장 자연적인 죄악이 태어나는 겁니다. 검을 쥐는 앨저 경한테는 얼토당토않게 들리겠지만.」

복잡했다. 셈브리온의 검로보다도 까다로웠다. 루시온이 꼬집은 대로 더 노력해야 할 성싶었다.

“이벨리오노 전하.”

“응?”

“항상 전하께 배우는 게 많습니다. 그러니까 전 전하를 싫어하는 게 아니고…….”

이에샤의 말끝이 잦아들었다. 두 뺨에 따끈따끈한 느낌이 들었다. 셈브리온이 아닌 사람에게 호의를 전하려니 쑥스러웠다.

“좋고 친근해서, 편하게 대하는 겁니다.”

루시온이 입술을 꽉 맞물었다. 이에샤의 옆얼굴을 뚫어지라 보았다. 잿빛 머리카락 틈으로 드러난 귀가 발긋했다. 머릿속에 ‘이건 안 된다.’ 하는 생각이 차올랐다.

루시온 이벨리오노 황태자는 재능 있는 사람을 아꼈다. 바꾸어 표현하면, 인재에게 반하기 쉬웠다. 작년까지 루시온을 마뜩하게 한 여성이라고는 라제카가 유일했다. 동생뿐이었기에 상상치도 못했다. 작은 속삭임만으로 탐나던 여자가 어여쁜 여자로 바뀌리라고는.

“앨저 경!”

“예?”

“내가 급하게 할일이 떠올랐거든. 얼굴 보고 축하도 해 줬으니, 그, 이만 가 봐야겠군!”

“예. 전하를 전송합니다.”

이에샤는 붙잡지 않고 인사했다.

이에샤의 고개가 내려갔다 올라오며, 햇살이 속눈썹에 부딪쳤다. 자디잔 빛 조각들이 눈동자의 색깔을 밝혔다. 깊은 물속에 하늘이 비친 것만 같았다. 루시온은 서둘러 돌아섰다. 벌게진 얼굴을 들킬까 두려웠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 소설 내에서 제국어와 외국어를 구분할 필요성을 못 느껴 이에샤의 이름만 이-샤로 표기하고 있지만, 셈브리온은 제국어로 말할 때 모든 ㅔ 모음에서 발음이 사알짝 엉성해집니다...

'벨체터'는 제국어 표기로, 벨체터인이 고국을 부를 때는 벌취터에 가까운 소리가 납니다...

셈브리온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셈브리온이 자기 소개를 하면 씜브리온 비슷하게 들리므로 제국인은 처음 듣고는 정확하게 받아 적지 못합니다... 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서 셈브리온인 거지 듣기로는 셈브리온으로 들리지 않으니까요...

물론 소설 바깥에 있는 작가와 독자님들께는 그냥 셈브리온입니다...

본편과도 아무 관계없는 설정입니다...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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