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6. 폐허에 틔운 싹 =========================
번듯한 집안의 딸이 백화 기사 자리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에샤도 알았다. 황제의 신임을 받던 스란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헛물 같았다. 미엘라도 서향궁에서 왔으니 단정하리라 예상했건만 틀렸다. 실망스러웠다. 남자 기사 중에 평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백화 기사단은 처지가 달랐다. 인상을 바꿀 만한 사람이 들어오기를 바랐다.
이에샤의 낌새가 좋지 않자 미엘라는 벌벌 떨었다. 가는 몸이 더 움츠러들었다. 이에샤는 저보다 어린 여자애를 겁박한 것 같아서 언짢아졌다.
“그대는 늦지 않았어, 올센 경.”
“겨, 경이요? 저요? 제가요?”
“기사 작위를 내린다는 얘기 듣지 못했어?”
미엘라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이에샤는 그게 들었다는 뜻인지, 듣지 못했다는 뜻인지 고민했다. 사복 차림을 보면 후자일지도 몰랐다. 기사단 정복을 받지 못한 걸까?
하지만 미엘라는 “진짜였다니. 신이시여 맙소사.” 하고 중얼거렸다.
“저는 공주님이 장난을 치시는 줄 알았어요. 그냥 앨저 백작님이 일하실 때 옆에서 거들면 된다시길래, 오늘부터 석곡궁에서 허드렛일을 하겠구나 했는데.”
“그럼 백화 기사단 옷은 받은 거야?”
“바지인데다 그렇게 고급스러우니 당연히 잘못 배달된 줄 알았어요.”
이에샤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상관을 습격했던 스란마저도 어처구니없어했다. 잘 지낼 수 있을까. 이에샤의 속에서 불안이 피어올랐다.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은 한 기사단을 이끄는 몸이었다. 어설픈 부하라도 다독여, 제 몫을 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에샤는 스란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스란 경.”
“말씀하십시오.”
“대련을 청한다면 시간 되는 한 얼마든지 받아 줄 테니까 다짜고짜 덤벼들지 마. 오늘 일은 불문에 부치겠어.”
“예. 감사합니다.”
미엘라가 딸꾹질했다. 단장과 동기가 싸움을 벌였다는 대화에 놀란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미엘라가 겁먹지 않도록, 머릿속으로 낱말을 고르고 골랐다.
“올센 경. 호칭에도 익숙해져야 해. 경은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받았고, 남자 중에는 평민이면서 기사가 된 사람이 얼마든지 있잖아. 그거랑 똑같다고 생각해.”
“하, 하지만 전 싸울 줄도 모르는걸요.”
“싸우지 않아도 괜찮아.”
미엘라는 이에샤의 사무적 능력과 문장력, 계산력 따위가 모자라서 왔다. 검 대신에 펜을 들면 되었다. 기사답지 못하다고 해도, 언제는 백화 기사가 제국 기사와 같았는가?
“만약 경이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한다면 내가 가르쳐 주겠어. 그렇지 않다면 사무실에서 날 도와주기만 하면 돼. 순찰 돌 동안 찾아오는 손님 접대도 맡아 주면 고맙고.”
“그런 일이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다만, 석곡궁까지 오는 사람은 대부분 귀족이다.”
미엘라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이에샤는 마지막으로 “내일부터는 기사단 정복을 입고 나오도록.” 하고 못박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를 바꾸고자 밝은 목소리를 꾸며 냈다.
“올센 경? 이쪽은 스란 경. 스물네 살이고 올센 경처럼 평민 출신이다. 스란 경, 올센 경은 열일곱. 공주님의 별궁에서 왔지.”
“잘 부탁한다.”
스란이 무뚝뚝하게 인사했다. 미엘라는 조심조심 스란을 올려다보았다. 이에샤도 키가 큰데, 스란은 그보다 컸다. 온몸에 팽팽한 근육이 붙었다. 긴 머리카락을 묶지 않았더라면 남자인 줄 알았을 것이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미엘라의 입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에샤가 불쑥 발걸음을 옮겼다.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시더가 화들짝하며 물러섰다. 기사 세 명이 대화하는 방에―한 명은 같은 하녀 출신이었지만―들어오지 못하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이에샤는 시더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미안, 시더.”
