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0 6. 폐허에 틔운 싹 =========================
(연참 1/2)
이에샤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엘테르트가 마지막을 고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웠다.
“예?”
바보같은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예사로운 태도로.
“부하들도 생겼으니 앨저 경도 실무를 봐야지요. 지금까지 대부분의 서류 결재를 제가 함께했습니다만 이 이상은 월권입니다. 올센 경한테 준 양피지에 모든 업무 요령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같이 읽으십시오.”
“자, 잠깐만요! 멘델린 경은 황궁의 모든 부처에 관여한다고 했잖아요?”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백화 기사단도 다른 곳과 같은 선상에 둘 겁니다. 여기에만 시간을 쏟을 수도 없으니.”
엘테르트의 이야기는 옳았다. 이에샤가 기사단장이 된 지도 세 달하고 보름이었다. 언제까지나 수련·순찰만을 되풀이하며 지낼 수는 없었다. 미엘라라는 보좌관도 생겼다. 기사단의 모든 일을 아울러 보아야 했다. 처음은 누구나 서툰 법이니, 시작을 해야 숙달도 되리라. 엘테르트는 도울 만큼 도와주었다.
어째서 받아들이기 힘든 걸까. 이에샤는 짜증을 느꼈다. 100일 남짓한 시간을 함께해 놓고, 태연히 끝이라 말하는 엘테르트가 얄미웠다. 백화 기사단에 볼일이 생기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얼굴을 비치지는 않을 터라는 게 싫었다.
따지고 보면 엘테르트는 셈브리온 다음으로 이에샤와 관계를 이어 온 사람이었다.
“그, 래요. 좀 섭섭하네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엘테르트가 팔짱을 끼었다. 고개를 삐딱이 했다. 눈빛에 의문이 깃들었다.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이에샤는 새삼스레 엘테르트를 멀게 느꼈다.
“앨저 경은 저를 싫어하잖습니까. 훨씬 기뻐할 줄 알았습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엘테르트 멘델린은 싫은 놈이었다. 이에샤에게만 쌀쌀히 굴고, 투덜거리고, 피해 다니기까지 했는데 어찌 좋아하겠는가? 이에샤도 제가 아쉬워하는 까닭을 몰랐다. 백화 기사단을 오롯이 맡게 되었으니 기뻐해야 맞았다.
엘테르트를 싫어했지만, 엘테르트가 뜸해져도 싫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에게 배운 점이 많았다.
싹수없이 구는 평기사를 원칙―백화 기사단장은 제국 기사단장과 동등하다―만으로 쫓아냈을 때가 그러했다. 이에샤는 검을 뽑으려고만 했지, 주어진 권한을 내세울 생각은 못 했다. 깽판을 놓지 않고도 일이 해결된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이에샤를 꺼리는 영애에게 이에샤가 당신 같은 사람을 지키는 기사이며, 같은 성별끼리만 이해할 고충을 나눌 상대라고 설득해 주기도 했다. 그녀는 이에샤가 부른 하녀 덕분에 급자기 시작된 달거리를 수습할 수 있었다.
역시 이에샤에게는 엘테르트가 필요했다.
“저는 그래도, 멘델린 경이 없어진다면 싫어요.”
“…….”
“왜 그래요?”
엘테르트로부터 답이 없었다. 이에샤는 의아스레 엘테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엘테르트는 이상한 낯빛을 띤 채였다. 무어라 말하고는 싶은데,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흰 얼굴이 엷게 달아올랐다.
“어, 없어진다니. 일이 있으면 석곡궁에도 들를 겁니다. 사람이 어디 멀리 가는 것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이전 같이 드나들지는 않는다는 거잖아요.”
“자주 찾아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이에샤의 표정이 피어나듯이 밝아졌다.
“정말인가요?”
엘테르트는 고개를 비꼈다. 좋은 사이도 아니건만, 친근하게 닿아 오니 곤란했다. 둘은 남녀였다. 사람들 앞에서 지금처럼 이야기한다면 염문이 돌 터였다. 다음에 주의를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자리에서 타이르자니 낯이 뜨거워질 것 같았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오늘도 일이 많으니.”
“가세요. 다음에 봐요.”
“……예.”