“네? 왜요? 무슨 일 하셨어요?”
“오늘 청소가 좀 힘들 거라서.”
이에샤와 스란 탓에 사무실 바닥을 뒤덮었던 양탄자가 엉망이 되었다. 시더는 불안한 얼굴로 안에 들어섰다. 이윽고 한숨을 푹 쉬었다. 미엘라가 “내가 도울게!” 하고 나섰다. 이에샤는 팔을 뻗어 미엘라를 막았다.
“시더한테는 시더의 일이 있고, 올센 경한테도 자기 몫의 일이 있는 거야. 하녀 일까지 하려고 하지 마.”
“죄, 죄송합니다. 앨저 백작님.”
“앨저 경. 같은 기사단 소속이니까.”
엄격하게 호칭을 바로잡아 주었다. 미엘라가 움찔했다. 시더에게 하는 걸 보면 소심한 성격은 아닐진데, 귀족을 무서워하는 듯했다―스란은 겉모습 때문에 꺼리고. 친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릴 성싶었다.
“업무 얘기를 해 볼까? 백화 기사의 소임이 뭔지는 알겠지?”
“드넓은 황궁에서 곤경에 빠진 여자를 보면 돕는다고 들었어요.”
“예비 강간범 놈들과 결투를 벌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미엘라와 스란이 동시에 대답했다. 이에샤는 인상을 구겼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고, 어느 쪽이나 미묘했다.
그동안 귀부인의 길안내나 살롱 경호를 맡기는 했다. 하나 부차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다. 본 목적은 스란이 맞추었다. 말씨만 다듬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에샤가 울적해 하자 두 사람은 의아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에샤는 정말이지 잘해 나갈 자신이 없었다.
“둘 다 정답으로 하자. 하지만 스란 경, 되도록 결투는 피해 다오. 잔소리 늘어놓는 사람이 있으니까.”
“백화 기사단에 누가 더 있다고는 못 들었습니다만.”
“있어, 한동안 협력하는 높으신 분.”
“그건 저 말하는 겁니까?”
솜털이 곤두서는 줄 알았다. 엘테르트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백화 기사들과 시더를 둘러보았다. 이에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오는 기척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긴장했었다니!
엘테르트는 서류와 책을 한아름 끌어안은 채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앨저 경. 시더. 스란 경과 올센 경도 반갑소. 다들 일찍 나올 줄 알고 와 봤더니 적중했군요.”
“멘델린 남작님도 안녕하세요!”
시더만이 명랑하게 엘테르트를 맞이했다. 미엘라가 “히익.”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하녀에서 기사로 신분 상승한 미엘라에게, 멘델린이라는 이름은 아직 버거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품안의 물건들을 내려놓았다.
“올센 경.”
“네에이!”
미엘라의 입에서 ‘네’도 아니고 ‘예’도 아닌 소리가 튀어나왔다. 엘테르트는 미소 지었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엘테르트를 앞에 둔 평민은 대부분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이에샤는 엘테르트가 미엘라를 부르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엘라의 역할은 보좌관과 비슷했다. 의논할 바가 있다면 단장인 이에샤를 불러야 옳았다.
“공주님께 영특하다고 듣기는 했다만 경의 성취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자 왔다. 간단히 물어보고 끝내지.”
“시, 시, 시험인가요? 멘델린 남작님.”
“‘멘델린 경’으로 충분해. 기사 작위는 없지만 공이라 불리기에는 이르니.”
엘테르트는 부드럽게 일러 주었다. 하대를 하면서도 몸가짐은 친절했다. 이에샤는 도리 없이 억울을 느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저다지 잘해 주는 놈이, 저에게는 왜 그랬단 말인가? 괜스레 발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엘테르트가 이에샤를 힐끗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길이 열받았다.