엘테르트가 사무실에서 나갔다. 이에샤는 폭, 한숨지었다. 다른 사람들 쪽으로 돌아섰다.
양미간을 좁혔다. 어째서인지 시더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스란이 복잡한 눈길로 쳐다봐 왔다. 미엘라는 얼굴이 새빨갰다. 영문을 모를 광경이었다.
시더가 용감하게 말문을 떼었다.
“앨저 경, 그런 거였어요? 어머, 어머, 어머.”
“뭐가?”
“멘델린 남작님 좋아하셨어요?”
이에샤는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발이 꼬일 뻔했다. 균형 감각이 뛰어나다 보니 드문 경험이었다. 밀레나 때문에 천하의 몹쓸 년이 되었던 날보다 더한 황당함이 밀려왔다. 좋아해? 누가? 누구를?
“얘, 시더. 너 잘리고 싶니? 아니면 마구간으로 소속 바꾸고 싶어?”
“아,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한동안 얼굴 맞대고 지내던 사람이 이제 안 온다잖아. 싫은 게 당연하지. 어떻게 생각이 그런 쪽으로 뻗쳐.”
투덜투덜하며 의자에 앉았다. 엘테르트가 내려놓고 간 양피지와 책들이 보였다. 미엘라를 위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러 와서 겸사겸사 마지막을 고하다니, 이에샤에게만 나쁜 놈다웠다. 마주앉아서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같이 일합시다.” 하고 인사하면 큰일이라도 나는가.
시더가―이에샤의 으름장에 움츠러들어 놓고도―종알거렸다.
“그럼 제가 떠난다고 해도 앨저 경은 섭섭하게 생각해 주실 건가요?”
이에샤는 멈칫했다. 고민에 잠겼다. 시더의 물음은 제법 날카로웠다. 이따금 찾아오는 엘테르트보다야 시더를 오래 보았는데, 석곡궁의 하녀가 바뀌면 어떨까?
상상해 보아도 아쉽지 않았다. 이에샤는 원래 사람 사귀기를 싫어했으므로. 하녀가 누구든지 일만 잘해 주면 되었다.
“그래. 당연하지.”
그런데도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에브라힐 궁전 복판에는 황제의 거처가 자리했다. 본궁을 가운데에 두고 증축해 나간 결과였다. 별궁에는 식물에서 따온 이름을 붙였으나, 본궁은 그러지 않았다. 궁전의 심장이자 바탕―본궁의 이름이야말로 ‘에브라힐’이었다.
그 앞에 종탑이 섰다. 키가 성벽에서도 보일 만큼 드높았다. 매달린 쇠 종은 사람도 집어삼킬 법했다. 정각마다 종지기가 같은 횟수만큼 종을 쳤다. 행사가 있는 날에도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뎅그렁…….
이에샤는 퍼지는 잔향에 귀를 기울였다. 새벽에는 종탑도 잠들었다. 한 번 울리고 만다면, 13시라는 뜻이었다. 늦은 시각이 아닌데도 피곤했다. 사람과 부대끼느라 지쳤다. 셈브리온의 검을 받아 내는 편이 쉬울 성싶었다.
미엘라는 유능했다. 엘테르트가 물러서자 눈덩이처럼 불어난 서류를 척척 풀어 나갔다. 경험이 있느냐 물어보자 처음이라고 답했다. “멘델린 남작님이 워낙 정리를 잘해 주고 가셨어요.” 하고 말했지만, 이에샤는 양피지를 읽고도 사무에 젬병이었다.
결국은 오전 수련을 빼먹었다. 스란은 발걸음도 가벼이 연무장으로 나갔다. 죽을 만큼 부러웠다. 이에샤는 자리를 미엘라에게 넘겨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점심때가 지났다. 순찰을 돌아야 했다. 오늘부터는 스란과 구역을 나누었다. 특별히 여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본디도 일은 많지 않았으니. 1월 내내 무뢰한 같은 제국 기사에게 장갑을 던지고 다녔더니, 에브라힐 동쪽으로 오는 남자 자체가 줄어들었다. 엘테르트는 죽상을 했지만.
‘대뜸 무력으로 해결하려 들면 피해자도 놀란다고 했지.’
엘테르트의 말대로였다. 농민의 딸에게 추근덕대는 기사를 패 줬더니 그녀가 도망간 적도 있었다. 며칠 뒤 석곡궁으로 찾아와 감사를 표하기는 했으나, 머쓱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에게 배운 점들을 되새기며 걸었다. 오른쪽으로 연못이 펼쳐졌다. 어느 귀부인이 조그만 딸의 손을 잡고 물고기를 구경했다. 실바람이 그녀의 모자 리본을 흔들고 갔다. 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계절이 바뀌면서 사람의 마음도 누그러지는지, 잔잔한 나날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이에샤의 어깨를 쿡 찔렀다. 이에샤는 놀라지 않았다.
“귀부인의 몸에 함부로 손대시면 곤란합니다, 전하.”
“아, 그랬지. 앨저 경은 앨저 백작이기도 했지. 어떻게 알았어?”
“걸음새나 숨소리 같은 게 전하였으니까요.”
루시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띠었다. 그만큼으로 어떻게 사람을 구분한다는 말인가? 하나 이에샤는 정말로 뒤돌아보지 않고 루시온을 짚어 냈다.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샤가 루시온 쪽을 향하였다.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추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래간만이야. 못 보던 사이 더 늠름해졌는걸?”
“칭찬으로 받잡겠습니다.”
“당연히 칭찬이지.”
루시온이 시원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친형제는 아니라지만, 사촌끼리 참 달랐다. 엘테르트는 소리 내어 웃는 일이 드물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두 눈에 환한 빛을 담을 따름이었다.
이에샤는 루시온 쪽이 마음에 들었다. 엘테르트의 몸가짐은 숨막히도록 점잖았다.
“무슨 생각하나?”
“아, 예. 전하께서 웃으시니 공기가 다 맑아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앨저 경이 면치레에도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군.”
“아무렴요. 전하랑 제가 만난 날이 손에 꼽히는걸요.”
루시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샤는 여전히 야멸찼다. 백화 기사단장이 되고도 누그러질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기사단 입단 시험이 응어리진 모양이었다. 루시온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화난 사람에게 용서를 다그쳐서도 안 될 노릇이었다. 남에게 굽히고 들어가기는 처음이어도 그쯤은 알았다.
루시온은 이에샤가 좋았다. 능력도 있고 재미도 있지 않은가. 잘 길러 내서 제 사람으로 두고 싶었다. 노여움을 풀기를 바랐다.
정작 이에샤는 ‘왜 저리 수심에 잠기셨지?’ 하며 의아해했다. 루시온이 엘테르트처럼 정중했다면 이에샤도 같이 대했을 것이다. 이에샤에게는 황태자인 루시온이 소공작보다 편안한 셈이었다.
“오늘 그대한테 동료가 생긴다고 들어서 왔어. 오전에 할 일은 어제 마치고 오후에 할 일은 오전에 끝냈지.”
“예? 왜 그렇게까지……?”
“축하해 주고 싶었으니까. 점점 기사단의 구색을 갖춰 가는군. 경이 애쓴 덕분이야.”
이에샤의 눈이 동그래졌다. 축하와 칭찬을 받을 줄은 몰랐다. 뱃속이 간질간질했다. 신년맞이 무도회가 끝나고, 엘테르트에게 “잘하셨습니다.” 하고 들었을 때와 비슷했다. 언제나처럼 툴툴대며 받아치기가 무엇했다.
“감, 감사합니다. 제가 많이 애쓰기는 했죠.”
“푸하! 이럴 땐 별로 애쓴 것도 없다고 대답해야 하지 않나?”
“싫습니다. 저 혼자 황궁 동쪽을 다 둘러보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평기사 한 명 없이 덜컥 기사단장으로 앉혀 버리신 탓입니다.”
“그래, 그래. 미안하다고.”
루시온이 과장스레 양손을 들어 보였다.
이에샤는 물끄러미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대답대로라면 이쪽에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를 찾아온 것이었다.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제가 여기 있는 줄은 어찌 아셨습니까?”
“음……. 앨저 경, 우리 좀 걷지 않겠어?”
루시온은 물음에 권유로 답했다. 이에샤는 구태여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연못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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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테르트하고도 루시온하고도 크게 진전시키겠습니다...
셈브리온 눈에는 둘 다 별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