“먼저, 셈은 얼마나 할 수 있지?”
“곱셈과 나눗셈을 세 자릿수까지는 종이에 쓰지 않고 할 수 있습니다.”
“암산이 된다고?”
“예. 저는 그, 어린 공주님께서 셈을 배우실 때 도둑 공부를 한지라 처음부터 머릿속으로만 계산했거든요. 그리고 장부를 읽을 줄 압니다. 서향궁 예산을 관리하시는 베르딕 후작 영애를 돕기도 했습니다.”
엘테르트의 얼굴에 달가운 빛이 스쳤다. 미엘라 올센은 예상보다 뛰어났다. 이만하면, 백화 기사단에서 올라오는 보고서 중 틀린 부분을 체크해 돌려보내는 일이 사라질 성싶었다. 이에샤의 부담도 줄어들 터였다.
“언어는? 외국어는 가능한가?”
“외국어는 잘……. 제국의 고시(古詩)라면 어느 정도 읽습니다.”
“외국인을 접대할 일은 없을 테니 나쁘지 않다. 고어를 안다면 귀부인을 모실 때 쓸모있을 날이 오겠군.”
“어째서죠?”
이에샤가 끼어들어 물었다. 엘테르트는 미간을 좁혔다. 이에샤의 질문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꺼림칙한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사교계에서 이따금 벌어지는 행동입니다. 갓 데뷔한 어린 영애나 재정 문제로 교사를 부르지 못하는 집안의 여식이 과녁이 되는데, 일부러 앞에서 고시를 읊고 저희끼리 감상을 나누곤 하지요.”
“와, 진짜 못됐네요.”
이에샤의 곧은 대꾸에 실웃음을 흘렸다.
귀공녀는 속에 든 생각을 고스란히 털어놓지 않는다. 돌리고, 고치고, 덮어씌워서 뱉어 낸다. 말조차 한껏 치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이에샤처럼 굴었다가는 순식간에 물어뜯길 것이다.
점잔을 빼는 대화가 필요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엘테르트는 이에샤의 ‘야성적인’ 화술도 괜찮다고 여겼다. 이에샤는 직설적일 뿐 무례하지는 않았다.
우습게도 귀공녀의 입담을 빼어나게 구사하는 이가 이에샤의 이복동생이었다. 밀레나는 신년맞이 무도회 뒤로 엘테르트를 찾지 않았다. 파티에서 오며 가며 마주쳤을 따름이었다. 그때마다 밀레나는 이에샤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이에샤는 밀레나의 이름조차 꺼내는 적이 없었고. 묘한 자매였다.
‘뭐, 성격 차이겠지.’
드러날락 말락 고개를 털었다. 잡념을 떨구어 냈다.
“양피지에는 지금까지 내가 맡아 본 백화 기사단 업무를 정리해 놓았다. 이제부터는 올센 경, 경의 일이 될 거다. 가져온 책들은 바르벨로샤 공주님께서 보내신 학술서이니 나중에 감사 인사를 올리도록. 수학에 힘쓰라고 하시더군.”
“고, 공주님이요?”
“그리고 앨저 경을 잘 도와 달라고 말씀하셨다.”
“물론이죠! 공주님은 건강하셨나요?”
엘테르트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그끄제까지 서향궁에서 일하지 않았나?”
“아, 아, 맞다. 그랬지.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하녀 출신의 기사는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똑똑한 소녀인데, 이상하리만치 허둥거렸다. 제가 사라져 주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이에샤도 새 동료와 차분하게 인사를 나누고 싶을 것이다. 엘테르트는 이에샤를 돌아보았다.
“앨저 경.”
“네, 멘델린 경.”
입매를 휘었다. 고아한 낯에 웃음이 번졌다. 이에샤는 까닭 모르게 조마조마해졌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엘테르트가 말했다.
“축하합니다, 그동안 혼자 해 나가느라 고생했습니다. 이제 내가 백화 기사단에 간섭할 일도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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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올리지 못할 거 같아서 오늘 한 편 더 올립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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